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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편집자말]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나 희한한 음식이 있나 싶다.

새벽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 달그락거리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엄마의 소리가 부엌으로부터 흘러들어왔다. 탁탁 당근과 오이를 썰고, 툭툭 맛살과 햄을 썰고, 계란 여러 개를 톡톡 깨서 거품기로 젓는 쇳소리가 났다.

치이익 거리는 지단 부치는 소리 다음, 한김 식히는 사이에 당근을 볶는 달달한 향이 풍겨왔다. 그 다음 맛살과 햄의 고소한 기름 냄새. 댕댕 울리는 알람 없이도 저절로 눈이 떠지던 소풍날 아침. 부스스 일어난 꼬마는 엄마의 김밥 공장을 놓칠세라 냉큼 이불 속을 벗어났다.

우리집 김밥 공장장
 
김밥 한 줄을 위해 이렇게나 손이 많이 가다니요.
▲ 김밥공장 김밥 한 줄을 위해 이렇게나 손이 많이 가다니요.
ⓒ 조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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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환히 밝힌 형광등 빛 아래로 식탁 가득 무지개색 김밥 재료가 펼쳐져 있었다. 중요한 의식이라도 준비하듯 엄마는 양 손에 비장하게 위생장갑을 꼈고, 그 맞은편에 자리잡고 앉아 공장이 돌아가는 장면을 숨죽이고 지켜봤다.

도마 위 김발에 네모난 김을 깔고,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하얀 밥을 조심스레 주걱으로 펼치는 모습. 길다란 속재료를 하나씩 밥 위에 쌓아 손가락을 둥글게 말고 아래위로 꾹꾹 누르고 나면 새까맣고 통통한 김밥이 완성됐다.

꼬다리는 제일 맛있는 거니까 날름 주워먹고, 실수로 김밥 옆구리가 터지면 칼로 설설 썰어 나눠먹고. 엄마의 까만 새벽과 맞바꾼 더 새까만 김밥. 끝없이 입으로 들어가는 고소하고 부드럽고 담백한 엄마 김밥.

하지만 그 음식은 몇 번이고 거듭 소풍에 따라올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꼬마의 키가 자란만큼 엄마의 하루는 더 바빠졌고, 내 도시락을 차지한 건 유부초밥이었다. 까만 동그라미가 노란 세모로 변하고, 캄캄했던 소풍날 새벽의 분주한 시간도 해가 얼굴을 내미는 아침으로 바뀌었다.

삼십 분이 채 안 돼 도시락을 뚝딱 완성할 수 있다며 미소짓는 엄마. '새벽부터 일일이 재료 준비해서 예쁘게 말아 썰면 뭐해? 하나로 다 때려넣고 먹는 거랑 뭐가 달라.' 이런 식으로 우리는 번거로운 김밥을 애써 깔아내리며, 간편한 유부초밥의 등장을 반겼다.

그때로부터 한참이 지난 얼마 전 한가한 주말, 하필 생각나는 음식은 하필 김밥이었다. 직접 만들어보겠다며 단무지나 맛살을 장바구니에 담으면서부터 당황스러움은 시작되었다.

2만 원은 훌쩍 넘기는 영수증, 게다가 김밥 싸는 건 왜 이렇게 거추장스러운지. 재료 준비에 이미 지쳐버린 마음을 다잡고 5줄쯤 말다보면 '김밥은 그냥 사먹자'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떻게 엄마는 새벽부터 일어나 이 많은 김밥을 혼자 다 말았던 걸까.

김밥은 좀 그랬다. 시간과 정성을 오롯이 쏟아야만 완성되는 고고한 음식. 근데 집 밖에서 만난 김밥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쉽고 빠르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음식이었다. 한 줄에 천 원씩 팔던 싸구려 김밥부터 휘황찬란한 재료로 무장한 프리미엄 김밥까지.

뭘 먹을지 떠오르지 않을 때 기본값처럼 안전하게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김밥이었다. 길쭉한 생김새처럼 길쭉한 스펙트럼을 지니며 '정성'과 '가성비'같은 정반대의 의미에 존재할 수 있는 김밥은, 도무지 그 속을 종잡을 수 없는 모순 덩어리였다. 같은 음식이 이렇게 다르게 느껴질 수 있나?

김에 말린 것은 엄마의 시간

간단히 사 먹는 쿠킹호일 속 김밥이 당연해질 때쯤, 나는 외국으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모두가 입을 모아 어떤 한국 음식이 제일 그리웠는지 물어왔다. "김밥." 고슬고슬한 밥에 재료를 푸짐하게 넣고 터지기 직전까지 꽉 말아 잠근 김밥.

한국에 돌아오면 김밥을 원없이 먹자고 다짐했었다. 왜 김치찌개, 삼겹살, 떡볶이가 아니라 하필 김밥일까? 왜 유부초밥이 아니라 김밥이었을까? 유부초밥은 조금 허전하다. 김밥은 무지개색 재료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 차이일 리는 없었다.

묵은지참치김밥을 우물거리며 김밥의 정체를 고민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교리김밥, 마약김밥, 충무김밥 등 전국의 내로라하는 김밥을 다 먹어봤어도, 맛있는 김밥의 기준은 '엄마의 김밥과 비슷한지 아닌지'라는 것.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특별한 건가. 샅샅이 찾다보니 드디어, 기억의 모서리 끝에서 발견해 냈다.

꼬마의 소풍 도시락에 들어 있던 김밥에는 엄마의 시간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는 것을. 어린 딸이 친구들과 즐겁고 건강하게 먹고 오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터지지 않을 만큼만 꼭꼭 눌러서.

그리고 그런 김밥을 바라보는 내 시선 자체가 모순이었다는 것도 덩달아 알았다. 애초에 내가 먹었던 음식은, 정성과 가성비의 중간 어딘가에 존재할 수조차 없는, 김밥의 형태를 가진 김밥이 아닌 것이었다.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나는 엄마의 따뜻한 시간을 먹고 자란 거구나. 어떠한 대가나 보상도 기대하지 않은 채 오롯이 나를 위해 만들어 준 따뜻한 김밥. 엄마의 까만 새벽 속 수고와 사랑이 듬뿍 들은 한 덩어리를 낼름 입 속에 넣어버렸을 뿐.

마치 명이나물과 전어처럼, 엄마의 김밥은 특별한 때에만 먹을 수 있는 제철 음식이었다. 지금 당장 엄마에게 만들어달라 부탁하더라도 그때의 맛과 같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다시 먹어볼 수 없어 아쉽다가도, 이미 나는 사랑을 듬뿍 받아 자라났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겠지. 내가 그 계절이 되었을 때 다른 이에게 맛있는 사랑을 꼭꼭 눌러 담아 주게 되면, 그때는 나도 같이 맛볼 수 있지 않을까. 그날이 올 때까지 당근과 계란만 넣고 대충 김으로 묶은 투박한 김밥을 먹어 보련다.
 
당근과 계란만으로도 그럭저럭 괜찮은 김밥
▲ 당근김밥 당근과 계란만으로도 그럭저럭 괜찮은 김밥
ⓒ 조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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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
태그:#음식의 기억, #엄마의 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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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문장들로 나를 설명하기 위해 여백의 시간을 즐기는 30대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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