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길게 누운 화원반도와 섬 사이로 바닷물이 휘돌아 나간다. 회돌이 치며 울음소리를 낸다는 거센 바다를 쌍둥이 진도대교가 건넌다. 높다란 주탑이 다가들수록 생각도 바닷물처럼 소용돌이친다.
해남 쪽 휴게소에서 얼큰한 우럭매운탕을 끓이던, 웃음 가득한 아주머니는 어디 계실까? 이젠 즐길 수 없는 그 맛이 꿈결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술 때문에 요양 와서, 진도 홍주에 반했다는 오윤(吳潤)도 떠오른다.
젊은 나를 지배했음이 분명한, 울음은 물론 슬픔도 없이 익살과 신명으로 민중적 삶을 고양 시켜냈다는 춤추는 그의 판화와 함께다. 초의선사와 추사의 제자로 남종화를 일궈낸 소치(小痴) 선생은 물론이고, 추사의 '세한도'를 일본에서 되찾아 온 손재형 선생도 그렇다. 진도아리랑은 또 어떤가?
모든 게 잘 갖춰진 진도... 삼별초가 택한 고장

▲진도 옛 지도1872년 진도를 그린 지방지도로 섬 한가운데 읍성이 중심이다. 동문을 나와 북쪽으로 선명한 두가닥 길 주변에 용장성과 고성이 그려져 있고 끝은 녹진과 벽파진이다. 남문을 나온 두가닥 길 끝에는 남도진과 금갑진이 선명하다. 서쪽 지금의 지산면에 말 목장이 있었는지 '목장면'으로 표기되어 있다.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산은 솟고 들판은 넓게 펼쳐져 있어 나라 도성이 옮겨와도 수십 년을 버텨낼 만하다는 진도는, 참으로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생각이다. 이름 그대로 보배 섬이 분명하다. 나라에서 가장 물살이 거세다는 바다는 천혜의 해자다.
서해와 남해가 만나니 온갖 가지 해산물이 풍성했을 것이고, 육지 버금가는 산하는 충분한 식량 공급처였으리라. 모든 게 잘 갖춰진 진도는, 그러나 정작 그로 인해 갖은 풍상을 겪어야만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비를 뿌리려는지 잔뜩 찡그린 늦가을, 용장성으로 걸음이 향한다. 터가 웅장하다. 십수 층으로 분리된 단 위엔 풀이 무성하다. 각각의 단에 기품있게 앉았을 건물을 상상해 본다. 맨 윗단에 오르니, 멀리 산봉우리가 아련하다.

▲용장성궁궐 터의 맨 윗쪽, 정전 자리에서 바라 본 풍경. 앞 산봉우리 너머가 전라우수영 쪽이다. ⓒ 이영천
당시 집권층에게 강화도는 '엘도라도', 즉 이상향이자 황금의 도시였다. 몽골의 창칼에 죽어 나가는 육지 백성과 달리 안은 무척 풍성한 몽진 생활이었다. 고려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문신들이 몽골과 조약을 맺어 개경으로 환도하자, 배중손이 이끄는 군대인 삼별초는 즉각 강화도를 버린다.
신속한 이런 결행은 몽골과의 항전을 이어갈 준비와 대안이 마련되었다는 방증이다. 1천여 척의 배가 진도 벽파진에 당도한다.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추대, 용장산에 12.85km 산성을 쌓고 용장사가 있던 자리에 궁성을 짓는다. 북서쪽이 열린 분지로 개경을 향해서다.
이들이 진도를 근거지로 삼은 이유는 명쾌했다. 왕성 개경의 위협에서 떨어져 있으면서 모든 여건이 강화도와 비슷하다. 육지와 가까워 대몽항쟁을 이어가기에도 적합하다. 실제로 전라도 내륙 깊숙이 공격하기도 한다.

▲용장성 조감궁성을 쌓았던 터를 새처럼 하늘에서 바라 본 모습. ⓒ 진도군청
해자 역할을 하는 북쪽 울돌목과 남쪽 맹골수도는 나라에서 물살이 가장 빠른 곳이다. 이런 자연조건은 섬을 지키기에도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개경으로 향하는 조운선 길목으로 정부에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여건이다. 섬은 또한 비옥하여 1년 농사로 3년을 먹고 남을만하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다.
진도 용장성과 강화도 고려궁지를 비교해보면 위치와 지형, 주변 자연조건이 무척 흡사함을 알 수 있다. 물살이 거세다는 염하수로(손돌목)에서 멀지 않은 접근성이 뛰어난 곳에 강화 고려 궁성을 쌓았다. 용장성도 울돌목에서 가깝다.
아울러 육지로 드나들기 유리한 벽파진 인근이다. 분지를 둘러 긴 외성과 궁궐을 감싼 궁성을 쌓았다. 다만 강화도엔 염하수로를 따라 바닷가에 수십km 성벽을 쌓았다는 게 다른 점이다.

▲용장산성궁성이 있는 주변 산을 둘러 포곡식으로 12.85km의 성을 쌓은 용장산성. ⓒ 국가유산청
불과 1년 남짓, 그러나 진도 삼별초는 패배한다. 이때 진도 백성 1만여 명이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비극을 맛봐야 했다.
오랫동안 왜구에 시달린 진도와 진도읍성
읍내 군강공원 성벽에 오르니, 아찔하다. 성벽 높이만큼 역사 또한 그랬다. 전쟁을 방불하는 왜구 노략질에 오랫동안 진도는 무인도였다. 충정왕 2년(1350) '공도화(空島化)' 정책으로 백성을 육지로 옮겨 살게 한다. 이후 진도는 빈 섬이다시피 방치되었다.

▲진도읍성 벽군강공원에 남아 있는 진도읍성 북벽. 잘 복원된 성과 치성, 주변이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다. ⓒ 이영천
왕조가 바뀌어 태종 14년(1414)에 10년 면세 조건으로 거주를 허락하나, 이 또한 여의치 못하다. 왜구 등쌀에 9개월 만에 거둬들인다.
세종 1년(1419), 요동을 치겠다던 왜구가 태풍을 만나 충청도 비인현을 약탈한다. 왜구 정벌에 나설 빌미가 되어 주었다. 병권을 쥔 상왕 태종이 왜구 본거지인 대마도 정벌하라 명한다. 적극적인 타개책이다. 이종무가 227척 전함으로 대마도로 향한다. 왜선 130여 척을 나포하고 왜구 소굴 수천 채를 불사른다.

▲진도읍성 동벽군강공원에 남아 있는 진도읍성 동벽. ⓒ 이영천
한편으론 유화책을 쓰기도 한다. 세종 8년(1426) 대마도주 청을 받아들여, 3포(부산포, 염포(울산), 제포(진해))를 개항하고 왜관을 설치, 상시 무역을 허락한다. 이로써 왜구 준동이 잦아든다.
바다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세종 19년(1437) 진도를 해남에서 분리해낸다. 백제 성곽이 남아있던 고읍을 읍성으로 활용한다. 옛 성의 흔적이 남아있는 고군면 고성리다. 1440년에 군수가 파견되고, 지금의 진도읍 성내리에 성을 쌓기 시작해 1446년 완공한다.

▲군청 뒤 북벽진도군청 뒷편에 남아 있는 진도읍성 북벽. ⓒ 이영천
사각의 사다리꼴 읍성은 둘레 1,589m, 높이 2m∼3.5m의 규모다. 성내리 지적으로 사라진 읍성 형태 확인이 가능하다. 지적도에 옹성과 수십 개 치성 흔적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군강공원과 군청 뒤에 남은 성벽으로 읍성의 위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읍성 건립으로 행정이 안정되자, 군사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연달아 남도진성과 금갑진성을 쌓았다. 이로써 섬 전체가 긴밀하게 연결된 요새로 변모한다. 백성의 삶을 최우선으로 살폈던 세종의 계획이 보배로운 섬 진도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읍성의 공간구조
차이를 보이지만, 조선 8도에 최대 160개 읍성이 있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은 기록한다. 전체 행정단위 절반에 읍성을 두었다는 의미다. 이들 읍성은 대체로 유사한 공간구조로 축조되었다. 요즘처럼 모두 비슷비슷한 신도시였던 셈이다.
중국 도시계획의 교과서로 꼽는 주나라 <주례(周禮)>의 <동관(冬官) 고공기(考工記)>를 표본으로 삼았다. 도읍인 한양은 물론이고 부·목·군·현도 마찬가지다. 다만 행정단위의 위계와 규모, 지형, 입지 등을 고려하여 탄력적으로 적용한 차이가 있다.
내성이 성(城)이라면, 외성은 곽(郭)이다. 이로써 성곽이 하나의 도시공간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곽을 거의 두지 않았다. 아울러 여러 제약으로 한 변에 하나의 성문만 두었다. 그나마 북문이 생략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내부 가로도 동-서-남-북문을 모두 잇는 '十'자는 부·목 등 큰 도시에서는 보이나, 군·현에선 동-서-남문을 잇는 'T'자형이 일반적이다.

▲진도읍성과 주변1872년 지방지도 중 진도읍성. 성 안에 동-남-서문을 연결한 내부 가로망과 관아, 객사 등 각종 행정청이 배치되어 있다. 성 북서쪽에 각 홍살문을 가진 향교와 사직단 등을 두었고, 지금의 진도천 변 해창리에 해창, 대동고, 군기화약고와 선소를 두어 크고 작은 전투선 등이 상시 정박 했음을 볼 수 있다.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성안엔 객사를 제1의 위치에 두고 그다음 동헌, 내아, 감옥 등의 행정기구와 군사시설을 두었다. 통상 향교와 사직단은 성밖에 두었다. 아울러 지역의 특색에 맞춰 창고나 교통시설, 군사시설, 선소, 목장 등을 필요에 따라 배치하였다.
진도읍성도 위의 배치원칙에 충실하다. 지금의 군청 자리엔 동헌이, 객사는 철마공원에 있었다. 성 밖 북쪽에 향교를, 서문 밖에 사직단을 두었다. 해창리 앞 진도천에 전선과 군선이 정박하는 포구와 함께 해창, 사창, 군기화약고, 대동고를 두어 각종 물품의 유통과 진상, 조운을 관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읍성 철거령
그 많던 읍성이 사라진 건 1910년 강제 병합 직후다. 읍성의 훼철이 그들로선 무척 시급한 사안이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의 통치권을 깡그리 지워내려는 의도다. 읍성엔 그 지방의 행정은 물론 정치·경제·사회·문화가 집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10년 읍성 철거령으로 나라 안 읍성들이 헐리기 시작한다. 건축자재나 하천 축대로 헐려 나갔다. 식민 도시화도 영향을 미쳤다. 진도읍성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다. 혹은 석화를 기르기 위해 바다에 흩뿌리기도 했을 것이다.

▲용장성과 고성진도읍성 동문을 나온 두가닥 길이 선명하다. 아랫 길 중간에 둥그런 '고성'이 보이고 끝단이 벽파정으로 선소를 나타내는 배가 그려져 있다. 북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 '용장성'이 보이고 '고려 승화후 온이 거소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길 끝 녹진 건너에 전라우수영이 표현되어 있으며 역시 배가 그려져 있다.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1872년 지도를 보면 특이점이 발견된다. 당시엔 흔적만 남았을 용장성을 그려 넣어 고려 승화후 왕온의 옛터라는 설명을 부연하였다. 아울러 인근의 고성이 온전한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19세기까지도 이 둘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진도읍성 동문을 나와 지금의 벽파진과 녹진으로 향하는 대로가 굵게 표시되어 있다. 특히 벽파진은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유인하기 위해 보름 이상 주둔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진도의 주로 관문으로 오랫동안 제주도 등지로 오가는 여객터미널이기도 했다. 화원반도와 가장 가까운 거리의 울돌목인 녹진에 진도대교가 놓였다.
땅에 새겨지거나 한번 부여된 기능은, 폼페이처럼 그 공간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속성을 갖는다. 허물어져 도시공간에 녹아들었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읍성은 문화유산이기 이전에 도시의 원류로 우리 삶의 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