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04 20:43최종 업데이트 23.08.04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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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베스트말레 트라피스트 수도원 (지난 7월 2일 방문) ⓒ 윤한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출발한 버스가 벨기에 국경을 넘자, 신기하게도 지평선에 걸려있던 구름이 나무 뒤로 숨기 시작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같던 낮은 구릉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가장 눈에 띄었던 건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와 달리 가톨릭 국가 벨기에는 마을마다 작은 성당의 첨탑을 품고 있다는 점이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 맥주 기행의 첫 목적지는 베스트말레(Westmalle)였다. 트라피스트는 베네딕트 규율을 엄격하게 따르는 시토회의 분파로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가르침을 지키는 봉쇄 수도회다.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은 세상과 차단된 채 기도와 명상 그리고 수도원 운영을 위한 노동으로 하루를 보낸다. 맥주는 트라피스트 수도회가 만드는 것 중 가장 유명세를 치르는 상품이다. 


전 세계 맥주 중 트라피스트 맥주가 진짜 수도원 맥주로 인정받는 이유는 엄격한 기준 때문이다. 국제 트라피스트 협회(International Trappist Association)는 수도원 내에서, 수도사의 관리 감독하에, 과도한 수익을 보지 않는 맥주를 진정한 트라피스트 상품(Authentic Trappist Product)으로 인정하고 ATP 인증마크를 붙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전 세계 맥주 중, 고작 10개 맥주만 ATP 라벨이 허락된다. 그중 5개가 벨기에에 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이 5개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방문하여 맥주가 품고 있는 문화를 체험하고 통찰과 의미를 얻기 위함이었다. 베스트말레 수도원을 첫 번째 목적지로 정한 이유는 다름 아닌,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에서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다. 

말레의 서쪽, 베스트말레

베스트말레(Westmalle)는 말레(malle)의 서쪽이란 뜻이다. 네덜란드어 발음으로 '말러'가 더 가깝지만 한국에서는 편의상 '말레'로 부르고 있다. 안트베르펜주에 속해 있는 말레는 주도 안트베르펜에서 동쪽으로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다. 인구 1만 5000여 명 정도가 있는 이 작은 도시에서 베스트말레 수도원(Westmalle abbey)은 가장 유명한 장소다. 물론 그 배경에는 맥주가 존재한다. 

베스트말레 수도원은 1794년 프랑스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이 정착하며 시작됐다. 이들이 자급자족을 위해 일군 농장의 이름은 '누이트러스트(Nooitrust)', 번역하면 '절대 쉬지 마라'였다. 채식을 하는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에게 허락된 액체는 물, 우유, 맥주, 3가지였다. 수도사들은 농장에서 키운 소에서 얻은 우유로 치즈를 만들었고 지역 곡물과 효모로 맥주를 양조했다. 

수도원 양조장이 설립된 시기는 벨기에 독립 6주년이 되던 1836년이었다. 초기에는 수도사들만을 위한 맥주를 소량 생산했다. 그러나 수도원 운영 수익을 목적으로 1865년부터 지역 사람들에게 맥주를 판매했다. 맛과 품질이 뛰어나 인기가 높았지만 성장이라는 자본주의적 목표가 없었기에 생산량은 더디게 올라갔다. 

베스트말레 트라피스트 맥주가 큰 주목을 받게 된 건, 두벨(Dubbel)과 트리펠(Tripel)이라는 스타일이 나오면서부터다. 1926년 출시한 두벨은 6~7% 알코올과 우아한 고동색을 가진 벨기에 에일을 말한다. 원래 수도사들이 마시던 브라운 에일이었으나 양조사 헨릭 버린덴이 합류해 맛과 품질을 업그레이드하면서 두벨이라는 스타일로 다시 태어났다. 맥아에서 나오는 섬세한 감초 향과 효모에서 비롯된 수지 향 그리고 부드러운 마우스필이 매력이다. 

1934년 탄생한 트리펠은 9~10% 알코올과 밝은 황금색을 가진 벨기에 에일이다. 효모가 뿜어내는 녹진한 배와 수지 향이 훌륭한 밸런스를 이루는 맥주로, 트리펠 또한 헨릭 버린덴의 영향을 받았다. 베스트말레 수도사는 같은 효모로 맥아의 배합에 따라 다른 얼굴을 가진 맥주를 창조했고 원칙을 고수하며 품질을 지켜냈다. 20세기 중반 두벨과 트리펠은 세계적인 맥주로 성장했고 벨기에 맥주를 대표하는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베스트말레 수도원으로 향하는 이유도 응당 이 두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였다.  

베스트말레 마을로 들어서자 아담한 집들이 보였다. 네덜란드와 가까운 이 지역은 벽돌로 지은 집들이 많았다. 돌이 귀한 네덜란드는 벽돌 문화가 발달했는데, 벨기에 북쪽 플랑드르 지역도 그 영향을 이어받았다. 집들의 크기는 작았지만 정돈됐고 고급스러웠다. 

수도원으로 향할수록 길은 좁아졌고 푸른색 들판은 가까워졌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입구를 잘못 찾은 듯 잠시 멈칫하더니 붉은색 벽돌로 된 낮은 담장 옆에 정차했다. 순간 베스트말레 로고가 인쇄된 자주색 맥주 박스들이 눈앞에 나타났고 그 뒤로 양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반 양조장이라면 하지 않았을, 뾰족한 지붕과 붉은색 벽돌로 치장한 베스트말레 수도원 양조장이었다. 

붉은색 수도원, 푸른 나무, 향기로운 길
 

카페 트라피스텐으로 향하는 오솔길 ⓒ 윤한샘


양조장 주위는 고요했다. 귓등을 간질이는 바람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당연히 양조장은 들어갈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도 잠시, 수도원 입구를 향해 발길을 돌리자 숨이 멎을 듯한 풍광이 펼쳐졌다. 고풍스러운 얼굴의 수도원은 푸른색 지붕과 붉은색 담장을 입고 있었다. 낮은 담장을 끼고 작은 시내가 흐르고 있었고 맞은편 들판에는 한 무리의 소 떼가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방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졸고 있었다. 그 뒤로는 아름드리나무들을 품은 오솔길이 푸르름을 머금고 있었다.

빨리 맥주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초록빛 나무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조금 더 즐겨도 된다고 다독이고 있었다.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는 마치 우리를 환영하는 박수 소리 같았다. 환하게 웃으며 잘 왔다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오솔길로 들어서자 바람을 타고 상쾌하고 청량한 향기가 느껴졌다. 허브, 풀, 야생화, 향신료. 순간 이 향기들이 나에게는 베스트말레 수도원의 기억으로 남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쌓였던 여독은 바람과 향기로 모두 사라졌다. 걷는 중에 간간이 자전거를 타는 현지인들과 마주쳤다. 평상시 쉽게 볼 수 없는 동양인이 낯선 듯했지만 싱긋 미소로 인사를 나눴다.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힐링이었다.

베스트말레 수도원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는 직영 레스토랑, 카페 트라피스텐으로 가야 한다. 대각선 들판 방향으로 레스토랑 건물이 보였다. 오솔길의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왼쪽으로 300m 정도에 카페 트라피스텐이 있다는 표지판이 있었다.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며 보도블록 길을 벗어나니 건너편에 레스토랑 건물이 보였다. 입구에 서 있는 깃발에는 '카페 트라피스텐 1923년'이라는 문구가 펄럭이고 있었다. 올해가 2023년이니 생긴 지 100년이나 된 것이다. 인적이 드문 이곳에, 수도원 직영 레스토랑이 100년이 됐다니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것일까?

100년 된 수도원 레스토랑, 카페 트라피스텐  
 

100년 된 카페 트라피스텐 ⓒ 윤한샘

 
1841년 베스트말레 수도원의 소유가 된 이 건물의 용도는 원래 식료품점이었다. 1923년 레스토랑으로 바뀌었을 때, 임대료는 겨우 거름 2대와 스피릿의 한 종류인 제네버 1병이었다고 한다. 

고풍스러운 모습일 거라는 상상과는 달리 카페 트라피스텐의 외관은 꽤 모던했다. 창에는 '100 years'라는 문구와 풍선이 붙어 있었다. 불과 며칠 전에 기념행사를 한 듯했다. 입구에는 자전거 거치대와 버스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주차장이 있었다. 아이들을 위한 작은 놀이터도 보였다. 상당히 많은 방문객이 오는 모양이었다.   

내부는 외관보다 훨씬 더 현대적이고 깔끔했다. 2008년에 리모델링한 결과다. 평일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내 시선도 자연스럽게 맥주 메뉴를 향했다. 

베스트말레 트라피스트 맥주는 총 3개였지만 마실 수 있는 종류는 4개였다. 두벨, 트리펠, 엑스트라 그리고 두벨과 트리펠을 반반 섞은 '하프 앤 하프'가 있었다. 수도원 직영 레스토랑에 왔으니 당연히 모든 맥주를 마셔봐야 한다. 다행히 메뉴에는 170ml 용량이 있어 간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베스트말레 트리펠 ⓒ 윤한샘

 

베스트말레 두벨 ⓒ 윤한샘

 
베스트말레 엑스트라는 4.8% 알코올과 황금색을 띠는 블론드 에일로, 원래 수도사들이 평소에 마시던 테이블 맥주였다. 맥주 스타일로는 보통 싱글로 불린다. 예전에는 수도원에 방문해야만 마실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한국으로도 수입되고 있다. 

엑스트라는 밝은 황금색과 옅은 수지 향을 가지고 있었다. 마시기 편해 음식이 나오기 전 가볍게 즐길 수 있었다. 요리는 플랑드르 스타일의 소고기 스튜를 주문했다. 어두운 색 두벨과 함께 페어링해 볼 요량이었다. 벨기에 요리는 항상 감자튀김이 곁들여 나오는데, 그 이유를 물어보니 우리나라의 밥 같은 개념이라고 했다. 나는 외국에서 김치를 찾는 사람은 아니지만 소고기 스튜에는 쌀밥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두벨은 생각보다 밝고 투명했다. 병으로 서빙되는 두벨은 불투명한 데 반해 생맥주는 그렇지 않았다. 섬세한 캐러멜과 옅은 수지 향은 7% 알코올과 함께 부드럽게 입안을 물들였다. 소고기 스튜는 최고의 파트너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스튜 소스에 두벨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색깔이 짙은 고기를 요리할 때, 어두운 맥주를 넣으면 잡내를 잡아주고 풍미를 올려준다. 동일 양조장 맥주를 사용한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다. 
 

베스트말레 수도사가 만든 치즈 ⓒ 윤한샘

 
트리펠을 마시기 위해서는 베스트말레 수도사들이 만든 치즈가 필요했다. 수도원 치즈와 맥주의 궁합은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만 할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이다. 9.5% 알코올은 치즈의 느끼함을 깔끔하게 잡아줬고 얼굴을 살짝 내민 배와 수지 향은 치즈의 풍미와 기깔나게 어울렸다. 하루 종일 맥주와 치즈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대미를 장식할 '하프 앤 하프'를 주문했다. 

유럽에서 서로 다른 맥주를 섞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독일, 벨기에, 체코 등 여러 국가에서 볼 수 있으며 소다 같은 음료수와도 혼합한다. 두벨과 트리펠을 반씩 섞은 '하프 앤 하프'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멋진 밸런스를 보여줬다. 밝은 앰버 색 속에 견과류, 캐러멜 향이 흐드러졌다. 이보다 더 맛있는 맥주 디저트는 없으리라.

지역성과 진정성, 100년 가게의 열쇠
 

카페 트라피스텐 내부 ⓒ 윤한샘

 
맥주를 마시며 이 한적한 곳에 과연 사람들이 올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정오가 되면서 내 의구심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넓은 공간을 차지하던 테이블은 만석이 됐고 사람들의 소리로 실내는 시끌벅적했다. 인구가 1만 5000여 명에 불과하고 찾기가 수월치 않은 이곳에 왜 이 많은 사람들이 오는 것일까?

지역문화, 이 단어가 먼저 떠올랐다. 베스트말레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지역문화를 대표하는 곳이었다. 외지인에게는 거룩한 봉쇄 수도원이었지만 지역 사람들에게는 수도사들과 소통하며 자신들만의 문화를 100여 년 넘게 이어온 공간이었다. 수도원에서 양조하는 맥주도 단순한 술을 넘어 지역 정신과 의미를 품고 있는 문화였다.

진정성도 빼놓을 수 없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성장을 추구하지 않는다. 수익은 수도원 운영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사용된다. 맥주, 치즈, 음식 가격이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이유다. 지역사람들은 양조장과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느낀다. 카페 트라피스텐 종업원들은 프로페셔널했고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있었다.   

문을 나서며 할머니와 손을 잡고 들어오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100년의 역사가 녹아있는 레스토랑에서 할머니와 손주들이 쌓을 추억은 어떤 가치도 초월한다. 지역 문화와 경제를 움직이는 힘, 신비롭기만 하던 트라피스트 맥주는 실체를 갖고 있는 문화 그 자체였다. 이역만리 떨어진 대한민국에서 이 작은 동네까지 방문하게 하는 힘도 있으니, 이건 신의 뜻일까, 맥주의 뜻일까. 신성을 거스를 수 없으니, 맥주 신의 힘으로 하자. Ora et bibere(기도하고 마셔라).
 

할머니의 손을 잡고 카페 트라피스텐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 윤한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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