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아래 기사에는 해당 소설의 결말을 비롯해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요즘 한강 작가의 책을 읽고 있다. <채식주의자>를 읽었고,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이번에 세 번째로 <흰>을 읽었다.

한강 작가의 책은 한 번 읽고는 소설의 의미를 잘 이해하기가 어렵다. 혹시 나만 그럴까. 나는 적어도 두세 번은 읽어야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한 작가의 책은, 그게 뭐든 읽고 나면 늘 삶에 대해 성찰하게 하고 여운이 많이 남는다.

이번에 읽은 소설 <흰>도 그렇다. 세 번째 읽고 있다.

제목만 보고 나서 <흰>은 그동안 읽었던 한강 소설과는 다르게 밝은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역시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색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을 자전적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난 이 소설이 수필이나 일기, 아니면 어떤 글은 '시'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책 표지 한강소설 <흰>, 문학동네 출판
책 표지한강소설 <흰>, 문학동네 출판 ⓒ 문학동네

작가는 2014년 5월에 <소년이 온다>를 출간하고 나서 다니던 곳에 휴직 신청을 한다. 알고 지내던 폴란드 작가의 초청을 받아 그해 8월에 폴란드 바르샤바로 열네 살 아이와 둘이서 이민 가방을 끌고 떠났다고 한다. 이건 책을 처음에 끝까지 읽은 후 가장 뒤에 있는 '작가의 말'을 읽고 알았다.

작가는 바르샤바에 살면서 <흰>의 1장과 2장을 썼고 서울에 돌아와서 3장을 썼단다. 그리고 1년 동안 처음으로 돌아가 천천히 다듬어 완성해서 2016년 5월에 출간한 책이다.

바르샤바도 독일의 폭격으로 95% 이상의 건물이 파괴된 '흰 도시'였다가 다시 살아난 도시였음을 알고, 바르샤바에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시처럼 느껴지는 소설 소설의 본문 글 '모래' 전문
시처럼 느껴지는 소설소설의 본문 글 '모래' 전문 ⓒ 유영숙

1장은 '나'의 흰, 2장은 '그녀'의 흰 그리고 3장은 '모든 흰'이다. 이 책에는 65편의 흰 것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시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65개 '흰' 소재들은 언뜻 보면 이질적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두 번 읽고 세 번 읽다 보면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목록을 만들고도 "이 단어들을 들여다보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어려워 내내 미루다가, 낯선 도시로 옮겨가서 살며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강보, 베네 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p.9(작가가 만든 흰 것의 목록)

한국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과 '흰'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있다며, 그에 따라 작가가 쓴 글은 '하얀'이 아닌 '흰' 책이었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아기

이 책은 하얀 강보에 싸인 갓 태어난 아기 이야기로 시작한다. 스물세 살의 엄마는 혼자서 진통을 겪으며 물을 끓이고 가위를 소독하고 아이를 위해 흰 천으로 배내옷을 만들고 강보로 쓸 홑이불을 꺼내놓고 통증을 견뎠다.

마침내 아기를 낳고 탯줄을 자르고 피 묻은 조그만 몸에다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여덟 달 만에 태어난 아기는 "죽지 마. 죽자 마라. 제발"이라고 중얼거리는 엄마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두 시간 만에 죽고 말았다. 이 아기는 달떡처럼 희고 어여쁜 여자아이였다.

첫 부분에 있는 '강보'와 '배내옷' 그리고 '달떡'이 <흰> 소설의 모든 '흰' 소재의 글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 글만 읽어도 작가가 쓰려고 했던 '흰'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에는 다양한 '흰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작가는 새로운 도시로 살러 가서
"이 낯선 도시에서 자꾸만 오래된 기억들이 떠오른다"라고 말한다. 자신이 아기 대신 태어났다고 믿는 화자는 '흰'과 연결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기억해 낸다.

바르샤바에서의 흰색과 고국에서의 다양한 '흰' 이야기에는 '고독과 고요 그리고 용기'가 숨어 있음을 느낀다. 읽다 보면 독자도 작가의 추억 어느 귀퉁이에 서 있는 듯하여 마음이 아파온다.

늘 소설 속에서 질문을 던지는 작가

작가는 다른 소설에서처럼 소설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다음 문장처럼 말이다.

눈보라

몇 년 전 대설주의보가 내렸을 때였다. 눈보라가 치는 서울의 언덕길을 그녀는 혼자서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우산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얼굴로 몸으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송이들을 거슬러 그녀는 계속 걸었다.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일까. 이 차갑고 절대적인 것은? 동시에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p. 64 본문 글

이 글을 읽으며 나도 내가 떠올리는 '흰'에 대한 목록을 작성해 보았다. 그리고 눈보라와 관련된 나의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흰 눈, 눈보라, 첫눈, 흰 천, 안개, 구름, 소금, 각설탕, 흰돌, 흰쌀밥, 수의...

2001년 겨울, 그날엔 첫눈이 소담하게 내렸다. 첫눈이 온다는 생각만으로 설레 그 남자에게 전화하고 서울 종로에서 만났던 기억이다. 겨우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돌아와야만 했다.

폭설로 버스가 끊겨 코트를 우산 삼아 둘이 함께 쓰고 제1한강교를 눈보라 속에서 걸었다. 노량진에서 겨우 버스를 타고 봉천동에서 내렸다. 시간이 늦었는데 당시 주머니에는 겨우 짬뽕 한 그릇 먹을 수 있는 돈밖에 없어서, 그 남자와 짬뽕 한 그릇을 시켜 나눠 먹었다. 그 시절엔 왜 그리 가난했던 것일까?

그날 눈보라를 뚫고 그 남자는 집에 돌아갔다. 하지만 당시 통행금지에 걸려,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내고서야 아침에 풀려났다고 했다.

내게 흰 눈을 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추웠던 1980년대다. 그땐 그렇게나 추웠는데도 지금은 이렇게 잘살고 있다. 작가가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마지막 내쉰 숨을 들이마시듯, 그렇게 말이다.

삶의 시작과 끝에 마주하는 색, '흰'

이 책의 모든 흰 것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죽은 아기와 연결되어 있다. 배내옷이 수의가 된 그 아기가 살아있었다면 작가는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에겐 언니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본문 글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아기 배내옷이 수의가 되었다.
소설의 본문 글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아기 배내옷이 수의가 되었다. ⓒ 문학동네

흰 도시에서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죽은 언니를 생각하고 내 삶과 몸을 빌려줌으로써 그녀를 되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 책을 쓰기 시작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작가는 아직도 이 책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에게 주고 싶었던 흰 것들을 지금도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흰'은 책을 덮고 거기서 끝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작년 봄, 수의를 입고 돌아가신 친정 엄마가 지금도 내 가슴에 살아 계신 것처럼 말이다(관련 기사: 친정엄마가 돌아가신 후에야 알게 되는 것들 https://omn.kr/278jt )

 '흰'은 책을 덮고 끝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작년 봄, 수의를 입고 돌아가신 친정 엄마가 지금도 내 가슴에 살아있는 것처럼(자료사진).
'흰'은 책을 덮고 끝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작년 봄, 수의를 입고 돌아가신 친정 엄마가 지금도 내 가슴에 살아있는 것처럼(자료사진). ⓒ pedrotheartist on Unsplash

한강의 '흰'은 끝없이 훼손되고 더럽혀질 수 있지만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절대 더럽혀질 수 없는 '흰'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즉 배내옷이나 수의처럼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고귀한 것들 말이다.

우리나라 최초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책을 한국어로 바로 읽을 수 있어서 참 귀하고 귀했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들도 한 권 한 권 읽으며 한강 작가가 그리고 싶은, 그려왔던 세상을 조금씩 맛보고 싶다. 앞으로 더 많은 노벨 수상자가 우리나라에서 나오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립니다


흰 - 한강 소설

한강 지음, 문학동네(2018)


#한강작가#한강소설#흰#문학동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퇴직교원입니다. 등단시인이고, 에세이를 쓰고, 가끔 요리 글도 씁니다. 평범한 일상이지만, 그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기사를 씁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