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26 13:08최종 업데이트 23.06.26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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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과 정부는 지난 23일 국회 원내대책회의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킬러 문항을 '핀셋 제거'하고, 유아 사교육비 절감을 위해 만 3∼5세 교육과정 개정도 추진하기로 했다. ⓒ 연합뉴스

 
10여 년간 사교육에 몸담았다. 마지막에는 소위 사교육 1번지라 불리는 동네에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수능 발언과 정부·여당이 '사교육 경감 방안'이랍시고 내놓는 안들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정말 그 대안들이 '사교육 경감 방안'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바보이거나 사기꾼 중 하나다.

당정이 대책을 내놓는 순간 어떻게 하면 학부모들을 겁박할 수 있을지 머릿속에 시나리오가 단박에 그려졌다. 전직 업자(?)인 나도 그러한데 어느 곳보다 명민한 사교육계가 그 대책을 내놓지 못할 리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킬러문항 삭제'를 내걸자 대치동 등지에서는 벌써 '준킬러문항 대비' 강연을 내놓았다.


사교육계는 "비 오면 우산이라 팔고 날이 개면 양산이라며 파는 곳(김민하 시사평론가)"이다. 되레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발언은 수능이 바뀔 수 있다는 시그널을 줌으로써 학부모들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옆에서 달리고 있으면 나도 일어나서 걷기라도 해야 한다. 사교육은 그런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차라리 사교육을 부추긴 것에 가깝다. 시작부터 꼬였고, 후속 대책이라고 내놓는 것들을 보아하니 더 꼬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시 강화' 부추기던 이들이, '킬러문항 삭제' 들고 왔다
 

이주호 사회부총리와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이 1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학교 교육 경쟁력 제고 및 사교육 경감 관련 당정협의회에 참석하고 있다. ⓒ 유성호

 
사전 설명을 해야겠다. 대통령이 콕 집어 이야기한 '비문학'을 가르친 국어 강사였기에 좀 더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겠다.

대통령이 없어져야 한다고 얘기한 '킬러문항'이란 무엇인가. 정체를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대통령 말을 빌자면 "공교육 교과과정에서 아예 다루지 않는 비문학 국어 문제" 같은 걸 말한다.

우선 비문학은 공교육 교과과정에서 버젓이 다루고 있다. 고2 국어 교과에는 '독서'가 편성되어 있고, 대부분의 고2 학생들은 학교에서 비문학을 학습한다. 고1 국어에서도 모든 교과서는 일정한 비문학 지문을 다루고 있다. 

아마 대통령은 공교육 과정에서 다루지 않은 '소재'를 썼다는 사실을 언급한 듯하다. 내가 당장 수업했던 비문학 지문들의 주제만 해도 '신채호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개념', '환율의 오버슈팅', '브레턴우즈 체제', '양자역학', '바로크 음악의 특징' 등 인문·사회·과학·기술·예술을 넘나든다. 이런 것들은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 비문학에서 다룰 수 있는 모든 소재를 교과서를 통해 대비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소재를 가지고 문제를 낼 수 있는 게 애초에 비문학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비문학은 본래 선행지식 없이 문제를 푸는 것이다. 모르는 내용이 나와도 글의 논리를 추론하여 답을 찾아내라는 것이 비문학에서 요구하는 '비판적 독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은행 직원보다 경제를 잘 알고 과학 선생님들보다 과학을 잘 알아서 '오버슈팅(overshooting)'이나 '양자역학' 지문을 읽고 수업했을 리 없다. 낯선 내용의 글이어도 정보를 파악하는 '독해'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 능력을 학생들에게 배양하고자 비문학이 있는 것이고, 그렇기에 오히려 '모르는 내용'의 소재가 나와야 독해 능력 자체를 시험해 보기 더 용이하다. 만약 교과서에서 다룬 소재만을 가지고 문제를 내게 된다면 수능은 '비판적 독해 능력' 시험이 아니라 그냥 교과서 암기용 시험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물론 현행 수능엔 문제가 많다. 특히 수능 '인플레'가 너무 심해졌다. 영어가 절대평가로 빠지고 탐구 영역은 만점 싸움이 되면서, 사실상 변별력을 확보할 수 있는 과목이 국어, 수학만 남았다. 수학 난도를 더 올리기엔 문제가 많으니 국어 난도가 아득히 올라갔다. 소위 '불수능'을 넘어 '마그마 수능'이라 불렸던 2019년 수능 국어 만점자의 표준점수는 150점이었다. 수능이 만들어진 이래로 학생들의 국어 점수가 가장 낮았던 시험이었다.

이를 부추긴 건 다름 아닌 '정시 강화' 정책이었다. 입시에서 수능의 영향력을 높일수록 변별력 확보를 위해 시험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킬러문항' 출제는 필수 불가결하다. 그러나 나는 똑똑히 기억하는데, 정시 강화를 추진한 건 문재인 정부였지만 조국 사태 이후 '입시 불공정' 논란이 일어나면서 정시 강화, 심지어 수능 100%로 입시를 바꿔야 한다고 독촉한 건 바로 현 정부·여당의 정치인들이었다.

모두 예견된 것이다. 내가 사교육에 종사했던 바로 그 시점에 정확히 학생들에게 주문했던 것이 바로 '킬러문항 대비'였다. 학교 내신 공부에 매진했던 학생들이 수능 대비 학원으로 쏠리게 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정시 강화를 외쳤던 자들은 이리될 줄 몰랐단 말인가. 그때는 여론에 조응해 '정시 강화', '공정 수능' 따위를 목 놓아 부르짖던 자들이 이제 와서 '킬러문항 삭제', '이권 카르텔'을 운운하고 있으니, 나로선 '바보이거나 사기꾼, 둘 중에 하나'라고밖에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사기꾼'이라는 것에 조금 더 무게를 싣고 있는 중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뜨거운 아이스티'
 

22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 학원에 수능 시험과 관련된 광고 문구가 쓰여져 있다. 정부는 '공교육 제고 방안'을 발표하고 최근 논란이 된 수능 킬러문항 등과 관련해 이날부터 2주간 학원 과대·과장 광고 집중 신고 기간을 운영한다 ⓒ 연합뉴스

  
수능 상대평가가 유지되는 한 이런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수능이 어려우면 최상위권 변별력은 확보되더라도 중위권은 박살 난다. 그렇다고 킬러문항을 죄다 없애서 '학교 수업만 따라가면 다 맞을 수 있는' 시험이 되면, 이제 수능은 '만점 대비 경쟁'으로 빠지게 된다. 만점을 안 받으면 등급 확보가 안 된다는 불안감과 공포, 이 또한 사교육을 먹여 살리는 양분이다. 이제 킬러문항 대신 준킬러문항을 12시간씩 붙들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대통령과 총리가 말하는 것과는 달리 애초에 킬러문항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수능 상대평가 체제'이자 '무분별한 경쟁 교육'이다. 수능 상대평가가 존속되는 한 수능은 공정할 수 없다. 한 두 문제로 등급이 갈리고 대학이 갈리는 한, 킬러문항을 내서라도 변별력 확보가 되어야 한다. 정시 확대와 킬러문항 삭제를 함께 말하는 것은 '뜨거운 아이스티'를 달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지금 이 모든 논의는 결국 전체 학생들의 20%에 불과한 1~3등급 학생들에게만 국한한 것이다. 중위권 학생들에게 '킬러문항'의 유무는 교육에 있어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다. 상위권 학생들의 입시 문제가 '사교육 경감 대책'과 '공교육 제고 방안'이랍시고 나오는 것도 화나는 일인데, 거기에 보태 당정은 '자사고·외국어고·국제고 존치'를 대안이라고 내놓았다.

이건 고등학교 때 있을 줄세우기를 그냥 초·중등부터 하자는 이야기이다. 명품 매장 많이 지어서 빈부격차 해소하자는 말과 다름없다. '고입 대비'를 위해 사교육비는 더욱 폭증할 것이다. 불을 끄겠다며 기름을 붓겠다는 얘기를 하는 당정을 보며 이제 분노가 치솟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권 카르텔 때려잡기?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임명장 수여식에 입장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 사회의 교육 문제는 복잡다단하다. 한 가지 대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법 따윈 없다. 특히 사교육은 경쟁 체제의 결과물이다. 교육 자본이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불평등을 결정한다면, 결코 없어질 수 없다. 우리 교육은 불평등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경쟁 강화'라는 이름으로 불평등을 더욱 키워서는 안 된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문제를 윤석열 대통령은 너무나 납작하게 다루고 있다. '이권 카르텔'을 때려잡겠다는 식이다. 그가 말하는 '이권 카르텔'의 정체도 모르겠거니와 그걸 때려잡는다고 해서 지극한 사교육 문제가 해결될 리도 만무하다.

이런 말이 낯설지 않다. 검사 출신 윤석열 대통령의 스타일로 보인다. 노동조합을 '건폭'으로 몰고, 야당과 시민사회 세력을 '괴담, 가짜뉴스 유포 세력'으로 취급했다. 세상 복잡한 문제를 '특정 집단'에게만 책임을 묻고 혐오를 부추겨 그것을 때려잡는 자신을 '정의의 사도'로 내세우는 것이다. 트럼프가 그랬고, 더 예전엔 나치가 그랬다. 21세기형 극우 포퓰리즘이다.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커질수록 진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런 허상 같은 논의들이 오가는 동안 기득권들은 오늘도 웃고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가 되려면 반대 세력만 때려잡을 게 아니라 민주적 질서 그 자체를 우리 사회에 확립해야 하듯이, 공교육이 바로 서려면 사교육만 때려잡을 게 아니라 사교육을 배태하는 무분별한 경쟁 교육, 그 자체를 해결해야 한다. 자랑할 게 못 되는 내 사교육 종사 경험을 내세워 이리 길게 떠든 것은, 나는 진심으로 과열된 사교육이 진정되길 바라고 경쟁에 내몰린 학생들이 불행한 시절로 청소년기를 회고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정은 거꾸로 가고 있고, 언제나 그랬듯 사교육은 답을 내놓고 있다. 언뜻 대통령의 발언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군의 사교육 업자들은 사실 수험생과 학부모들에게 시그널을 보내는 것이다. 당정은 불안감을 조성했고, 사교육은 그 불안감을 공포로 마케팅하고 있다. 의도치 않았을지언정 현재 당정과 사교육계는 한몸이다.

이제 입시제도만이 아니라 무분별한 경쟁 교육의 무용함을 이야기해야 한다. 수능 등급과 대학이 평생의 신분이 되어버리는 불평등과 맞서 싸워야 한다. 수능 1~2점 차이로 머리 뜯고 싸우는 이 지긋지긋한 경쟁 교육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없다. 그러나 당정과 사교육계는 이것을 얘기하지 않는다.

이제 최상위권 선발을 위한 제도를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다수를 위한 '보편적 평등 교육'을 소리높여 외치는 정치가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이재랑씨는 정의당 대변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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