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27 14:39최종 업데이트 23.10.27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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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 바뀐 스당 성 ⓒ 윤한샘

 
피곤한 아침이었지만 눈이 번쩍 떠졌다. 몸은 이불 속에 있으라고 꼬드겼지만 머리는 나가야 한다고 재촉하고 있었다. 지금(7월 5일) 내가 누워있는 곳은 프랑스 영토에 있는 스당 성(Chateau de Sedan)이다. 스당은 벨기에 국경과 불과 1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다. 약 150년 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바로 이 자리에서 프로이센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짧은 시간이나마 나는 보불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는 스당을 둘러보고 싶었다. 

1870년 북독일 연방을 구성한 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을 완성하기 위해 바이에른을 위시한 남독일을 끌어들일 명분을 찾고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의 전쟁이 그 종착점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로 갈등을 겪던 프랑스와 프로이센은 결국 1870년 7월 19일 나폴레옹 3세의 선전포고로 전쟁을 시작했다. 


보불전쟁은 북독일 연방의 우세로 진행됐다. 크고 작은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 3세는 결국 8월 31일 스당 성으로 후퇴하고 만다. 북독일 연방군에 포위된 프랑스 군은 몇 차례 탈출 작전을 펼쳤지만 대규모 사상자를 낸 채, 4일 뒤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북독일 연방의 보불전쟁 승리는 유럽 지형을 크게 뒤흔들었다. 전쟁의 승기를 살펴보던 남독일 연방이 비스마르크의 제안에 동참하며 마침내 독일 제국이 탄생했다. 1000년 넘게 흩어져 있던 게르만들이 드디어 국가를 이룬 것이다. 프랑스는 제2 제정이 무너지며 제3 공화국이 들어섰다. 1871년 1월 18일 파리에서 프랑스 국민들의 저항을 완전히 제압한 프로이센 빌헬름 1세는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통일 독일 제국을 선포했다. 

스당에서 즐긴 여유로운 유럽의 아침
 

벼룩시장이 열린 광장 ⓒ 윤한샘

 
나폴레옹 3세가 항복을 선언한 스당 성은 현재 호텔과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스당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15세기 초반 저택으로 건립된 스당 성은 16세기에 요새화되었다. 유럽 중세 공국의 영주들이 거주하던 성들은 대부분 요새의 성격을 띠었다. 요새는 넓은 해자와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대포와 활을 쏠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있다. 

스당 성 또한 거대한 해자와 웬만한 포격에도 끄떡없는 성벽을 자랑했다. 두터운 입구에는 적들의 침투를 막기 위해 뜨거운 기름을 부을 수 있는 구멍과 궁수들이 활을 쏠 수 있는 틈이 있었다. 성벽 곳곳에는 여전히 꺼뭇꺼뭇한 화상이 보였는데, 아마 2차 세계대전 벌어졌던 스당 전투(1940)의 흔적인 듯했다. 20세기 스당에서 벌어졌던 전투에서도 프랑스는 독일 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몸은 무거웠지만 스당의 아침을 느끼고 싶었다. 날씨는 흐렸고 7월 치고 꽤나 쌀쌀했다. 그러나 거대한 스당 성의 기운은 나를 문밖으로 나가라고 독촉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광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조용한 거리와 달리 광장은 북적였다. 자세히 보니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동네 주민들이 오래된 물건들을 펼쳐놓고 판매하거나 물물교환을 하고 있었다. 혹시 기념품이 될 만한 것들이 있나 호기심에 둘러보기 시작했다. 내색하고 있진 않았지만 주민들도 보기 드문 동양인의 출현이 신기한 눈빛이었다. 

물건들의 종류는 정말 다양했다. 끝이 해진 빗자루, 끊어진 전선, 깨진 전등, 찢어진 신발, 액자, DVD 플레이어 등 골동품들이 대부분이었다. 다이얼 전화기나 아날로그 라디오 등 정말 오랜만에 보는 기기들도 있었다. 우리였다면 이미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을 물건들도 많았다. 샅샅이 살펴봤지만 기념품 할 만한 소품이 없어 아쉬웠다. 벼룩시장의 풍경이 흥미롭긴 했지만 온라인 중고 거래가 정착된 한국이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잠시 앉아 느긋하게 유럽의 아침을 즐기고 싶었다. 다행히 광장 옆에 작은 바가 문을 열고 있었다. 안쪽에는 이미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고 있었다. 진한 에스프레소가 간절했다. 그런데 영어가 통하지 않았다. 더듬더듬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로 배웠던 프랑스어를 하니, 주인장이 감쪽같이 알아듣는다. 서늘한 여름, 야외 테라스에서 마시는 에스프레소는 감칠맛으로 가득했다. 나에게 스당의 향기는 맥주보다 커피였다. 
 

야외 테라스에서 마신 에스프레소 ⓒ 윤한샘

 
시메이 수도원에서는 찾을 수 없는 시메이 맥주  

오늘은 다시 벨기에로 넘어가는 일정이다. 벨기에 트라피스트 맥주를 대표하는 두 수도원으로 가야 한다. 시메이(Chimay)와 베스트블레테렌(Westvleteren), 두 맥주는 대비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시메이는 국내 마트에서도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는 맥주다. 살아남기 힘든 한국 시장에서 오랫동안 트라피스트 맥주를 알려온 개척자 같은 존재다. 반면 베스트블레테렌은 공식적으로 수출을 하고 있지 않다. 이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는 플랑드르에 있는 베스트블레테렌 수도원으로 직접 가야만 한다. 베스트블레테렌은 북쪽 프랑스 국경과 맞닿아 있어 오늘은 벨기에 남쪽에서 북쪽 끝까지 가야 한다. 

버스에 타려고 하니 거짓말처럼 해가 짱짱하다. 그제야 스당 성이 예쁜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냈다. 구석구석 인간의 영욕과 참혹한 역사가 묻어있었다.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여정이 허락하지 않아 아쉬웠다. 늠름하게 내려 보는 스당 성을 뒤로하고 다시 벨기에 국경을 넘기 위해 출발했다.    

시메이는 벨기에 왈로니아 에노주에 있는 작은 도시다. 인구는 겨우 1만 명 남짓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시메이 맥주가 시메이 수도원에서 만든다고 착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시메이 수도원도 실제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시메이 트라피스트 맥주를 양조하는 곳은 시메이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스쿠르몽 수도원(Abbey Notre Dame de Scroumont)이다. 대부분 트라피스트 맥주가 수도원을 이름으로 삼고 있지만 시메이는 예외다. 시메이 맥주를 마시고 싶다고 시메이 수도원으로 절대 가지 말 것. 

시메이 맥주의 고향, 스쿠르몽 수도원
 

스쿠르몽 수도원으로 가는 숲 길 ⓒ 윤한샘

 

스쿠르몽 수도원 ⓒ 윤한샘

 
스당에서 북서쪽으로 한 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스쿠르몽 수도원은 프랑스 국경과 가까웠다. 근처에는 인가를 찾기 힘들었다. 드넓은 들판 사이로 드물게 창고 같은 건물들이 보일 뿐이었다. 대중교통으로 오려면 큰 용기가 필요할 듯했다. 시메이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는 스쿠르몽 수도원 직영 레스토랑 오베르주 드 포토프레(Auberge de Poteaupre)로 가야 한다. 이곳은 레스토랑뿐만 아니라 호스텔로 운영되고 있다. 

맥주를 마시기 전 먼저 수도원을 방문하기로 했다. 스쿠르몽 수도원은 수도원의 일부를 개방하고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버스로는 약 3분 정도 걸린다. 하지만 우리는 걷기로 했다. 스쿠르몽 숲을 가로질러 15분 정도 산책하면 수도원에 닿을 수 있었다. 

숲으로 들어서자 고요함이 엄습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만 간간이 적막을 깨고 있었다. 하늘로 솟은 아름드리 침엽수들은 햇빛을 가느다란 실로 만들어 흩뿌렸다. 평지에 넓게 펼쳐진 숲의 모습은 한국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공기가 얼마나 상쾌한지 폐 속 깊숙이 느껴졌다. 지친 삶에 찌들었던 몸과 마음이 숲의 기운과 함께 치유되고 있었다. 감탄사를 내뱉던 입에서는 어느덧 노래가 흘러나왔다. 

숲의 마침표는 도로였다. 길 건너로 스쿠르몽 수도원과 양조장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수도원 입구는 개방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트라피스트를 안내하는 책자와 기도 스케줄 그리고 소박하게 그린 내부 안내도를 볼 수 있었다. 안쪽 큰 정원을 지나 왼쪽에는 교회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예배당과 수도사들의 무덤이 있었다. 

화려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수도원은 수수했다. 잘 정돈된 정원에는 150년이 넘은 세쿼이어 나무가 수도원을 수호하듯 우뚝 서 있었다. 스쿠르몽 수도원은 1850년 베스트블레테렌에서 소수의 수도사들이 정착하며 시작됐다. 나무는 척박한 땅을 일군 수도사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았다. 1862년 수도사들은 농장을 통해 수확한 보리로 맥주를 양조했고 1876년에는 맥주 부산물로 젖소를 길러 치즈를 생산했다. 현재 맥주와 치즈 모두 트라피스트 진품을 인증하는 ATP 라벨을 받고 있다. 

시메이 양조장은 수도원 내에 있지만 방문은 불가했다. 다른 트라피스트 맥주와 마찬가지로 수도사는 더 이상 맥주 생산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 품질을 감독하고 판매 수익이 목적과 합당한 곳에 사용되도록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 시메이 수도사가 13명 정도라고 하니 전 세계로 수출되는 맥주 양조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아름답고 맛있는 시메이 트라피스트 맥주
 

시메이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레스토랑 ⓒ 윤한샘

 
이제 맥주를 즐길 시간이다. 수도원을 벗어나 숲길을 따라 다시 오베르주 드 포토프레로 돌아왔다. 시메이 맥주는 기본적으로 도레, 루주, 트리플, 블루, 네 종류로 구성된다. 시메이 도레는 벨지안 블론드 에일로 엥켈 또는 싱글로 불린다. 수도사들이 평상시에 마시는 맥주에서 유래한 이 스타일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업적으로 양조되지 않았었다. 시메이 루주는 두벨(Dubbel), 시메이 트리플은 트리펠(Trippel) 그리고 시메이 블루는 콰드루펠(Quadrupel) 스타일이다. 또한 이 네 가지 스타일을 바탕으로 다양한 한정판 맥주들이 존재한다. 

메뉴에는 네 가지 맥주를 180ml 용량으로 즐길 수 있는 샘플러가 있었다. 가격도 겨우 10유로에 불과했다. ATP 라벨을 받은 시메이 치즈도 빼놓으면 안 된다. 치즈 또한 네 종류다. 4주 동안 숙성한 시메이 그랑 치즈, 6주 동안 숙성한 시메이 그랑 크뤼, 최소 6개월 숙성한 올드 시메이 그리고 껍질을 시메이 맥주에 담가 만든 시메이 위드 비어(Chimay with beer)를 세트로 주문할 수 있다. 
 

시메이 맥주들 ⓒ 윤한샘

 
맥주는 멋들어진 우드 타워에 서빙됐다. 4.8% 도레는 황금색을 뜻하는 이름처럼 짙은 금색을 띠고 있다. 벨기에 효모에서 나오는 향신료 향이 섬세하고 깔끔해 마시기 편했다. 7% 알코올을 가진 시메이 루주는 자신이 두벨 스타일임을 알려주듯 옅은 감초와 캐러멜 힌트 뒤로 뭉근한 수지 향이 느껴졌다. 한국에서 꽤 오랫동안 이 맥주를 마셨지만 이보다 더 신선한 시메이 루주는 경험하지 못했다. 

밝은색 속에 8% 알코올을 품은 시메이 트리플은 전형적인 트리펠의 향을 풍기고 있었다. 섬세한 서양 배와 꽃 향 그리고 옅은 흰 후추 향은 여리지만 향긋했다. 마지막으로 9% 알코올을 자랑하는 시메이 블루는 얌전한 콰드루펠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자두, 바이올렛, 블랙베리 향들이 우아하게 올라왔다. 쓴맛과 단맛도 절제되어 마시기에 부담스럽지 않았다. 보통 트리펠이 9%, 콰드루펠은 10~11% 알코올을 가진 것에 비해 시메이 맥주는 도수가 낮아 처음 마시는 사람들도 접근하기 쉽다. 
 

시메이150과 치즈들 ⓒ 윤한샘

 
네 종류 맥주를 마셨다고 일어나면 안 된다. 150주년 기념 맥주, 시메이 150이 남아있다. 10% 알코올을 자랑하는 시메이 150은 한 가지 스타일로 정의하기 어려운 맥주다. 벨지안 블론드 에일이라고 하기에는 알코올이 너무 높고 트리펠이라고 하기에는 향의 계열이 다르다. 묵직한 바디감 속에 꿀, 향신료, 수지 향이 지긋하게 묻어나는 이 맥주는 대미를 장식하기 위한 완벽한 선택이었다. 

지역민과 더불어 살아가는 시메이 맥주  

우리가 들어간 오전 11시에는 넓은 레스토랑에 손님들을 찾기가 어려웠다. 평일 점심 이곳이 비어있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먼 곳까지 사람들이 오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12시가 되자 테이블이 하나둘씩 차기 시작했고, 곧 만석이 됐다. 수십 명의 서버들이 주문을 받고 음식과 맥주를 나르느라 분주했다. 나의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행복한 표정으로 맥주와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시메이 맥주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깨달았다. 겨우 1만 명에 불과한 시메이라는 도시도 사실 맥주 덕분에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 아닌가. 맥주는 지역경제를 굴리는 커다란 원동력이었다. 진정성(authenticity)을 품고 있는 맥주의 힘을 여기서 볼 수 있었다. 
 

시메이 맥주를 따르고 있는 남자 ⓒ 윤한샘

 
레스토랑을 나오던 중, 우연히 맥주를 따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흰머리에 멋진 흰 수염을 가진 그는 언뜻 봐도 노년이었다. 언제부터 이곳에서 맥주를 따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 옛것이 쉽게 사라지고 변화가 빠른 우리 사회에서 찾기 힘든 기운이었다.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남겼다. 먼 훗날 노년의 내가 사진 속 그의 모습과 닮아있기를 바라며.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득한 그 표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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