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핵" "탄핵" 열창하는 가수 이승환가수 이승환씨가 13일 밤 여의도 국회앞에서 열린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 탄핵! 즉각 체포! 탄핵촛불문화제’에서 덩크슛(탄핵하라 윤석열로 개사),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돈의 신 (돈의 힘으로 개사) 등을 열창했다. ⓒ 권우성
"그들이 몰표를 던져 당선시킨 대통령이 느닷없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탄핵이 되고 파면될 위기인데, 정말 답이 없는 동네네요."
연이은 황당한 뉴스에 지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난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자주 경험하다 보니 무뎌진 탓이다. 역사 교사로서, 손가락질하고 한탄하기보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늘 마음이 무겁다. 오늘도 아이들과 함께 대구와 경북으로 답사갈 궁리뿐이다.
가수 이승환의 성탄절 구미 공연이 전격 취소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구미시는 안전상 이유를 댔지만, 이승환은 정치적 발언을 삼가라는 서약 요구를 거절한 게 진짜 이유라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그가 탄핵 집회 때 무대에 올라 윤석열 대통령을 능멸한 '죄'다. 정치적 소신에 따른 그의 '커밍아웃'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닐뿐더러 온 국민이 한목소리로 대통령 탄핵을 외치고 있는 마당에 구미시의 대응은 분노하는 여론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됐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마다 구미에서 내쳐진 이승환을 모셔 오기 위한 경쟁이 불붙었다.
가수 이승환조차 '반국가 세력'으로 여기고, 박정희를 스스럼없이 신처럼 떠받드는 대구, 경북 지역의 집단 정서는 분명 퇴행적이다. 소수의 목소리는 언제나 강자에 의해 억눌려지고 일방적인 찬양과 폄훼만 난무한다.
여느 지역의 답사 후기라면, 글을 시작하기 전에 '성급한 일반화일 수 있다'는 전제를 무조건 달지만, 솔직히 대구, 경북 지역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답사 중에 상식적으로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일들을 숱하게 경험하기 때문이다. 지역적 편견이 거의 없는 아이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다.
특히 이번에 가수 이승환이 봉변을 당한 구미는 역사 동아리 아이들과 즐겨 찾는 곳이다. 구미를 단지 박정희의 고향으로만 기억하는 건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꼴이다. 단언컨대, 한정된 시공간에서 시대를 초월한 다채로운 역사를 공부하는 데는 구미만 한 데가 전국에 드물다. 이른바 '가성비 갑'인 답사지인 셈이다.
박정희에 가려진 대구·
경북... "참담하다"는 아이들
구미는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말 충신의 대명사로 불리는 야은 길재의 고향이다. 고려가 멸망하자 고향으로 낙향해 두문불출하며 여생을 보낸 곳으로, 낙동강 변에 그를 배향하는 금오서원이 세워져 있다. 그의 충절을 기리고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헐리지 않은 전국 47곳의 서원 중 한 곳이다.
또, 구미는 '서대문 형무소 제1호 사형수'라는 왕산 허위의 고향이기도 하다. 명성황후 시해로 일어난 을미의병부터 고종 황제의 강제 폐위에 저항한 정미의병에 이르기까지 구한말 의병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1908년 전국의 의병을 규합한 13도 창의군을 이끌고 서울진공작전을 펼치다 붙잡혀 처형당한 불세출의 항일 투사다. 당시 그의 의병 부대가 진격했던 서울 청량리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길은 그의 호를 따서 왕산로로 명명됐다.
그런가 하면, 삼국시대로 세월을 거슬러 신라에 선진 문물이었던 불교가 최초로 전래된 도리사도 빼놓을 수 없다. 대구 가는 길엔 조선 초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맞선 사육신 중 한 사람인 박팽년의 자취도 만날 수 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생가도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선산읍에 있다.
이처럼 구미에서 가볼 만한 곳은 차고 넘치지만, 박정희 생가와 새마을운동 테마공원에 가려져 아예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다. 금오서원과 허위 기념관 등을 찾을 때마다 한산하다 못해 썰렁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갈 때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던 박정희 생가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라며 아이들조차 안타까워했다.
"도로명과 체육관 이름은 그렇다 쳐도, 아이들 다니는 초등학교의 이름조차 박정희를 끌어다 쓰는 건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요?"
박정희 생가 앞의 정수초등학교라는 학교명이 박정희의 '정'과 영부인인 육영수의 '수'를 이어붙여 명명된 거라는 사실에 아이들 모두 혀를 내둘렀다. 역사 인물의 공과를 따져볼 기회 자체가 원천 차단되는 거라며 반교육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학교의 도로명 주소 역시 '박정희로'여서, 아이들은 입학과 동시에 박정희를 신격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태 전에는 구미라는 도시 이름을 '박정희 시'로 개명하자는 움직임이 일어서 토론 수업의 소재로 활용한 적도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처럼 위대한 역사 인물의 이름을 도시명 등에 차용하는 건 바람직하지만, 박정희의 경우처럼 역사적 과오가 뚜렷하고 논쟁적인 인물이라면 피하는 게 맞다는 게 아이들의 결론이었다. 일부 정치 세력의 갈라치기 수법이라며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컸다.
"일제에 맞서 목숨을 바친 의병장은 푸대접하면서 독립운동가를 토벌하던 친일 군인을 앞다퉈 떠받드는 것처럼 느껴져 참담하네요."
"길재와 허위의 공적을 내세워 스스로 충절의 고장이라고 자랑하면서, 친일파에서 공산주의자로, 공산주의자에서 반공주의자로 변절을 일삼은 박정희를 지역민 모두가 추앙하는 건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아요."
구미 답사 경험이 있는 아이들에게 이번 사달은 대구, 경북 지역에 대한 편견을 더욱 고착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몇몇은 뉴스를 접하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한 아이는 정치적 소신을 밝혔다는 이유로 지방자치단체장이 보수 세력의 압박을 핑계 대며 대중 가수의 공연마저 가로막는 건, 일언지하 '집단 린치'라고 규정했다.

▲박정희 동상 관련 발언하는 홍준표 시장홍준표 대구시장이 23일 오후 동대구역 광장에서 열린 '박정희 동상 제막식'에서 인사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 와중에, 이웃한 대구에서는 박정희 동상 건립 문제로 연일 시끄럽다.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를 추앙하는 기념물을 세우는 건 반역사적이고 정의에 반한다는 시민들의 외침은 '저래봐야 소용없는 일'로 치부됐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대구시민의 70% 이상이 찬성한다며, 시민단체의 주장을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대구의 관문인 동대구역 광장은 '박정희 광장'으로 개명됐고, 그곳에 3m 높이로 밀짚모자에 장화를 신고 벼를 품에 안은 박정희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 아래로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자나 깨나 농민 생각' 등 그의 공적을 기리는 글귀가 빼곡하다. 제막식에는 홍 시장을 비롯해 이만규 대구시의회 의장과 강은희 대구시교육감 등 공공기관장들이 대거 참석했다.
"적어도 대구만은 박정희 대통령의 공에 대한 평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제막식에 참가한 대구시민들 앞에서 홍 시장은 이렇게 일갈했다. 과거 '우리가 남이가?'라고 외치던 때를 떠올리게 하는 발언이다. 굳이 '적어도 대구만은'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인 건, 홍 시장 스스로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린다는 점과 동상 건립이 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걸 고백한 셈이다. 고립을 자초하는 발언에 호응하는 현실이 그로테스크할 뿐이다. 대구, 경북은 대체 왜 이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