23.03.21 11:28최종 업데이트 23.03.2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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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설국열차>에서 인류의 마지막 운송 수단으로 기차가 묘사된다. ⓒ 모호필름

 
100년에 걸친 유럽의 산업화 과정은 19세기 들어 자본주의의 완성으로 정점을 찍었다. 자본주의는 대량 물자 운송의 실현으로 완성됐으며 대량 물자 운송은 철도가 상용화되면서 가능했다. 철도의 친환경성과 효율성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설국열차> 같은 디스토피아 영화에서는 인류의 마지막 운송 수단으로 기차가 묘사된다.

철도는 본래 인력거와 마차를 위한 길이었다. 그러다 말의 힘과 속도를 능가하는 기관차가 탄생하면서 말을 밀어내고 철길의 주인이 된다. 기차를 철마(鐵馬)라 부르는 한국어 표현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전까지 운송에서 말이 가졌던 절대적 지위를 생각하면 말이다.


1830년 8월 28일 미국 볼티모어·오하이오(B&O) 철도 노선에서 세계 최초로 펼쳐진 기차와 말 사이의 속도 대결 승자는 말이었다. 하지만 단 1년 만에 승부는 뒤집히고 만다. 힘과 속도에서 모두 말을 능가한 기차는 이로써 운송의 제왕이 된다. 운송에서 인공 기술이 신의 피조물을 능가하는 순간이었다.

200여 년이 지난 지금, 인류는 이제 물리적 힘이 아닌 정신세계에서 인공 기술이 신의 피조물을 추월한다는 기대와 우려 속에 살고 있다. 미국의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가 보르헤스를 인용한 것처럼 지능의 혁명적 발전이 낙관과 우려라는 모순적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AI)의 발전은 빠른 속도로 인간이 행하는 상당한 부분의 지적 활동을 잠식하고 있다. 

최근 회자하는 AI 챗봇 '챗GPT'(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가 대표적이다. 인공지능은 이제 정보의 저장, 단순 처리를 넘어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하며 판단까지 인간을 대신하고 있다. 인터넷의 발명이 정보 공유의 혁명을 낳았다면 이제는 기계에 의한 정보 공유를 넘어 기계에 대한 정보 의존의 시대로 전환되고 있다. 기계가 지식 철도의 주인 자리를 꿰차려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물류의 대규모, 장거리 이동으로 자본주의 세계의 서막을 예고했던 200년 전처럼, 우리는 정신문화의 혁명이 이끌게 될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미래를 앞두고 있다.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새로운 세계로의 적응과 함께 통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적응과 통제를 위해서는 신문명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잘못된 이해는 무조건적 맹신이나 과도한 공포를 유발하게 된다. 챗GPT에 대한 본질적 질문과 대답이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과연 챗GPT가 인간의 인지 체계를 대신할 수 있을지 정확한 이해를 할 때 맹신도 공포도 극복된다. 

기계가 인간의 두뇌를 능가할 수 있을까
 

지난 8일 <뉴욕 타임스>에 실린 "노엄 촘스키: 챗GPT의 거짓된 약속" ⓒ 뉴욕 타임스


노엄 촘스키의 <뉴욕 타임스> 기고문은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챗GPT의 거짓된 약속'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공지능의 긍정적 역할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공지능이 인간의 두뇌를 능가할 것이라는 일반론적 평가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인간의 뇌에 비교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는 지금, 촘스키의 지적은 시류에 비추어 매우 적절하다. 

노엄 촘스키는 적어도 영향력만큼은 20세기 중반 이후 최고의 언어학자다. 일반인에게는 정치사상가, 평화운동가로 더 명성이 높지만, <통사구조론>(1957년) 이후 그가 이끈 언어연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반향과 지류를 양산해 냈다. 심지어 후학들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이론적 변혁과 수정을 스스로에 가하기도 했다. 

그의 이론이 세계 언어학계의 흐름을 바꿔 놓기 전, 젊은 시절의 그는 논리학, 수리언어학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한 대담에서 수학 분야의 어떠한 학위가 없는 자신의 말을 수학자들은 귀담아듣는데 정치 분야의 학위나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정치 이론가들은 그의 말에 귀를 닫는다고 일갈한 바 있다. 

과연 촘스키다운 논박이며 인간은 지적 내용이 풍부할수록 자격 증명보다는 콘텐츠에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말이다. 그의 수학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언어학자로의 명성 때문에 수학자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을 테니.

이처럼 촘스키는 언어학자로서 수리논리, 형식언어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진단한 챗GPT의 정체는 '수백 테라바이트의 데이터를 수집하면서 가장 그럴듯한 대화형 답변 또는 학문적 질문에 가장 가능성 있는 응답을 제공하는 패턴 매칭을 위한 육중한 통계 엔진'이다. 그런 기계가 인간의 두뇌를 능가할 수 있을까?

인지언어학의 대가 촘스키의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에게 인간의 정신은 오히려 반대로 소량의 정보로도 작동하는 놀랍도록 효율적이고 우아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물론 '놀랍다'라거나 '우아하다'는 그의 표현이 덮을 만큼 촘스키의 학문관이 낭만적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의 언어학 모델들은 (긍정적 의미로든 부정적 의미로든) 지극히 수학적이다. 

그에게는 적어도 지금과 같은 형태의 원리로는 인간의 두뇌를 능가하는 인공지능의 미래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물론 인공지능이 시를 쓸 수도 있고, 작곡을 할 수도 있으며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사고' 방식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추론하고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열차를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미국의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 ⓒ 연합뉴스


어린아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은 수많은 데이터를 모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분류, 정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적은 데이터를 가지고도 내재적 운영체계인 문법 능력을 활용해 지각적 세계를 추상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이 인간이 가진 언어 능력이다. 거대한 데이터를 빠르게 연산하는 기계가 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의 언어는 '지각적이고 연속적인' 세계를 문법이라는 추상적 틀을 통해 '구조화된 불연속적' 세계로 재현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을 개념화라고도 한다. 반면 인공지능은 이미 개념화된 무한의 자료들을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재분류해 인간이 필요로 하는 새 개념을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 

촘스키의 언어이론은 인간 언어 체계의 한 부분인 통사론을 중심에 두고 있는 이론이다. 음운체계와 문법 체계의 상호관계에서 설명되는 소쉬르 언어학에 비해 한쪽으로 기울어진 불균형 이론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럼에도 인공언어, 인공지능의 정체에 대한 그의 설명은 전적으로 적절하다.  

특히 기계학습의 요지는 '기술(記述)'과 '예측'이지만 인간 정신의 원리는 그 둘에 국한하지 않고 '설명'을 하는 데 핵심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들고 있는 사과를 놓을 때, 기계는 "사과가 떨어진다"고 기술한다. "손을 놓으면 사과가 떨어진다"고 예측도 한다. 하지만 '설명'이란 "그런 유형의 물건은 떨어진다"는 일반화와, '중력', '시공간의 휨(curvature of space-time)'이라는 원리까지 포함한다. 

촘스키는 뉴턴의 운동법칙을 사용하지 않고도 예측을 할 수 있는 기계를 대견하게 바라볼 수는 있지만, 과학이란 높은 개연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철학자 칼 포퍼의 말처럼 설명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물론 설명에는 오류의 가능성까지 포함하고 있다. 오류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기계를 필요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200년 전 인간은 자연적 물리 세계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이동과 운송 능력을 인공 기술을 통해 갖췄다. 그 200년의 문명은 이전 수천 년 문명의 축적을 능가하고도 남는 엄청난 결과였다. 그렇다고 기차가 인간의 다리를 대신하는 일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물론 최근 그리스 열차 사고처럼 그 가공할 힘은 인간의 작은 부주의 하나로 엄청난 비극을 만들기도 한다. 

이제 인간은 인간의 지능이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양질의 지적 작업을 인공 지능을 통해 할 수 있게 됐다. 그 결과가 만들 앞으로의 세계는 지난 200년이 만든 문명과는 비교가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뇌를 대신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의 부주의 또는 부도덕은 인공지능으로 인한 엄청난 비극을 만들 수도 있다. 그래도 열차를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인공지능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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