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10월 중순, 남녘의 보배로운 섬(珍島)에 아담한 성이 있다 하여 만나러 갔다. 멀고 먼 남도 천 리 길, 정겨운 이 길은 언제나처럼 상념에 젖게 한다. 알 수 없는 애잔함이 안개인 듯 덮쳐온다. 붉은 흙 빛깔 때문일까? 아니면 수도 없이 왜구가 침범한 땅이여서일까? 그도 아니라면 처절히 산화해간 동학군 형형한 눈빛이, 아직도 아물지 못한 5.18을 칩떠보고 있기 때문일까?
비스듬히 누워있는 섬 끝자락에 성은 앉아 있다. 10년을 넘겼어도 여전히 아린 세월호, 팽목항(진도항)이 여기서 지척이다. 팽목항 아래 서망항 남산에서 시작된 산자락이 서-북-동 3면을 빙 둘러 감싸 둥지처럼 아늑한 작은 분지를 만들었다.

▲남도진성(1872년 지방지도-진도 편집)진도(1872년 지방지도)의 남도진성. 성곽 문이 2개로 표시되어 있다. 바다에 병선이 정박하는 선소가 배 모양으로 그려져 있고, 바로 곁에 '팽목'이 보인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남쪽으로 방긋 바다가 열린 둥그런 분지 한가운데 돌로 쌓은 성이 얌전하다. 'S'자로 꺾여 바다에서는 잘보이지 않는 자리다.
이곳 옛 이름이 남도포(南桃浦)란다. 복숭아꽃 만발한 남녘 포구라니, 봄 풍광이 문득 궁금해진다. 별천지일까? 도연명이 꿈꾼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일까? 속세의 잡다함과 담쌓은 복숭아 꽃잎 흩날리는 선경, 평화롭고 삶이 유복한 고장일까? 하지만 이내 안타까움이 밀려든다.

▲남도진성 옛 모습2000년 이전으로 추정되는 남도진성 모습. 성안에 민가가 있고 멀리 바다가 보이는 항공사진. 민가는 언제인지 모르게 이전되었다. ⓒ 이영천(현장 안내판 촬영)
그런 곳에 쌓은 진성(鎭城)이라니, 이름과는 정반대의 처지에 내몰렸음이 분명하다. 무릉도원의 꿈보다, 왜구의 극악한 노략질에 얼마나 시달렸을까?
골칫거리 왜구, 남도진성과 무지개다리
대마도와 이키섬이 본거지인 왜구는, 고려 시대에도 골칫거리였다. 해안가는 물론 내륙 깊숙이 침범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초기 왜구는 일본 난민이나 유민이었으나, 16세기 이후엔 중국인이 주류를 이룬다. 일본과 조선, 중국과 소소한 교역에 의존하나 흉년이 들거나 교역이 막히면 곧잘 노략질을 일삼곤 하였다.
15세기 초, 환관 정화(鄭和)가 멀리 아프리카까지 원정을 다녀올 만큼 번성하던 중국이, 대항해 무역을 포기하고 바다를 봉쇄하는 '해금령'을 내릴 만큼 왜구는 극성이었다. 대양을 주름잡던 중국의 항해술이 쇠락하게 된 결정적 이유를 왜구에서 찾을 정도다.
이들 왜구가 해적이 아닌 국제무역을 추구했다면, 진도를 비롯한 우리 서남해가 중국∼조선∼일본을 잇는 국제 상업 도시로 발달할 수 있었을까? 소금 중개무역을 바탕으로 발트해 무역을 장악하며 한자동맹 중심도시로 한 시대를 풍미한 '뤼베크(Lübeck)'처럼 말이다.
그러나 진도는 왜구의 침탈에 특히 더 아픈 기억을 간직한 고장이다. 14세기 잔악한 왜구에게 진도를 비롯한 서남해안이 황폐화한다. 극심한 노략질에,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진도 관청과 백성이 모두 내륙지방으로 피신할 정도였다.
섬은 텅텅 비었다가 왕조가 바뀐 1414년에서야 겨우 백성거주를 허락할 정도였으니, 그 노략질이 얼마나 극성스러웠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려가 1389년에, 조선은 1396년과 1419년 대마도 정벌에 나선 이유다.

▲남도진성남도진성의 항공사진이다. 3개의 성문과 T자형 가로망, 객사 모습이 뚜렷하다. ⓒ 진도군청
세종 때에 왜구로부터 해안을 방어할 만호부(萬戶府)를 서남해안 곳곳에 설치한다. 동시에 수군 지휘관을 파견하고 성곽을 쌓아 진지를 구축한다. 남도포에도 세종 20년(1438) 정월 진이 설치되고 책임자로 만호가 파견된다.
남도포는 삼국시대부터 성터였다. 고려 원종 때 진도에 온 삼별초가 해안방어를 위해 쌓았다는데, 규모는 불확실하다. 만호가 파견될 때를 전후하여 옛 성곽을 증축하여 석성으로 쌓았다는 설과 1491년∼1498년 전후 축성했다는 설이 양립한다.
새처럼 하늘에 올라 위에서 내려다보면, 성곽 모양이 먹음직스러운 복숭아를 닮았다 하여 사람들이 南桃(남도)라 불렀단다. 꽤 그럴싸하다.

▲남도진성 배치도성안의 건축물이 있던 곳이 간략하게 표시되어 있다. ⓒ 이영천
1555년 5월 을묘왜변 때 왜구에게 전라 병영성을 비롯한 서남해안이 쑥대밭이 된다. 이때 남도진성과 이웃 금갑진성도 함락당한다. 임진왜란 때 곳곳이 허물어졌고, 이후 잦은 왜구 침범으로 오랫동안 대대적인 보수가 이뤄진다. 군사 체계에 따라 '남도포수군만호진성(南桃浦水軍萬戶鎭城)'이란 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성벽 높이 2.8m∼4.1m, 둘레 610m로 북에서 남쪽으로 경사진 구릉을 이용하여 타원형으로 쌓았다. 동문∼서문에 이르는 길에서 남문으로 향하는 'T'형의 가로 배치다. 남문 문루와 옹성이 오롯하고, 서문 옹성은 일그러져 있다.
온전하던 동문 옹성은 2024년 현재 해체 복원 중이다. 20세기 말까지 성안에 1백여 주민이 거주했으나, 언제인지 이주 되어 지금은 비어있다. 문화재 보존과 제모습찾기로 이해된다.

▲남도진성 남문남도진성 성벽에서 바라 본 남문의 모습. ⓒ 이영천
성은 그 형태가 온전하여 서남해안에 산재했던 수군만호 진성을 가늠할 기준이라 할만하다. 동서축 가로의 북쪽에 행정시설을, 남문으로 향하는 길 양쪽에 군사와 행정을 지원하는 부속시설을 두었다.
애당초 성안에 민가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장간, 종이, 화약, 활과 화살 등의 물품은 진도읍성에 의존했을 개연성이 높다. 배를 건조 정박하던 선소(船所)는 남문에서 서쪽으로 400m 떨어진 산이 가린 안쪽에 두어, 바다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성의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수운천이 해자 역할을 한다. 수운천을 건너는 두 개의 무지개다리가 있다. 이들 돌다리는 성 밖 옛길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유적이기도 하다. 단운교과 쌍운교로 불리는 두 다리는 막돌을 절묘하게 쌓아 무지개 형상을 만들어 냈다.

▲단운교와 남문해자 역할을 하는 수운천을 건너는 단운교와 남문. 넙적한 돌을 세워 무지개(홍예)를 만들어낸 단운교는 질박 미의 백미라 할만하다. ⓒ 이영천
특히 단운교(길이 4.5m, 너비 3.6m, 높이 2.7m)의 질박 미가 압권이다. 이곳에 흔한 납작한 막돌을 불규칙하게 모로 세워 쌓았다. 쌍무지개의 쌍운교 역시 질박하며 수수하다. 단운교가 1870년 전후, 쌍운교가 1930년 즈음에 세워졌다.
불국사의 청운·백운교가 석굴암에 비유된다면 이 두 무지개다리는 화순 운주사의 천불천탑이라 할만하다. 간난신고를 겪으며 살아 온 순박한 이 고장 사람들 얼굴을 빼다 박았다.
이웃한 금갑진성
한 나라 도읍이 능히 수십 년을 버틸만한 고장이 진도다.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1270년 용장산에 웅거해 왕을 옹립하여 여몽 연합군에 대항한 터전으로 삼은 이유다. 일본 정벌에 나서려는 여몽 연합군에게 삼별초가 패배한 1271년, 배중손이 이곳 남도진성에서 전사했다고 전한다. 김통정이 남은 삼별초를 이끌고 여기서 제주로 떠난다.
해안방어의 기본 단위가 만호성이기에, 진도를 비롯한 주변 섬 백성이 군사로 징발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이곳 남도진성은 진도 남서쪽 바닷가는 물론 신안의 여러 섬까지 방어하였다 하니, 그 역할이 작지 않았다.
이렇듯 남도진성은 전라우수영 휘하의 해상 방어 전초기지였다. 5백여 정예병이 주둔했다니 두 바다가 만나는 서남해안 방어에 들인 정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여기서 동북쪽으로 12km 거리에 세종 28년(1446) 같은 기능의 금갑진성을 두어, 진도 동쪽에서 해남반도에 이르는 해상을 방어하게 하였다.

▲금갑진성(1872년 지방지도)낮은 석축처럼 일부 성벽만 남아있는 옛 금갑진성의 모습을, 이 지도에서 유추 할 수 있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소
금갑진성은 1485년∼1498년 축성하였다. 지적도로 추정한 성벽 둘레가 약 800여m(높이 3m)이다. 산지와 해안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지형을 십분 활용하여 축조하였다.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해상 방어에 최적의 여건이다.

▲금갑리 앞 바다금갑교회 오르는 길에서 바라 본 금갑리 앞 바다. 금갑진성의 성 돌을 빼내 석화를 기르기 위해 바다에 흩뿌렸다고 어느 주민께서 귀뜸해 주셨다. ⓒ 이영천
동문과 서문을 두었던 성곽은 서벽과 북벽 300여m가 낮은 석축처럼 남았을 뿐이다. 마을 주민께 여쭤보니, 성벽은 석화 키우는 돌로 빼내어져 갯벌에 뿔뿔이 흩뿌려졌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금갑진과 접도 사이 바다에 선소를 두어 병선을 정박시켰다. 남도진성 옆에 서망항(西望港)이 있다면 금갑진성 앞 접도에는 남망산(南望山)이 있다.
왕권의 상징
동서양의 군사기지는 비슷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목책이나 흙, 돌 등으로 성채를 쌓고, 그 안에 절대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을 앉혔다. 서양은 신전을, 동양은 왕권을 대리하는 건축물이다.
한양에서 천 리 밖에 떨어져 있는 읍성에선 객사(客舍)가 왕권의 상징이다. 객사에 왕과 궁궐의 상징인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안치하고 정해진 날에 예를 올렸다. 따라서 객사가 제1의 건축물이고 관아는 다음이다. 남도진성도 예외가 아니어서 남문로에 뻗은 'T'자형 가로의 정점에 객사가 앉았다.

▲남도진성 객사성 안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징 건축물이 객사다. ⓒ 이영천
군사기지인 진성들이 완도의 청해진처럼 번성할 기회는 없었을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군사 주둔지가 도시 기원으로 꼽힌다. 그런 측면에서 이들 진성이, 유럽 도시의 기원인 브리타니아(영국) 오피둠(oppidum)이나 로마군의 카스트룸(castrum) 같은 역할을 해내지 못한 이유가 문득 궁금해진다.
복숭아꽃 흐드러진 무릉도원처럼 남도진성이 잘 보존되어, 우리 도시의 원형을 간직한 보배로 오래 남아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