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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편집자말]
처음 극장에서 본 영화는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안에 남아 있다고 한 시인은 말했다. 글쓰기 모임에서 그 말이 떠올라 처음 본 영화가 무언지 물어본 적이 있다.

조용하지만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하루님은 <인사이드 아웃>을, 캐릭터 상품을 좋아하고 아기자기한 면이 있는 수현님과 섬하님은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웹툰을 즐겨 보는 나무밑단풍님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꼽았다. 뭐지? 너무 그들 다운 선택이었다(모임에서는 이름대신 별명을 사용하고 있다).

시인의 말이 맞았다. 각자가 처음 선택했던 영화는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더라도 특정한 모습만은 변함없이 보여준다.

내가 처음 영화관에서 본 영화는 뭐더라…. 가족과 함께, 학교에서의 단체 관람을 제하고 자발적으로 선택한 영화관 구경은 중학교 3학년 때다. 이미 영화의 매력에 빠져 주말의 명화를 챙겨 보고 비디오 대여점을 뻔질 나게 들락거린 지 오래. 그날도 단짝 친구와 둘이서 영화 두 편을 본다고 강북과 강남을 오갔다.

그러니까 나의 첫 영화는 두 편, <파워 오브 원>과 <라스트 모히칸>. 그중 먼저 본 영화를 '첫 영화'로 꼽자면 <파워 오브 원>일 테고.
 
인터넷이 없던 시절, 감명 깊게 본 영화에 대해 신문에 난 광고와 사진을 오려 붙이고 감상을 기록했다. 팸플릿과 극장표를 모으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 영화 스크랩북 인터넷이 없던 시절, 감명 깊게 본 영화에 대해 신문에 난 광고와 사진을 오려 붙이고 감상을 기록했다. 팸플릿과 극장표를 모으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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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독립 이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고아로 자란 백인 소년 PK가 인종 차별의 현실을 깨닫고 운동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특히 배경으로 등장하는 아프리카의 대자연과 영혼이 깃든 듯한 흑인들의 합창이 압권이었다.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고자 하는 한 사람과 그를 성장시킨 인생 스승의 존재, 사회 변화를 위해서는 여러 사람이 하나의 힘으로 모여야 한다는 메시지 또한 강렬했다. 막연하게 나마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 불의에 맞서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꾸게 했으니까.

영화의 감동에 사로잡혀 당시 즐겨 듣던 영화 관련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까지 적어 보냈다. 내 엽서가 방송되던 순간, 카세트에 꽂혀 있던 아무 테이프에 망설임 없이 녹음해 버렸던 일도 잊을 수 없고.

영화관에서의 경험

대학생이 되어서는 예술 영화관을 찾아다녔다. 당시 충무로에서 을지로, 종로로 이어지는 거리에 영화관이 몰려 있었다. 그 중 종로 2가에 있던 코아아트홀에서는 예술 영화를 주로 상영했다.

거기서 모니터 요원으로 활동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거장 감독들의 이름만큼 길고 난해한 영화를 보았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희생'과 '노스텔지아',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안개속의 풍경'이나 '영원과 하루',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등.

종로의 코아아트홀과 대학로의 하이퍼텍 나다, 낙원 상가에 있던 시네마테크는 안식처처럼 찾아갔던 영화관이다. 현실은 무겁게 다가오는데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영화관으로 도망쳤다. 영화에는 성적이나 취업 같은 먹고사는 문제가 아닌, 그 너머의 가치와 감정, 변함없이 인간을 사로잡는 슬프고 아름다운 세계가 있었으니까.

영화관에 들어서면 여기 있으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질 수 있었고 낯선 세계로 빨려 들어가 색다른 삶을 살다 나올 수 있었다. 영화에 몰입해 주인공과 함께 웃고 울며 공감하고 나면 이상하게 위로받는 기분이 되었다.

현실에서는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영화의 세계만은 나를 이해해 주는 것 같아서. 영화 속 어떤 장면과 음악, 하나의 대사와 인물의 눈빛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조각을 발견하곤 했다. 그러면서 나를 알아갔고 세상을 배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화에 대한 강렬한 동경은 잔잔해졌고 애정 어린 취미 같은 게 되었지만 나라는 사람의 근원에 '영화'의 자리가 작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 매혹되고 말았던 영화를 나열해 보면 꿈꾸었던 세계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도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시간을 내어 영화관으로 간다. 책에서 보는 그림과 미술관에서 실물을 마주할 때의 감상이 비교할 수 없는 차이를 만드는 것처럼, 집에서 편안히 보는 영화와 영화관에서 온전히 몰입해 보는 영화는 깊이가 다른 흔적을 만든다.

블록버스터 오락 영화보다 독특한 시선과 미장센, 작가주의를 드러내는 영화를 두어 번씩 반복해 찾아보는 탓에 내가 주로 가는 영화관은 대체로 한산하다. 나도 나지만 주말 낮 시간에 홀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두 시간여 영화의 세계를 떠돌고 극장을 나설 때면 그들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서로 얼굴도 제대로 모르지만 같은 공간에서 숨을 나누고 엇비슷한 감정을 공유했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영화관의 경험은 건너감이다. 나와 스크린 사이의 건너감, 영화 속 모르는 타인의 삶으로, 그리고 같이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로 건너 가려는 잠깐의 시도다.

영화만이 가능한 일

최근 시네마테크에서 <토리와 로키타>라는 다르덴 형제 감독의 신작을 보았다. 불법 이주 청소년의 삶이 어떤 위험에 내몰리는지 감독 특유의 다큐멘터리적 시선으로 포착한 영화다. 피부색도 다르고 처한 환경도 다르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로키타'가 되어 어린 '토리'를 걱정하며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러느라 내내 가슴이 아팠다.

마침 전주 영화제 참가를 위해 방한한 두 감독이 영화 상영 후 무대로 나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두운 극장에 들어섭니다. 혼자 볼 수도 있고요. 여러분이 볼 수도 있고요. 관객 수가 많든 적든 이 어두운 공간에서 큰 스크린에 펼쳐지는 풍경을 보고 인물을 보면 단숨에 그 안에 빠져들게 되죠. (…) 극장에서 보는 영화야말로 나를 잠시 내려두고 타인이 되어 보는, 타인이 될 수 있는 그런 기막힌 매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한 역할은 오로지 극장에서 보는 영화만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뤽 다르덴 

내가 영화관을 찾고 그 경험에 빠져 들었던 이유가 그의 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타인의 삶 속으로 훌쩍 건너가는 일, 그러면서 타인이 되어보는 경험에 사로잡히곤 했으니까. 

모르는 세계를 궁금해 하고 자연과 음악에 감응하길 즐기는 성향은 첫 영화의 취향을 반영하는지도 모르겠다. 백인인 PK가 흑인과 공감하며 인종 차별 철폐 운동에 앞장서는 내용의 영화, 드넓은 아프리카의 자연 경관과 굵고 짙은 음색의 노래로 나를 사로잡았던 <파워 오브 원>의 흔적이 지금도 내 안에 남아 있는지도.  

당분간 누군가를 만나면 어김없이 이 질문을 던질 것 같다. 당신의 첫 영화는 무엇인가요? 첫 영화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당신의 어딘가에 남아 여전히 당신을 그려내고 있을지 모르겠다고.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
태그:#나의취미, #영화감상, #첫영화, #영화관이하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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