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고성이 고향인 외할머니는 구수한 사투리가 일품이셨다. 명절 때면 외삼촌과 이모들이 모두 서울 인근에 살고 있어서 큰이모가 할머니를 모시고 상경하시는 경우가 많았다. 힘드실텐데 모두가 내려가겠다고 해도 "야야, 안 와도 덴데이"라며 극구 만류하셨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어느 날,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귀가했더니, 할머니가 소파에 누워 TV 보시다 내가 문 여는 소리에 일어나셨다. 그러곤 내 손을 꽉 잡으시면 이리 말씀하셨다.
"우찌하긋노. 만다꼬 그래 쌔빠지게 해쌌노"
어떻게 보면 혼나는 것 같기도 하고, 할머니가 '승'내시는 것도 같은, 무뚝뚝하면서도 거센 억양과 화끈한 말투. 사투리의 '사'짜도 잘 몰랐던 나는 매번 할머니의 사투리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엄마한테 "할머니가 뭐라셔?"라고 얼마나 물었던지.
그때의 정겹던 할머니는 이제 곁에 계시지 않지만, 그 사투리는 아직도 내 기억 속에서 살아 숨쉰다. 그래서 이책 그래서 <경상의 말들>이 반가웠나보다. 할머니의 언어를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반가운 경상의 말들

▲<경상의 말들> 책 표지.책과 영화 등에서 뽑은 100가지 사투리에 단상을 붙여 사투리에 녹아든 우리의 삶을 투영할 수 있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유유
<경상의 말들>은 여러 매체에 소개된 경상도 사투리 100가지를 뽑아 그에 대한 여러 단상을 쭉 펼쳐놓는다. 그러곤 페이지를 할애해 사투리의 어원, 얽힌 이야기, 환경, 정겨운 에피소드까지 쉽게 꿰뚫는다. 모두가 서울로 모이고, 서울 사투리인 표준어로 대동단결한 작금의 시대에, 점차 희미해져가는 경상도 사투리를 통해 억세지만 다정한, 화끈하지만 인자한 사투리의 가치를 재조명한다.
경상도 지방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말은 "욕봤다". 이 말도 내겐 특히나 기억남는 사투리로, 책을 통해 흥미롭게 설명한다. 자칫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말이지만 경상도 사투리라면 걱정마시라. 기분 나빠할 필요가 전혀 없다.
국어사전대로라면 '몹시 고생스러운 일을 겪었거나, 부끄러운 일을 당했을 때 쓰는 말'이기도 하지만, 경상도에서만은 이 말은 '힘든 일을 잘 처리했다', '무척 수고한다'라는 뜻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즉, '옴마' 말이다.
또, 누군가를 격려할 때도 "욕보이소~" 혹은 "욕보시겠네예~"라고 쓸 수 있단다. 우스갯소리지만 이제부터 '욕'을 입에 달고 살아야겠다. 사투리는 가깝고 친할수록 거친 법이라고 했으니.
경상도 사투리는 말도 짧고 억양도 단호하다보니 무뚝뚝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문득 2000년 초반 한 개그프로그램이 떠올랐다. 그 코너에서 "이집 정말 맛이 없군요"라는 말을 전라도 사투리로 "헤헤, 물 말아 먹으면 돼야~"로 말한다면, 경상도 사투리로 "아니! 아지메!(아줌마)"라고 부르며 불만을 나타낸다 하지 않던가.
경상도의 사투리를 떠나, 팔도강산의 구수한 사투리는 여느 나라에서는 찾기 힘든 우리나라 언어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담아냈기에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이다. 사투리를 통해 우리가 그동안 바쁘게 살아오느라 잠시 잊었던 우리의 정체성과 정서, 고향, 친구, 친지, 가족, 추억 등을 고스란히 소환하는 건 덤이다. 그래서 이 책은 속독보다 한땀 한땀 수놓듯 천천히 읽어야 갈수록 고소함을 느낄 수 있다.
마침, 내용 중에 몇 번이고 곱씹은 부분이 있다. '돌멩이로 공가서 솥 걸고, 가지밭이나 호박 심은 데 찾아 반찬거리 갖고 온나'라는 부분이다. 김원일의 <오늘 부는 바람>(문이당, 2005)에서 언급된 사투리로 소개하고 있는데, '공가서'가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그래도, 장학퀴즈 푸는냥 혼자 무슨 뜻인지 고민했지만 도저히 풀지못해 그만 답안지(?)를 봤다.
'쓰러지지 않도록 잘 받쳐야 한다. 한쪽으로 기울지도 않아야 한다. 이럴 때 경상도에서는 공간다고 한다. 이는 괴다의 경상도 사투리다. 공가는 것은 무엇보다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그렇구나. 돌멩이를 잘 잘 괴서 솥을 걸라는 뜻이었구나. 특히 '어떤 일이든 밑받침을 잘 잡아야 한다. 토대가 중요하고 기둥이 중요한 게 그 재목도 좋아야 하지만, 그걸 놓는 사람이 위치나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한 마디로 기술이 있어야 한다. 잘 괴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부분에서 지금까지 탑만 높게 쌓으려는 욕심만 있었지, 이를 공가게 하기 위해 어떤 위치에서 무슨 노력을 해야하는지 망각하고 있었다는 반성도 오랜 만이었다.
지방소멸 위기 속, 더 소중히 다뤄야 할 사투리
국립국어원이 2022년 발표한 '국어사용 실태조사'를 보니, 서울말씨를 사용한다는 의견은 2020년 56.7%로 2005년 47.6%에 비해 9.1% 증가했다. 반면,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는 의견은 2005년 27.9%에서 2020년 22.5%로 5.4% 줄었다. 수도권 집중화로 지방 소멸 위기는 인구를 넘어 '말'로도 이어진다.
사투리는 정서적, 학술적, 문화적 가치가 녹아 있는 그 지역만의 무형문화재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지역 언어의 가치와 보존을 위해 무엇을 고찰해야 할는지 함께 알려준다. 어떻게 보면 이 시대의 또 하나의 언어기록물인 셈이다.
지역 소멸의 위기를 맞고 있는 이때, 지방의 모든 지자체가 꼭 이를 염두에 두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 하지 않던가. 경상도에 인연이 있는 독자라면 사투리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충청의 말들>을 시작으로 <서울의 말들> <전라의 말들>이 출간됐다니, 마침 잘 됐다 싶다. 이 참에 팔도강산 사투리가 모두 출간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고, 그리만 된다면 모두 섭렵할 각오가 돼 있다.
그래서 인가. 책에서처럼 "만다꼬" 한 마디면 모든 걱정이 사라지던 할머니의 사투리가 벌써부터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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