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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제2 진도대교 공사가 한창일 때, 이곳에 올 일이 잦았다. 주탑이 올라가고, 케이블에 보강형이 걸리면서 사장교는 쌍둥이가 되어갔다. 다리가 가 닿는 울돌목 양안은 당시엔 비교적 한산했다. 우수영 관광지 건너에 작은 휴게소가 있었고, 그곳 우럭매운탕은 필생의 맛이랄 만큼 일미였다. 하지만 언젠지 모르게 사라져 갔다. 20여 년의 세월이니 자연스러운 현상인가?

그동안 울돌목 양안은 관광 시설 늘리기에 바빴다. 한마디로 명량해전과 이순신 상품화였고 박제화였다. 쓸모없다는 게 아니다. 격변의 역사 현장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장소 기억'을 말하려는 것이다.

장소 기억은 오감(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이 총동원되어 작동하는 방식이다. 역사적 장소에서의 추체험이 잊히지 않는 추억으로 각인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려면 시장통처럼 펄떡이는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만남이 먼저다. 놀이를 즐기고, 먹고, 구경하고, 만지면서 형성된다.

진도대교와 울돌목 사진 좌측이 진도 녹진, 우측이 화원반도 우수영 관광지다. 진도대교 주탑 사이로 멀리 전라우수영 마을이 얼핏 보인다.
진도대교와 울돌목사진 좌측이 진도 녹진, 우측이 화원반도 우수영 관광지다. 진도대교 주탑 사이로 멀리 전라우수영 마을이 얼핏 보인다. ⓒ 이영천

울돌목 장소 매력은 무척 강렬하다. 회돌이 치는 바닷물이 있고, 뛰어난 풍광을 가졌으며, 더구나 이 바다는 세계 전쟁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명량해전 현장이지 않은가. 여기에 매운탕 집 같은 장삼이사의 삶들이 펼쳐지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무척 자연스러웠을 터이다. 그러나 현실은 스쳐 지나가는 썰물 같다.

이만한 역사성을 가진 곳은 그리 흔치 않다. 울돌목에서 무엇을 느끼게 할 것인가? 최소한 영화 <명량>이 던지는 물음보다 더 강렬한 무엇이어야 하지 않을까? 작위가 아닌 우럭매운탕 같은 살아있는 삶의 조합이 장소 기억의 첩경 아닐까? 그렇듯 생생한 삶의 현장이라는 생명력을 불어넣자는 것이다. 현재로 환원된 역사가 사회적 기억을 생성하고 확대재생산 하는 '한 장소가 갖는 고유 능력'이라는 걸 잊지 말자는 것이다.

화원반도

명량해전 당시 백성이 올랐다는 진도 망금산을 차로 오른다. 전망대 옆으로 케이블카는 바삐 화원반도를 오간다. 일망무제다. 이순신 동상이 가리키는 전장 너머로 우수영이 지척이다.

명량해전 전장과 전라우수영 사진 좌측으로 작게 보이는 이순신 동상이 가리키는 바다가 명량해전 전장이다. 반대편으로 섬 양도가, 그 뒤로 전라우수영 마을이 앉았다.
명량해전 전장과 전라우수영사진 좌측으로 작게 보이는 이순신 동상이 가리키는 바다가 명량해전 전장이다. 반대편으로 섬 양도가, 그 뒤로 전라우수영 마을이 앉았다. ⓒ 이영천

지도를 펴면, 고개를 내민 4개 반도가 목포 앞바다로 모여든다. 마치 오므린 손가락 같다. 율도, 달리도가 바깥 바다를 고하도가 안 바다를 막아 파랑이 얌전해진 목포항은 그래서 천혜의 피항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바다를 지키는 군사시설을 두었고 1897년 개항과 1914년 호남선 종착역이었다.

4개 반도 맨 남쪽에서 위로 길게 휜 땅덩이가 화원반도다. 뱃길이 아니었다면 이곳은 무척 불편한 교통 오지였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바다에 통행을 의지했고 이는 신안, 진도, 해남, 완도를 잇는 뱃길의 구심점이었다. 서남해안 곳곳 크고 작은 섬과 암초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야 하는 능수능란한 뱃사람을 길러냈음은 자명하다.

화원반도와 주변 1872년 지방지도에 표현된 화원반도. 전라우수영이 과할 정도의 크기로 그려져 있다.
화원반도와 주변1872년 지방지도에 표현된 화원반도. 전라우수영이 과할 정도의 크기로 그려져 있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화원반도 끝 바다를 막자 영암호와 금호호가 생겨났다. 방조제로 쉬이 오갈 수 있게 된 지금, 화원반도 옛 모습을 그려 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역설은 어디나 숨어있다. 삼면이 바다인 화원반도 모습을 전라우수영을 그린 옛 지도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문(轅門=군영의 문) 자리엔 원문마을이 있다. 마을 남쪽엔 둥그런 옥매산이, 북쪽으론 제법 너른 물길이 바다로 흘렀다. 지금은 아니지만, 원문이 있던 곳은 한마디로 화원반도의 개미허리였다. 남쪽 바다는 매립되었고, 북쪽 물길은 좁은 수로로 변했으며, 바다는 막혀 담수호가 되었다.

전라우수영 원문(轅門) 화원반도의 가장 잘룩한 곳에 관문(關門)처럼 쌓아 군항인 우수영의 1차 방벽 역할을 한 원문. 개미허리 같은 1872년 지방지도 표현이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전라우수영 원문(轅門)화원반도의 가장 잘룩한 곳에 관문(關門)처럼 쌓아 군항인 우수영의 1차 방벽 역할을 한 원문. 개미허리 같은 1872년 지방지도 표현이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원문은 전라우수영 드는 길목에 성곽을 쌓고 문루를 두었던 자리다. 해군기지인 수영을 방어하기 위한 육지의 관문(關門)인 셈이다. 화원반도 한가운데에 진도와 면한 곳 잔잔한 바다를 끼고 전라우수영이 앉았다. 원문에서 직선 5km 거리다.

어란진, 벽파진과 명량해전

망금산 전망대 오른쪽이 벽파진이다. 하늘의 도움으로 명량에서 승리했다는 이순신은 1597년 9월 15일(음) 우수영으로 항진한다. 16일 승전했고 17일 암태도로 진을 물렸으니, 우수영에서 머문 날은 불과 이틀 남짓이다.

전라우수영과 벽파진 사진 상단이 진도대교가 놓인 녹진-전라우수영이다. 우측 하단이 벽파진이다.
전라우수영과 벽파진사진 상단이 진도대교가 놓인 녹진-전라우수영이다. 우측 하단이 벽파진이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그보다 어란진에서 4일(8/24∼28), 벽파진에서 16일(8/29∼9/14)을 보낸다. 혼군(昏君)일 망정 왕을 노리는 왜군을 막아야 했기에 바닷길을 명량으로 유인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조선 수군이 전멸한 칠천량해전에서 배설이 판옥선 12척을 이끌고 도망쳐 나왔다. 회령포에서 이를 인수(8/18)한다. 12척만으로 수백 척 왜군과 싸워 이길 비책이 필요했다. 휘돌아 나가는 명량 거친 물살이 승리를 담보할 첩경으로 보였다. 좁은 해협과 거친 물살의 도움이 있어야만 겨우 싸워 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려면 자신이 미끼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왜에게도 이순신은 숙적이었다. 정유재란은 왜의 하삼도(전라, 충청, 경상) 지배가 목적이었기에, 이순신 제압은 필수였다.

어란진(1872년 지방지도) 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어란진의 1872년 지도다. 진도 쪽 바다로 드는 길목에 쌓은 4각 진성과 전투선이 정박한 선소를 잘 표현하고 있다.
어란진(1872년 지방지도)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어란진의 1872년 지도다. 진도 쪽 바다로 드는 길목에 쌓은 4각 진성과 전투선이 정박한 선소를 잘 표현하고 있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락연구원

어란진에 주둔한 이순신을 8척 전함으로 공격(8/27)해 들어온다. 전투는 지리멸렬했다. 칠천량 패배로 겁먹은 조선 수군이 제대로 응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패배 의식부터 지워내야 했다. 군사를 독려해 간신히 왜군을 격퇴한다. 조정엔 장계도 올리지 않는다.

벽파진에서 김억추 판옥선이 합류, 총 13척이 된다. 이때 왜선 18척이 또 공격(9/7)해 들어온다. 다시 왜군을 격퇴한다. 역시 장계를 올리지 않는다. 이로써 조선 수군의 패배 의식이 걷혔을까?

이충무공전첩비와 벽파진 벽파진 뒤 낮은 산 꼭대기에 서 있는 이충무공전첩비. 바닥 바위를 파 거북이를 앉히고 등에 비를 세웠다. 거북이 머리가 향한 바다 쪽이 벽파진이다.
이충무공전첩비와 벽파진벽파진 뒤 낮은 산 꼭대기에 서 있는 이충무공전첩비. 바닥 바위를 파 거북이를 앉히고 등에 비를 세웠다. 거북이 머리가 향한 바다 쪽이 벽파진이다. ⓒ 이영천

진군해 오는 왜군에 맞서 이순신은 우수영으로 든다. 그리고 운명의 해전을 벌인다. 진도대교 서쪽 700여m 울돌목 초입으로 추정한다. 우수영을 출항한 판옥선 13척이 '一 자' 진을 친다. 대장선인 이순신 판옥선이 홀로 수십 척 왜선을 맞아 몇 시간을 싸웠던 일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겁먹은 조선 수군은 그저 구경만 할 뿐이었다.

전라우수영

우수영 마을이 소슬하다. 세종 22년(1440), 해안 방어를 강화하고자 전라수영을 현 위치로 옮겨 와 군항(軍港)을 꾸렸다. 울돌목의 입에 해당하는 만(灣) 안쪽으로, 양도(羊島)가 거센 물살을 막아주는 자리다.

전라우수영 옛 동헌 자리로 추정되는 곳(옛 문내면사무소)에서 바라 본 우수영과 울돌목. 폐교된 학교 앞으로 섬 양도가 보이고, 너머로 진도대교 주탑이 보인다.
전라우수영옛 동헌 자리로 추정되는 곳(옛 문내면사무소)에서 바라 본 우수영과 울돌목. 폐교된 학교 앞으로 섬 양도가 보이고, 너머로 진도대교 주탑이 보인다. ⓒ 이영천

해안에서 북쪽으로 솟은 구릉을 이용해 돌로 둥그렇게 성을 쌓았다. 동서남북 4대 문과 성안에 객사, 정청, 각종 창고를 두었다. 북문 밖으로 망해루와 북장대를 세웠고, 동문 밖에는 충무공비각(명량대첩 비각)이 있다. 남문 아래 바다에 전선, 병선, 거북선 등이 정박하는 선소를 두었다.

전라우수영은 군항 중 가장 규모가 큰 석축 성곽으로 둘레 1,872m(높이 3.5∼4m)였다. 원문을 비롯해 동서남북 성문터, 객사, 동헌과 함께 영창터 등 각종 군사시설이 흔적으로만 남았다.

전라우수영(1872년 지방지도) 둥근 성벽에 4대 문과 성안에 객사 등 각종 관청이 그려져 있다. 앞 바다에 정박해 있는 거북선, 병선, 전투선, 척후선 등이 표현되어 있다.
전라우수영(1872년 지방지도)둥근 성벽에 4대 문과 성안에 객사 등 각종 관청이 그려져 있다. 앞 바다에 정박해 있는 거북선, 병선, 전투선, 척후선 등이 표현되어 있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정유재란 당시 우수영은 조선 수군 재건의 시작점이었다. 이순신의 치밀한 전략과 백성의 적극적인 호응 덕분임은 물론이다. 명량해전 후 고군산도로 진격해 금강으로 통하는 충청도 길목을 막았다.

이후 목포 앞 고하도(10/29)로 수군 통제영을 옮겨 겨울을 보낸다. 서북쪽이 병풍처럼 솟은 고하도는 겨울 북서풍을 막아주었다. 그랬기에 배를 감추기에도 적합했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수군 재건에 필수적인 전선 건조와 군량 모집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서쪽에 치우쳐 있어 남해안 방어와 해상 제압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섬이 작아 평야가 좁고 이순신을 따라다니는 백성들을 수용할 공간도 없었다.

이런 연유로 이듬해(1598.02.17) 완도 동북쪽 고금도로 통제영을 옮긴다. 해상 통행첩을 발급하여 군량미를 조달함은 물론 전선 건조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고금도 통제영에서 수군 전력을 칠천량해전의 절반으로 회복한다. 고금도에서 진린과 함께 순천 왜성을 공격하고, 노량해전을 치르면서 최후를 맞고 말았다.

명량대첩비각 우수영 마을 북쪽에 있는 명량대첩비각 입구.
명량대첩비각우수영 마을 북쪽에 있는 명량대첩비각 입구. ⓒ 이영천

최근 몇 년 사이 우수영 터 발굴이 활발하다. 해남군 보도자료에 의하면, 차근차근 우수영 성곽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복원이 완료되면 그 위용이 어떨지 무척 궁금해진다.

그러나 우수영 마을은 무척 한산하다. 문화마을로 발길을 끌어들여 활력을 되찾으려던 수년 전 노력이 벽화 등 흔적으로 남았다. 진도대교가 생기기 전 근동 해상중심지였다. 여객터미널은 물론 섬에서 잡힌 수산물이 모두 이곳으로 모였다.

우수영 마을 앞 바다 명량해전 당시 판옥선 13척이 정박했을 전라우수영 앞 바다. 여전히 여객터미널 기능을 하며 인근 섬으로 떠나는 여객선이 드나든다.
우수영 마을 앞 바다명량해전 당시 판옥선 13척이 정박했을 전라우수영 앞 바다. 여전히 여객터미널 기능을 하며 인근 섬으로 떠나는 여객선이 드나든다. ⓒ 이영천

그토록 흥청거리던 좁은 길이 이젠 발길마저 뜸해 쇠락의 바람만 휑하다. 서남해안을 호령하던 군항으로써 우수영 마을이 떠안겨 주는 역사의 무게를, 양도를 감싸 안은 바다는 알고 있을까? 왜군에 맞서 그 바다를 멀리 돌아 나오던, 해안에 정박했을 거북선의 위용이 문득 궁금해졌다.

#전라우수영#벽파진#어란진#울돌목#망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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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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