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1황방산 일대 1차 발굴현장 전경(사진제공: 전주대박물관) ⓒ 김영희
지금까지 알려진 전주형무소 관련 민간인 학살(주1)은 크게 두 가지 사건이다. 첫 번째는 1950년 6월 25일 전쟁 직후 전주형무소에 복역 중이던 좌익 정치사상범 1400여 명이 학살된 것, 두 번째는 1950년 9월 26일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자행한 전주형무소 수감자 공무원 및 군·경 500여 명이 학살된 사건이다. 전주 황방산 발굴과 발굴지 찾는 데 공로한 분들, 그리고 필자의 눈에 들어온 특이한 점, 김승수 전 전주시장의 노고에 대해 전하고자 한다.
전주형무소 황방산 학살지 발굴 과정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은 총 4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학살 장소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형무소에서 시내를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는 동서북 방향의 옛 공동묘지, 건지산, 황방산, 소리개재 등이 선택되었다. 전주유족회는 전주대 박물관 발굴팀과 함께 2019년 시굴작업을 한 결과 세 지점만 발굴 가능한 것으로 파악했다. 2020년 6월경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3가 산195-1번지 황방산 일원에서 1차, 2차 3차 발굴 사업이 이루어졌다(주2). 황방산 일대 학살지를 발굴할 수 있도록 확실한 증언과 자료의 도움을 준 세 분을 먼저 살펴보자.
전주 유족 신종희(78세), 아버지의 기록물을 찾아서
신종희(전주유족회 부회장)씨의 아버지 신계수는 1948년도 당시 24세로 남원지청에서 3년 형을 받고 1년 후 전주교도소에 수감 되었다. 그이후로 소식이 없었는데, 남은 자식들이 연좌제로 걸릴까 우려했는지 큰아버지댁에서 아버지 사망을 자연사로 신고했다. 이 때문에 신종희씨는 아버지가 집에서 돌아가신 줄만 알고 살아왔다고 한다. 그는 40대 후반에서야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야겠다는 결심한다.
전주경찰서와 전주교도소에 방문해 '집행 명부를 열람할 수 없냐'고 문의했지만 거절 당하고 돌아왔다. 다시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가, 2012년도에 불현듯 '대전 국가기록원'에서 원부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는 대전 국가기록원에 민원 신청을 했지만, 직원은 자료가 없다는 답변만 전했다.
하는 수 없이 직원에게 '나는 죽을 때까지 아버지 행적기록을 꼭 찾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고, 담당 직원은 본인이 직접 와서 자료실에서 기록지를 찾을 수 있게 허락했다고 한다. 신종희씨는 꼭 찾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광주에서 옷 보따리까지 싸서 대전 국가기록원으로 향했다. 첫날 오전 9시부터 1948년도 자료를 시작으로 훑어보았다. 오후 4시경 삼촌 신인수의 기록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게 뭐지?' 너무 기뻐서 마음이 조여들었다고 신종희씨는 그날을 회상했다.
'이번엔 아버지 행적도 곧 나오겠지'라며 설레고 긴장되는 초조한 마음으로 서류함을 뒤적거렸단다. 퇴근 시간쯤, 드디어 아버지 신계수의 원부가 눈에 띄었다. 원부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쁘고 반가운 느낌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내 앞에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온 것처럼, 꿈인 듯, 생시인 듯' 했단다. 그동안 기록이 없다고 한 직원에게 한마디 원망하지 않고 원부를 복사해서 황급히 자료실을 나왔다. 생산년도 1949년 '집행원부, 형사사건부, 수형인 명부' 등이었다.

▲사진 2신종희 유족이 2014년 대전 국가기록원에서 찾은 아버지의 행적기록물 자료(사진 제공:신종희) ⓒ 김영희
신종희씨는 전주 지역에서는 최초로 대전 국가기록원에서 아버지의 학살된 기록물을 찾은 유족이었다. 아버지 기록지를 찾고 보니 자신감이 생겼고, 전주 지역 유족들 31명에게 국가기록원에 민원 신청을 권유해 총 18명이 기록물을 찾았다. 그 서류를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화위)에 증거로 제출하여 2024년도 2차 진실규명 결정문을 받게 되었다. 현재 배·보상 민사소송 접수 중인 상태다. 신종희씨의 '아버지의 기록물을 찾겠다'는 일념과 염원에 찬사를 보낸다. 기록물을 찾지 못한 유족들도 있는데, 이는 당시 전주형무소가 미군 폭격으로 전소되어 내부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양심 증언자(목격자) 이순기 교도관을 찾아서
신종희씨는 아버지 관련 기록물을 찾은 후, 전주에 사는 후배 김종현씨에게 아버지의 사연을 고백했다고 한다. 후배와 신종희씨는 당시 민간인 학살에 관련된 사람들을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었고, 1기 진화위 운영 기간에 이도영 박사와 이순기 교도관의 만남을 어렴풋이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2015년쯤 어느날 김종현씨가 이순기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순기댁를 찾아갔다. 이순기는 깜짝 놀라면서 '나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고 했다고 한다. 신종희씨는 아버지와 연배가 비슷한 이순기를 만나는 순간 아버지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고 한다.
이순기는 자신이 목격했던 학살사건의 시간과 장소, 위치 등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학살 사건 당시 "헌병들이 교도관에게 '쏘고 싶으면 쏴봐'라고 말했지만, 쏠 수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순기 교도관은 전쟁이 끝나고 2년 후 혼자 그 학살지를 찾아갔고, 흙을 파보니 유해가 그대로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덮어두고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고 한다. 필자는 이순기 같은 양심적인 증언자가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대다수의 학살 현장 관련자들은 진실을 감추고 있는 현실이다.
유족 이도영 박사(이 박사)의 조사연구
이도영 박사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후 '제주도 모슬포의 예비검속자 처형 사건'으로 전주형무소에 수감 중 학살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도영 박사는 미국에서 이민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민간인학살의 실체를 찾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끈질기게 조사연구 작업을 해 왔단다. 1999년 10월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기밀문서'가 해제되었고, 이 박사는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관련 문서와 사진을 발굴, 공개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던 분이다(주3). 2000년 5월 <월간 말>지를 통해 최초로 빛바랜 흑백사진 속 처참하게 늘어선 주검들의 사진 6장이 공개됐다. 이 사진은 이도영 박사가 제공한 사진들이다.
필자는 2021년 7월 30일 골령골 6차 발굴 자원봉사에 참여해, 목조건물에 부착된 참혹한 학살 장면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 박사가 '미 국립기밀문서' 해제를 통해 사진을 찾아 공개했다는 소식은 얼핏 들었다. 그 사진을 배경으로 발굴 작업에 중요한 단서와 근거자료로 활용되었다는 것도 들었다. 필자는 그때만 해도 이 박사가 전주 유족인 줄은 몰랐다. <월간 말>지는 곧 공동취재단을 구성하여 6장의 사진 속 장소와 흔적을 찾아 나섰다.

▲사진 32000년도 이도영 박사가 {월간 말지}에 공개한 사진 중 일부 오른쪽 사진 벽돌이 쌓여있고 우측에 서 있는 사람이 미군으로 보임(사진제공:전주대박물관) ⓒ 김영희
위 사진 설명에 의하면 '군·경에 의한 학살이다' 또는 '인민군에 의한 학살이다'라는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박사는 좌익에 의한 학살이든, 우익에 의한 학살이든 양쪽 모두 가능성을 열어두고 조사해 보자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공동취재단은 옛 전주형무소를 찾아서 동네 노인 몇 명을 만나, 정확히 옛 형무소 자리를 확인했다. 동네 터줏대감 노태석(84)를 소개받아 여쭤봤다.
"응 '반대미' 말하는구만, 바로 여그여. 혹은 '반촌'이라고 불렸어. 이 자리가 정문이 있던 자리여, 여그 이쪽으로 죽 담장이 있었지, 아마 한 30자(15m) 높이는 됐었재, 저쪽은 벽돌공장이 있던 자리고."
"어르신 혹시 전쟁 때 벽돌공장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말두 마! 한 삼백 명은 죽었드랬지. 아마 전쟁이 터지고 그해 가을 무렵이었는데 증말 끔찍시려웠지."
조심스럽게 사진을 꺼내 보였다. 노인은 한참 동안 사진을 주시하며 기억을 더듬고서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응 이랬구만! 전주형무소가 틀림없구만, 여그 담장하며… 근디 이런 사진이 워디서 났어? 참 많이 죽어 부렀어."
"어르신 직접 보셨어요?"
"보든 못했지! 나두 잠시 피난 갔다가 돌아와 보니까 시체가 널려 있었당께."(주4)
이 박사의 사진 자료는 현재 대전형무소 집단학살 사건과 전주형무소 집단학살 사건의 중요한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민간인학살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역할 뿐만 아니라, 발굴 사업에 소중하고 적중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필자는 국내에서도 민간인학살 관련 자료와 진실을 밝힐 연구자가 나타나길 기대해 본다.
필자의 가슴을 메이게 한 발굴 현장 장면
필자는 3차 황방산 발굴 때 참석했다. 1차와 2차 발굴 보고서에서 발굴 현장을 살펴보니 특이한 것 세 가지가 가슴을 메이게 했다. 하나, 항아리 속 유해 발굴의 정체. 둘, 발굴 현장의 학살구덩이 폭과 깊이가 아주 얕고 좁다는 것. 셋, 김승수 (전)전주시장의 민간인학살에 대한 관심도 등이다.

▲사진 4항아리 속 유해는 2000년도 말지 공동취재단이 발견한 유해함임(사진제공:전주대박물관) ⓒ 김영희
항아리 유해의 정체가 드러난 것은?
필자는 참석하지 못한 1차, 2차 발굴 보고서를 전주대학교 박물관 옥창민 학예연구사에게 연락하여 받았다. 보고서를 살펴보니 항아리에 담긴 유해가 발굴된 사진이 있었다. 그간 발굴장에서 전혀 보지 못한 특이한 모습이었다. 마침 신종희 부회장이 보내 주신 자료인 2000년 5월 <월간 말>지 김재중 기자의 기사와 성홍제 회장의 말과도 일치했다. '항아리 유해의 정체'에 대해서는 공동취재단이 이 박사와 이 교도관과 함께 황방산 학살터를 찾아간 그날 단서가 나왔다.
"바로 여긴데 건물이 들어서 버렸구만." 이 교도관이 기억한 학살터 위 지점에 육중한 납골당이 들어서 있었다. 역사의 퍼즐이 맞출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낙담으로 바뀌는 순간 납골당 뒤쪽 야산 기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마 이 건물을 지으면서 뼈가 쏟아져 나왔다 해도, 그냥 묻어버리거나 모아서 어딘가에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여."
일행이 낙담에 빠져 있을 때 잡풀 속에서 햇살에 반짝이는 하얗고 긴 물체가 언뜻 들어왔다. 심장이 두근거려 조심스럽게 풀숲을 헤치고 그 물체를 꺼내보니 바로 유해 조각들이었다. 전주형무소 사건 진실의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숨 막히는 상황에서 제대로 파보자고 중장비를 동원하여 걷어내고 호미로 남은 흙을 긁어내니 학살 당시 엎드리고 쪼그리고 있는 모습 그대로 유골이 발견되었다. 유해를 보는 순간, 이 박사와 조병권 유족은 자신의 아버지 유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오열하고 말았다.
"내가 알기론 여기 묻힌 죄수들은 3년 이하의 단기범들이었당께. 대부분 무고한 사람들이었다고 봐야지."(주5)
50년 만에 원혼이 밝은 빛을 만났지만, 당시 여건이 발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해 상태 훼손 방지와 훗날 발굴 시 찾기 쉽게 항아리를 사서 유해를 가지런히 넣고 다시 어둠의 세계로 잠들게 했다는 것이다. 그 증언으로 2020년 전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사업을 진행하게 됐다.
매장지 구덩이가 너무 좁아서 가슴이 답답하다

▲사진 5좌) 2023년도 1열 매장지 모습 왼쪽 첫 번째가 필자 우) 좌측 처 줄이 여순사건 유족회 이형용 대변인발굴장에서 제례 올리는 모습 ⓒ 김영희
필자는 매장지를 보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전국으로 발굴지를 다녀 봤지만, 지역마다 매장지의 특징이 있다. 황방산 매장지는 세종시 연기군 학살지처럼 매장지 구덩이가 좁았다. 이곳 역시 1열의 규모는 길이 960cm, 폭 60~85cm, 깊이 5~35cm 내외로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학살 당한 사람들의 자세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폭이 60cm면 무릎을 가슴에 바짝 대고 앉기도 힘들고 머리는 숙여야 한다. 깊이는 대략 20cm 정도인데 다리도 무릎 정도 들어가 쪼그린 자세로 총살을 당했다는 의미다. 학살자들의 사악함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비단 예를 들면 경남 진주 지역은 거의 최소 폭이 1m 50cm, 깊이 1m 정도 길이의 25m(40명 학살 기준) 구덩이를 파고 사람을 엎드리게 만들고, 다리를 쭉 펴고 나란히 눕혀서 총살했다. 죽음 앞에서 이런 자세든, 저런 자세든 그리 중요할까. 하지만 필자는 죽음마저 편한 자세로 받아들이지 못한 피학살자들의 비참함과 학살자들의 잔인함에 가슴이 아린다.
김승수 (전) 전주시장의 아름다운 모습에 경의를 표한다

▲사진 6김승수 전) 전주시장은 황방산 발굴 개토식 헌화로 시작하여 봉안식까지 참석한 아름다운 모습 ⓒ 김영희
2018년도 전주형무소 민간인학살지로 알려진 전주시 덕진구 산정동 산41-1번지 일부 학살지가 이서-용정간 국도 대체 우회도로 공사 구간에 포함되어 있었다. 전주유족회는 유해 수습이 시급한 상황에 대해 (전) 서윤근 의원에게 상의했고 그 결과 서의원은 조례(안) 발언(주6)으로 상정에 이른다.
이후 조례가 전주시 의회를 통과(주7)함으로써 유해 발굴에 대한 지원방안이 마련되었다. 전주시는 국가기록원,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전주교도소, 6.25 민간인학살조사연구회 등에서 유해 발굴 관련 및 과거사 자료 등을 수집하여 유해 매장지를 검토한다. 검토 결과 과거사에 대한 반성 및 유가족에 대한 위로 피학살자에 대한 해원(解冤)을 목적으로 조사를 계획하여 진행하였다.(주8)
한편 전주 유족회는 김 시장과 면담한 결과, 흔쾌히 승낙하여 발굴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필자는 김 시장이 국가 폭력에 대한 사과와 발굴 사업 시작부터 세종 추모의 집의 봉안식까지 유족들과 피학살자들에게 성심을 다하여 예의를 갖추는 모습에 감동 받았다.
또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위령 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통과시킨 지역은 아산시와 전주시가 최초라고 기억한다. 2018년도 아산시 예산으로 설화산 발굴이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번 기회에 김승수 시장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찬사를 보낸다.
나가면서
전주형무소 사건을 살펴보면서 황방산 발굴 사업의 성과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전주 유족들과 양심가 이 교도관, 이 박사의 끈질긴 노력 그리고 아픈 역사에 관심을 가진 서의원, 김 시장의 따뜻한 마음이 이루어 낸 결실이다. 또한 군, 경찰에 의한 학살이든 인민군에 의한 학살이든 한국전쟁 당시 학살 당한 위령제를 함께하여 억울한 혼령들을 어루만지는 유족들의 사연도 전주 시민들의 우수한 의식과 참된 인간미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타 지역 발굴 사업도 전주시를 귀감 삼아 따뜻한 사회가 되길 기대해 본다.
다음 달 35화가 계속됩니다.
[각주]
(주1) 경상대 신경득 교수의 연구 내용 속엔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6일부터 전주 함락 시점인 7월 20일까지 전주에서 정치범과 보도연맹원 등 4500여 명에 대한 대량 학살이 있었다"라고 한다.
(주2) 전주대학교 박물관, 『전주지역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보고서』,박물관, 2020.07.
(주3) 강호진 기자, 이도영 박사의 양민학살 진상조사보고서『죽음의 예비검속』, 오마이뉴스, 2000.08.10.
(주4) 《월간 말》 2000년 5월 르뽀 기사(김재중 기자) 일부
(주5) 《월간 말》 2000년 5월 르뽀 기사(김재중 기자) 일부
(주6) 전주대학교 박물관, 『전주지역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보고서』,박물관, 2020.07.p22. 전주시의회 제352회 제1차 본회의 회의록 2018.07.17. 서윤근 의원 발언.
(주7) 전주시의회 제352회 제1차 본회의 회의록 2018.09.17. 의원 발의로 「전주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 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 통과.
(주8) 전주대학교 박물관, 『전주지역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보고서』,박물관, 2020.07.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단디뉴스에도 실립니다. 김영희 (전)교사 한국전쟁기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봉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