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07 09:34최종 업데이트 23.06.07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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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면직시킨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 ⓒ 연합뉴스

 
권력이 언론 앞에서 자신을 포장하려 하기보다는 거친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험 신호다. 의례적인 가식을 떠는 것조차 귀찮아졌다는 것이니, 본색을 드러낼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이 된다. 적신호를 켜는 것은 물론이고 비상 사이렌까지 울려서라도 민주주의의 위기가 왔음을 소리 높여 외칠 때가 된 것이다.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을 면직시킨 일은 윤석열 정권의 언론 탄압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MBC·KBS·YTN·TBS 등에 대한 그간의 압박 혹은 탄압도 적지 않은 과오였지만, 임기 만료가 임박한 방통위원장을 합당한 근거도 없이 내쫓은 것은 자신들의 거친 속성을 더 이상 숨길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윤 정권의 자세를 보여준다.


방통위는 방송·통신 인허가 업무나 정책 수립뿐만 아니라 언론사 인사에도 영향을 미친다. 방통위법 제12조는 심의·의결 사항으로 "한국방송공사의 이사 추천 및 감사 임명"(제2호), "방송문화진흥회의 이사 및 감사 임명"(제3호), "한국교육방송공사의 사장·이사 및 감사의 임명"(제4호) 등을 열거한다.

방통위는 KBS 인사권에도 개입하고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의 인사권에도 관여한다. 무리한 방식으로 방통위 장악을 시도하는 모습은 윤 정권이 준비하는 다음 카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되기 전인 2021년 10월 19일 부산 해운대구에서 "전 전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 잘했다는 분들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가 '정치는 잘했다'고 평한 전두환도 1980년 봄에 언론을 상대로 거친 속성을 드러냈다. 이때의 전두환도 언론인 숙청 카드를 꺼내들었다.

언론인 대숙청
 

1979년 11월 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발표하는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 연합뉴스

 

1979년 12·12 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이 행정부까지 장악한 것은 이듬해 5월 31일이다. 5·17 쿠데타와 5·18 광주 학살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직후인 5월 말에 비상정부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함으로써 행정부의 실질적 장악에 성공했다.

언론 통폐합은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뒤인 그해 11월에 있었다. 언론인 숙청은 이보다 6개월 전의 일이다. 행정부를 장악하고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부터 언론인들을 실업자나 죄수로 만들 묘책을 강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1차 정변인 12·12쿠데타에 성공한 뒤에도 행정부를 장악하지 못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행정부에 한 발을 걸쳐둘 목적으로 1980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했다.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부장 직을 얻어내지 않고 부장 서리 직을 받아낸 이유는 "부장·차장 및 기획조정관은 일체 타직을 겸할 수 없다"라는 당시의 중앙정보부법 제7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앙정보부장이 되면 보안사령관 직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서리 꼬리표를 감수했던 것이다. 전두환은 그해 8월 대통령 선거 때도 보안사령관 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해 봄에 전두환의 권력은 그가 계엄사령관도 아니고 정식 각료도 아니라서 이런저런 제약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런 제약을 마냥 참고 있지 않으리라는 예측을 가능케 하는 조짐 중 하나는 언론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언론에 대한 비상식적 태도는 그가 커다란 음모를 꿈꾸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2010년 9월 28일 한국기자협회 홈페이지에 실린 '기자와 필화 (9): 1980년 5월 한국기자협회 사건'에 정리된 당시 상황을 종합하면, 그해 상반기의 전두환은 언론사 사장이나 마찬가지였다. "4월에 접어들면서 신군부가 신문을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엄격한 규제와 주문들이 언론에 족쇄를 채우기 시작했다"라고 이 글은 말한다.

대통령 퇴임 후의 전두환은 자신이 계엄사령관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5·18 학살과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이런 모습은 중정부장 서리에 취임한 1980년 4월에도 있었다. 그달 30일 자 <경향신문> '전두환 중정부장 서리 일문일답'에 따르면 "언론사에 대한 보도 검열을 조속한 시일 안에 철폐할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 문제는 계엄사 보도처 소관이며 본인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그는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본인은 원래 언론 자유의 신봉자"라고 말한 뒤, 자신과 무관하다고 밝힌 계엄사의 언론 관계 업무를 노골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보도 검열은 계엄법상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조치"라며 언론사들이 보도 검열에 협조할 것을 주문했다. '검열 문제는 계엄사에 물어보라'면서도 자신이 실권자임을 굳이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인터뷰에서 전두환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신념과 용기 있는 필봉만이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다"라며 언론인들의 소신을 촉구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겁을 줬다. "언론 자유의 고유 기능인 비판과 견제라는 것도 견제해야 할 튼튼한 국가라는 것이 만들어진 다음이라야 비로소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신념과 용기"를 지금 말고 나중에 발휘해달라는 전두환의 주문을 그해 봄의 언론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두환이 무섭게 나오는 만큼 언론인들도 무서운 결의를 보였다. 전두환이 퇴임한 해에 발행된 1988년 10월 29일 자 <한겨레> '80년 기자 대학살 그 진행 과정을 파헤친다'에서 한국기자협회를 중심으로 하는 당시 언론인들의 저항을 확인할 수 있다.

전두환의 두 번째 쿠데타 전날인 1980년 5월 16일에 언론인들은 정면 항전을 결의했다. 위 기사는 "5월 20일(화요일) 0시를 기해 검열을 거부하고, 당국이 강압적으로 나올 경우 제작 거부에 돌입"한다는 한국기자협회의 5월 16일 결의를 소개한다. 5·17 쿠데타 및 5·18 학살을 예측하기 힘들었던 5월 16일에 '5월 20일 0시를 기한 전면적 검열 거부'를 선언했던 것이다.

전두환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신념"을 용납하지 않았다. 위 기사는 부회장을 비롯한 기자협회 간부 6명이 17일에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됐다고 말한다. 7년 뒤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끌려갈 그곳에 언론인들이 끌려갔던 것이다. 회장을 포함한 또 다른 간부 2명은 그 뒤 추가로 붙들렸다.

언론인 숙청은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이것은 그해 7월에 본격화될 대숙청의 서막이었다. 위 기사는 "7백 17명의 기자들을 무더기로 생매장한 언론 대학살극의 시나리오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7월과 8월에 717명이나 숙청됐으니, 그해 11월의 언론통폐합보다 훨씬 무서운 일이 이때 벌어졌던 것이다.

전두환이 언론에 대해 얼마나 거칠었는지는 광주 학살 5일차인 5월 22일에 주요 언론사 사장들을 호출해 호통을 친 일에서도 나타난다. 위 기사는 전두환이 "특유의 험악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협박했다고 기술한다.
 
그동안 언론과 대학의 내막은 물론, 누가 선동하고 있는지도 샅샅이 알고 있다. 경영권자가 권한 행사를 잘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이들을 선동한 사람들을 파악해서 체포할 것이다. 그러한 사태가 없도록 사장들이 수습하고 책임을 지길 바란다.
 
전두환은 말 안 듣는 기자들의 사표를 받아낼 것을 언론사들에 요구했다. 이에 따라 국보위 지시하에 경영진이 사표를 거둬들이는 일이 각 언론사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일례로 "D방송 보도국은 칠판에다 '8월 5일까지 사표 제출'을 공시했으며, 이와 함께 '일신상의 사정으로 사직서를 제출합니다'라는 사표 양식까지도 친절히 알려주었다"라고 위 기사는 설명한다.

그해 여름에 언론인 717명을 숙청한 전두환은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을 사임시킨 뒤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돼 9월 1일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런 다음, 10월 22일 국민투표로 헌법을 바꾸고 27일 제5공화국을 열었다.

윤석열 정권의 언론 탄압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하나의 공화국만 존속되는 게 원칙이므로, 제1공화국이니 제2공화국이니 하는 용어는 개념상 부적절하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호가 그대로 유지된다 해도 공화국의 핵심 특징인 정부 구성 방식이 크게 바뀌게 되면, 이전과 똑같은 대한민국이라고 말하기 곤란한 상황이 발생한다. 그래서 2공화국이니 제5공화국이니 하는 표현들이 관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두환은 5·17 쿠데타 및 5·18 학살보다도 먼저 개시된 언론 탄압과 뒤이은 언론인 대숙청을 통해 반대 목소리를 철저히 차단했다. 그런 뒤, 자신과 이순자의 새로운 공화국을 열었다. 그의 언론 탄압은 그런 큰 그림을 향한 발걸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비전'이 없었다면 그처럼 무모하게 언론인 숙청을 벌이지 못했을 것이다. 전두환이 벌인 일은, 언론 앞에서 자신을 포장하는 단계를 넘어서 거친 속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집단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윤석열 정권의 언론 탄압은 아직은 1980년 당시의 규모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크게 다를 바 없다. 언론을 견제하고 억압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언론인 숙청에 착수할 조짐이 가시화되고 있다.

지금까지 나온 상황들만 봐도 "신군부가 신문을 만들었다"가 아니라 '윤석열이 신문을 만들려 한다'라고 평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언론인 숙청은 아무나 생각할 수 없는 것이므로, 윤석열 대통령이 생각하는 '큰 그림'이 무엇인지 주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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