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만인에게 공평한 건 무엇일까? 높은 산일까, 휘영청 비추는 달일까? 어스름 깔려 어둠이 밀려들 무렵, 동녘에 얼굴을 내미는 둥근 달은 얼마나 신령스러운가. 전라 병영성 가는 들길로, 끈질기게 따라붙는 달처럼 신령스러운 월출산이 내내 함께한다. 기운 센 월출산을 끈질기게 끌고 다니는 느린 완행버스가 오히려 멋스러울 지경이다.

▲월출산강진군 병영면, 전라 병영성으로 가는 길 내내 달처럼 계속 따라오던 석양의 월출산. ⓒ 이영천
오늘 보려는 듬직한 체구의 성은, 분노한 동학혁명군 손에 불타버렸다. 그래서인지 허허롭게 텅 비어있는 성안이, 가슴을 짓누르는 돌처럼 무겁기만 하다. 새색시 같은 서문 밖 홍교만 단아하다.
월출산과 수인산이 달걀모양 분지를 이룬 너른 들판은 바라만 보아도 넉넉하다. 들판 한가운데 동으로 흐르는 금강천이 협곡을 뚫고 탐진강으로 빠져든다. 나무보다 낮은 집들이 멋대로 촘촘한 제법 큰 마을 곁에 전라 병영성이 앉았다. 산을 띠처럼 두른 수인산성을 동생처럼 거느리고서 말이다.
장흥 회령포 출신 마천목은 이방원 수족이었다. 두 차례 왕자의 난에서 큰 공을 세운다. 역성혁명 주인공답게 이방원 역시 모반을 두려워하며 경계했다. 특히 군사에 있어선 누구도 믿지 않았다. 상왕으로 물러났어도 끝내 병권만은 세종에게 내주지 않은 데에서 알 수 있다. 그의 통치 원칙이었다.
조선의 지방 군제는 관찰사 본영과 병마절도사 병영으로 나뉜다. 마천목을 전라 병마절도사로 임명한다. 그때 전라병영은 광주 광산에 있었다. 해안에서 먼 거리다. 왜구의 극심한 노략질에 해안은 괴롭기만 하다.
태종 이방원은 고려 말부터 왜구 실체를 적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바다 가까이서 왜구를 막아야 했다. 이에 전라병영을 해안 쪽으로 옮기라 명한다. 마천목을 얼마나 신뢰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병영성(1872년 지방지도, 강진 부분)병영성과 수인산성을 표현한 옛 지도. 네모난 성곽과 주변 도로, 금강천이 잘 표현되어 있으나, 병영성 서문은 그려져 있지 않다.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성터 물색 차 고향 장흥에 이른다. 서쪽 멀리 늠름한 자태의 월출산이 듬직하기만 하다. 만인을 비추는 보름달 같다.
꿈이 알려준 설성(雪城)
여러 곳을 살핀다. 방어에 알맞은 땅을 찾아서다. 추운 겨울, 수인산에 오른다. 동으로 흥양(고흥)과 보성만이, 남으로 강진만과 완도가, 서로는 해남과 진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 100리는 나주다. 사방을 지키기에 안성맞춤이다. 이 주변 어느 곳에 성곽을 앉히겠노라 마음먹는다.

▲북측 성벽병영성 북측 성벽으로, 모서리 치성에서 바라 본 모습이다. 성벽 위 여장과 총안 등이 잘 구축되어 있다. ⓒ 이영천
하지만 일대를 두루 살펴도 맞춤한 곳을 찾기 어렵다. 그러던 어느 날 깜빡 졸았는데 백발노인이 나타나 활을 내주며 시위를 당기라 한다. 힘차게 당긴다. 얼마나 세게 당겼는지, 시위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다. 졸음에 짧게 꾼 꿈이었지만 꼭 실제 같은 느낌이다.
꿈속 화살이 날아간 자리로 가보니 신기하게 화살이 박혀 있다. 마천목은 주변을 살핀다. 편편한 땅이다. 지휘소 동헌이 앉을 만한 기운이 서렸다. 그 자리에서 성 넓이를 헤아려보나,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니 온통 눈이 수북하다. 그런데 남북으로 길게 네모난 땅만 멀쩡하다. 눈 녹은 곳을 둘러 성을 쌓는다.
이런 전설을 지녀 전라 병영성을 설성(雪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동측 성벽사진 왼쪽 부터 성 밖의 해자, 성벽 중간의 치성, 동문 옹성이 차례로 보인다. 멀리 2층 누각의 남문이 보인다. ⓒ 이영천
1417년(태종 17) 축조한다. 임진왜란 후 5년간 병영을 장흥으로 옮겼다가 성곽 수리 후 되돌아온다. 1894년 12월 10일(음) 동학혁명군에게 함락되기까지 전라도 53주 6진을 500년간 총괄한 육군 지휘부다. 그때 폐허가 되고 이듬해 영이 폐지되면서 군사 기능과 명성마저 모두 잃고 만다. 갑오경장이란 허울로, 경복궁을 침탈한 일제가 앞세운 꼭두각시 김홍집 내각에 의해서다.
네모진 육중한 성곽
높다랗고 굳건해 보이는 성벽에서, 듬직한 사내 뒷모습이 연상된다. 사방으로 웅장한 대문은 둥근 옹성(甕城 : 성문 앞이 가리게 빙 둘러쳐 쌓은 성벽)을 두르고 문루를 얹었다. 남문 문루는 2층이다.

▲동문전라 병영성 동문의 누각과 옹성. ⓒ 이영천
성벽 4각 모서리와 동·서 벽에 2개씩 치(雉 : 돌출된 성벽)를 두었고, 성 전체를 빙 둘러 해자를 팠다. 남·서쪽에 배수시설을 두었다. 성벽은 평지 읍성과 진성 등에 일반적으로 적용된 축조 방법이 잘 구현되어 있다.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성곽은 둘레가 1060m(높이 3.5m, 면적 9만 3139㎡)이다.
을묘(1555)년 5월, 왜구가 해남 달량진성(북평면 남창리)으로 침범해 온다. 당시 전라 병마절도사 원적이 출전했으나 장흥 부사 한온 등과 전사하고, 영암 군수 이덕견이 사로잡히는 등 사태가 매우 긴박했다. 엄청난 왜구의 기세에 영암·강진·진도 일대가 쑥대밭이 되고, 해안 10개 진성이 함락당한다. 수많은 백성이 죽고, 방어시설 곳곳이 점령당해 무너져내린다. 을묘왜변이다. 이때 병영성도 함락되어 크게 훼손된다. 임진왜란 직전인 1581년까지에 대대적인 수축이 불가피했다.

▲서문과 월출산2024년 10월 기준, 수리 중인 전라 병영성 서문과 멀리 보이는 월출산 자태. ⓒ 이영천
병영성은 인근 4개 면의 관청이기도 했다. 객사를 비롯해 동헌과 내아, 군기고 등 각종 공공건물이 즐비했다. 육군 병영성답게 성안에 9개의 우물과 5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우물은 성의 필수 시설이다. 특히 공성전이 벌어지면 그 중요성은 배가한다. 물이 없어 어떤 곤궁에 처했는지, 정유재란 때 울산 왜성에 갇힌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하멜 억류기
하멜은 세계사에 영욕으로 기록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직원이다. 하멜이 탄 배가 나가사키를 오가는 무역선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풍부한 일본의 은(銀)을 주요 품목으로 취급했음을 알 수 있다. 가톨릭 국가와 달리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는 선교에 관심이 없었다. 이는 위협 요소가 아니었기에 에도막부는 교역을 허락한다. 청나라 속국으로 치부된 조선에 그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고, 따라서 무척 생소한 나라였다.
1653년 8월 나가사키로 가던 배(스페르베르호)가 풍랑을 만나 제주 앞바다에서 침몰한다. 64명의 선원 중 하멜을 포함 36명이 모슬포에 표착 한다. 제주 부사는 이들을 광해군 유배지에 10개월간 감금하며 감시한다.
이듬해 5월 서울로 호송되어 임금(효종)을 만나 훈련도감 군인으로 배속된다. 조선으로선 예우했으나, 그들은 달랐다. 조선을 야만으로 여겼을 개연성이 높다. 청나라 사신을 통해 탈출을 시도하려다 발각된다. 죽이니 마니 논의 끝에,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어 7년(1656∼1663)을 보낸다. 바로 병영성에서다.
심한 흉년이 들자 이들은 각지로 흩어진다. 여수로 이송된 하멜은 1666년 9월 동료 7명과 작은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한다.

▲하멜 동상전라 병영성 동문 밖 병영면 소재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에 있는 동상. ⓒ 이영천
무역선 기록관(서기)이던 하멜의 투철한 기록 정신이 책으로 남았다. 조선에서 14년간 억류 생활을 기록한 보고서는 사실 동인도 회사에 제출한 임금청구서이기도 했다.
조선의 존재를 유럽에 소개한 최초 문헌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1668년 네·영·불·독어로 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된다. <하멜 표류기>는 그런 의미에서 '하멜 억류기'가 더 적확해 보인다.
다소 과장이나 왜곡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조선의 생활·군역·형벌·구금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정확한 지명과 각 지방의 풍속은 물론 지리·풍토·산물·경관·법률·교육과 상업 등도 세세하다.
병영면에 이들 흔적이 남았다. 납작한 돌을 빗각으로 세워 쌓은 돌담이다. 또한 극소수 후손의 '병영 남씨' 시조가 당시 네덜란드인이란 학설도 있다.
도시 기원으로의 요새
유럽 유수 도시의 기원은 로마 군사 요새인 카스트룸(Castrum)이다. 요새화한 수천 개 카스트룸이 지역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였다. 교역을 통해 상업 도시로 발전해간 퀼른(Köln) 등 라인강 변 도시들이 대표적이다. 런던 모태인 론디니움(Londinium)은 물론 파리의 씨테 섬과 베를린도 예외는 아니다.

▲남문옹성을 두른 2층 누각의 늠름하고 웅장한 병영성 남문. ⓒ 이영천
병영성도 글자 그대로 요새였다. 로마의 그것과는 성격이 달랐으나, 격자형 가로망에 충분한 배후 생산기능을 품고 있었다. 더구나 지리적 입지 여건도 훌륭하다. 다만, 교역이 상당히 열악했다. 노략질만을 일삼는 왜구의 존재 때문이다. 이는 병영성이 상업 도시로 성장할 어떤 실마리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저 폐쇄적인 군사 기능에 현상 유지에 급급한 농업이 기반산업일 뿐이었다.
가끔 생각나는 맛있는 음식처럼, 전라 병영성이 문득 그리워질 때가 있다. 각 문루를 고쳐 세운 게 얼마지 않았고, 이제야 서서히 복원의 삽을 뜨고 있는데도 말이다.

▲북문병영성 4대 문 중 가장 정갈해 보이는 북문의 모습. ⓒ 이영천
역사의 슬픔을 한가득 안은 동학혁명 최후의 격전지여서일까? 영영 나를 잊었을 첫사랑처럼 성은 기억 저편의 한 자리를 늘 차지한다.
텅 빈 채 복원되지 않아도 좋다. 2024년 여름처럼 성벽 한쪽이 조금 무너져도 괜찮다. 만인을 비추는 달처럼, 성은 만백성을 지키다가 스러졌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