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박인호는 1852년 2월 1일 충청도 덕산군 양촌면 박동리(현 예산군 삽교읍 하조리)에서 아버지 박명구(朴命九)와 어머니 온양 박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용호(龍浩)이고 남수(南壽)라는 다른 이름도 있었다.

자는 도일(道一)이고 도호 춘암(春菴)은 동학 3대교주 의암 손병희로부터 받았다. 그의 관향은 밀양 박씨로 시조인 혁거세로부터는 66대 손이며, 신라 54대 경명왕의 장자인 일성대군 언침(彦枕)의 37대 손이다. 선대가 언제부터 예산에 자리잡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집안의 신분은 중인계급, 생계는 소작농으로 곤궁한 편이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풍수서와 의서 등을 읽을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가 자라면서 과거 공부를 할 신분이 아니어서 한학 대신 당시 잡학 또는 잡서라 불린 풍수서와 의서에 관심을 보인 것은 집안에 전해온 이런 서책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시기는 조선말기, 철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조정은 여전히 세도정치로 매관매직, 부정부패가 일상화되고 괴질과 연이은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이 무척 어려웠다. 이양선이 연해에 나타나 민심을 어지럽히고 황해도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1850년 태평천국운동이 시작되었다. 1853년 4월 러시아 함대가 영일만까지 남하하여 동해안을 측량하고, 1854년 러시아 배가 덕원·영흥 해안에 와서 백성들을 살상하고, 1855년 영국 군함과 프랑스 군함이 동해안을 측량하는 등 조선에서는 예전에 없던 일이 자주 벌어졌다. 
최제우 초상 용담정 안에서 보는 수운
▲ 최제우 초상 용담정 안에서 보는 수운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국내적으로는 박인호의 생애와 연관이 많은 수운 최제우가 1860년 동학을 창시하고, 1862년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임술민란이 일어났다. 진주민란을 10여 일 만에 진압되었지만, 이후 전국 72개 군현으로 민란이 확대되었다. 각지의 민란은 삼정의 문란으로 관리들이 백성들을 갈취하면서 견디다 못해 봉기한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조선말기, 시대적 모순이 겹겹이 쌓인 채 빛바랜 주자학이 여전히 정학(正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된 주자학은 중화사상으로 변이되었다.

중국에서 중화(中華)란 당우삼대(唐虞三代)와 공맹정주(孔孟程朱) 시대의 왕도정치와 도학정치 이념인 덕치(德治)를 의미한다. 

이것이 조선에서는 '화(華)'를 사모하는 '모화사상'으로 변이되고, 특히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지원을 '재조지은(再造之恩)'으로 받들고, 모화사상은 임금과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처럼 중화사상으로 굳어졌다. 막상 도와주었던 명나라가 망하고 오랑캐라 치부하던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했는데도 변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서양세력이 침투하면서 청나라의 지배체제가 흔들리고 조선사회도 변화의 파고가 밀려왔다. 서양의 천주교가 민가에 전파되고 민족종교 동학이 봉건체제의 철벽을 뚫고 서서히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동학이나 천주교는 만인평등을 내세웠다. 주자학적 완고한 신분질서의 억눌림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는 한줄기 구원의 서광으로 인식되었다. 그는 이런 시기에 예산의 한적한 시골에서 자랐다. 

집안은 빈한했으나 화목해서 그는 어릴 적부터 인근에 총명하기로 널리 알려졌다. 춘암은 11세(1865년)의 늦은 나이에 비로소 한학(漢學)에 입문하였는데 그 이유는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이었다. 비록 배움의 시기는 늦었지만 총명해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학문의 습득이 빨랐다고 한다. 15세(1869년) 때에 지가서(地家書)와 의서(醫書) 등을 놓고 공부하는 등 신학문에도 크게 뜻을 두고 배움의 길에 일로 매진하였다. (주석 1)

총명한 두뇌를 갖고 태어났으나 출세의 길인 과거도 볼 수 없는 신분이어서 집안에 전해온 풍수서와 의서 등을 공부하고, 이것은 실제 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백범 김구가 17세이던 1892년 황해도 향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매관매직의 타락상에 분개하여 서당공부를 중단, 관상과 풍수의 길로 들어섰던 경우와 유사하다 하겠다. 김구는 18세에 동학에 입도하고 팔봉접주가 되었다. 민족사의 입장에서 보면 유능한 인재들이 과거제의 타락으로 부패한 왕조의 관리가 되지 않고 민족운동의 지도자가 된 것은 역사의 역설이라 하겠다. 

춘암은 비록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유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정직한 부모 밑에서 자라나 올곧게 성장하였다. 이와 관련 일화가 전한다. 

춘암이 6세 때 길을 가다가 잡초가 무성하게 버려진 밭 가운데 먹음직스럽게 열매 맺은 참외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가 버린 것으로 안 어린 춘암은 횡재했다는 생각이 들어 한 아름 따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자랑스럽게 부모님 앞에 내놓았다. 그러나 그 자초지종을 들은 부친은 춘암을 꾸짖어 타이르기를 "세상만사 힘들이지 아니하고 공으로 얻은 것은 당치 않으리라"하고 그 참외를 따온 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말하였다. 참외를 갖다놓고 돌아온 춘암에게 부친은 집 텃밭에서 키운 참외를 주면서 가난하다 해도 무슨 일이나 정직해야 하고, 내가 이롭기 위해 남을 속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고 한다. (주석 2)


주석
1> <천도교 제4대 대도주 춘암상사(1)>, <신인간>, 1990. 11. 10. 39~40쪽.(이후<춘암상사①> 표기)
2> 앞의 책, 4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박인호평전#박인호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