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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2 09:22최종 업데이트 25.01.02 09:24

이 작가가 사할린 죄수들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

안톤 체호프의 논픽션 <사할린 섬>과 공감 능력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가 쓴 논픽션 <사할린 섬>을 읽었다. 유형지 사할린의 실태와 유형수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혹한의 날씨에 황량한 벌판, 사람이라곤 소수 원주민과 유배되어온 죄수들 뿐인 그곳에서 체호프는 인구통계 조사표를 작성하고 유형지의 생태및 원주민의 풍습도 상세히 기록했다. 조사에 응한 죄수들이 성의없이 답변해 통계조사는 허술한 결과를 낳았지만, 유형수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귀중한 역사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출간은 2013년, 2025년 현재 출판사/제작사 유통은 중단된 상태다).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 동북아 역사재단 번역총서 33,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은이)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 동북아 역사재단 번역총서 33,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은이) ⓒ 동북아역사재단

사할린이란 이름은 1710년 청나라 강희제의 명을 받은 프랑스 선교사가 사할린 서쪽 해안을 사갈리엔-앙가타(Saghalien-angahata)라고 지도에 표기한 데서 유래되었다. 만주어로 '검은 강의 암벽'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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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에 돌도끼, 돌칼 등 석기시대 흔적이 남아있는 걸 보면 이렇게 추운 곳에서도 인류가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살았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북부에는 길랴크족이, 남부에는 아이누족이 살고 있었다.

사할린 날씨는 대체로 나쁘다. 오오츠크해의 한류와 빙하조각이 섬으로 흘러들어 6월에도 무자비한 추위가 가시지 않고 눈비가 많이 내려 습도는 지나치게 높다. 이런 날씨는 사람을 우울하게 한다. 몇 주일 혹은 몇 달씩 해를 못 보면 삶에 대한 의지를 잃게 마련이다. 월평균 최저기온(1월, -18.9도)과 최고기온(8월, 17도)을 고려하면 연평균 기온은 0도에 가깝다.

 사할린 풍경
사할린 풍경 ⓒ 홍윤정

사할린에 유형온 죄수들 대부분은 중범죄를 저지른 자다. 그러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고르라는 선한 죄수 이야기를 통해 체호프는 유형제도의 허술한 실태를 알리고 있다.

예고르는 배운 것 없는 순박한 농민이다.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유형 선고가 내려지자 집사람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다가 죄수 호송선을 탔다. 노브고로드에서 몸에 족쇄가 채워지고 머리는 삭발되어 오데사에서 터키배를 타고 사할린까지 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예고르는 한 장교 숙소에 매일 들러 궃은 일을 하고 간다. 장교를 존경해서다. 5년 뒤 형기가 끝나는데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아내와 아이들은 고향에서 잘 지내기 때문이다. 단, 아이들이 영특하지 못해 매일 밤 하나님께 기도 드린다. 아이들을 영특하게 해달라고.

두이카 강에서 사각 나룻배를 젓는 한 유형수는 이름을 기억 못 하는 잘 생긴 남자로 통한다. 71세, 곱사등에 어깨뼈는 튀어나오고 갈비 한 대가 부러졌으며 엄지 손가락 하나는 절단되고 온 몸에 매질을 당한 흔적이 가득하다.

그는 사람을 기분좋게 바라보는 맑은 하늘색 눈동자를 소유했다. 맨발에 누더기를 걸쳤지만 생기 넘치고 수다스럽다. 1855년 어떤 '멍청한' 이유로 탈주했다가 붙잡히기를 반복해 유형수로 산 지 22년째다. 그가 저지른 죄목은 탈주, 그것 뿐이다.

유형수에게 바다는 탈주를 방해하는 큰 장애요소다. 물론 통행이 불가능한 타이가(침엽수림), 지독한 습기와 안개, 곰, 추위와 눈보라 등도 탈주를 막는 요인들이다. 그럼에도 탈주는 끊이지 않고 되풀이 된다.

붙잡힐 줄 알지만 한 달이나 일주일 자유롭게 다니고 싶어 탈주하거나, 단 하루라도 온전한 내 시간을 갖고 싶어 탈주하는 유형수도 꽤 있다. 탈주를 막아낼 방법은 아예 없는 걸까. 체호프는 죄수들이 좀 더 나은, 인간적인 환경에서 생활하면 탈주 시도는 줄어들 것이라 제안하고 있다.

"코르사코프 지구에서 탈주가 적은 이유는 이곳이 다른 지역에 비해 수확이 풍요롭고 죄수들은 단기수가 많기 때문이다. 기후가 온화해 농사짓기가 수월하니 농민 신분을 획득하기도 쉽다. 형을 마치더라도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탄광으로 되돌아 갈 필요가 없다." -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배대화 옮김, 동북아역사재단, 484쪽

총독 관사의 저녁 만찬에 초대된 체호프는 사할린에 파견된 러시아 관리들과 인사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만찬이 시작되자 총독이 건배사를 했다. 그는 공치사하듯 이렇게 덧붙였다.

"사할린에 온 '불행한 사람들'은 러시아 어느 곳에서보다 편하게 지낸다고 확신합니다. 이곳엔 종신형도 없고 무기징역도 20년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강제노역도 쇠사슬도 감시병도 삭발한 자도 없습니다." -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배대화 옮김, 동북아역사재단, 150쪽

총독은 체호프를 따로 불러 자신이 말한 모든 것을 기록해달라고 부탁했다. 제목은 '불행한 자들의 삶의 기록'으로 하자는 제안과 함께. 총독은 사할린 유형수들이 인간대접을 받으며 잘 지낸다고 믿는다. 대체 어떤 근거로 그런 오판을 하는지 알 길은 없지만, 체호프는 총독이 불행한 자들의 삶을 하나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사할린'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탄광을 운영하는 한 민간회사가 있다. 1875년부터 24년간 탄광채굴 권한을 러시아 정부로부터 따내 매일 400명 이상의 징역유형수를 탄광에서 일하게 한다. 유형수들이 채굴한 석탄을 정부가 사들여 회사는 막대한 이익을 내지만 유형수들에겐 한 푼도 지급하지 않는다. 회사대표 5인은 페테르부르크에 살고 사할린엔 코빼기도 안보인다.

탄광의 열악한 작업환경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쓰기도 괴롭다고 체호프는 토로했다. 무지막지한 환경이 인간을 생지옥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탄광에서 싸움이 벌어져 죽어가는 죄수를 무심히 쳐다보는 의사에게 체호프가 물었다. "진정제를 한두 방울만 투여해도 괜찮아질텐데요?" 동행한 의사가 답했다. "이곳에서는 아무 치료도 하지 않는 게 바로 의료조치요." 의사는 유형수를 무엇으로 생각하는 걸까.

책읽기를 잠시 중단하고 체호프가 자주 언급한 차가운 밤바다, 적막한 어둠속에 부서지는 파도소리, 등대, 검푸른 타이가숲을 머릿속에 그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숨이 자주 막히고 답답해지는 통에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서다.

체호프는 왜 굳이 위험한 유형지에 가서 힘들게 유형수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기록했을까? 그렇게 해서 얻을 이득이 뭐라고? 책을 덮고 책 내용을 하나씩 복기해보았다. 체호프가 무언가를 나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형수들을 외면하는 러시아 주요 인사들, 공감 능력을 상실한 인간들을.

"러시아의 법조인들은 대학에서 달달 외운 법률지식으로 시험에 패스해 그 바닥에서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 아무 생각없이 기계적으로 판결을 내린다. 이들은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어디로 가는지, 왜 가야 하는지, 시베리아가 어떤 곳인지 아무 관심도 없다." -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배대화 옮김, 동북아역사재단, 90쪽

체호프는 러시아의 내로라 할 고위관리, 의사, 기업가, 법조인 같은 이들이 사회 밑바닥 인생들의 처지에 얼마나 무지한지 알리고 싶었던 걸까? 동물행동학자 최재천 교수(이화여대 석좌교수)의 한 인터뷰 기사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프란스 드 발의 책 <공감의 시대>를 번역하다 보니 침팬지 같은 유인원뿐 아니라 쥐 같은 작은 동물들도 동료의 신음소리를 들으면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때 하나 깨달았습니다. 요즘 '공감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들 하는데, 공감은 이미 본능적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공감 능력은 기르는 게 아니라 무뎌지는 겁니다. 저도 불쌍한 아이들 돕자는 프로그램 보면 같이 울어야 하는데 그만 마음이 불편해져 채널을 돌려버리고 맙니다. 공감 본능이 무뎌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타고난 본성인 공감능력이 왜 무뎌지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기심 때문이다. 체호프는 "작가의 역할은 상황을 진실하게 묘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위험을 무릅 쓰고 유형지를 찾아간 체호프의 의도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쥐처럼 작은 동물도 동료의 신음소리를 들으면 괴로워한다는데, 우리가 인간이라면,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척 해서야 될 말인가.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도 체호프가 기록한 유형수들의 신음소리를 내가 들었기 때문일 터다.

2024년 연말에 일어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또 마음이 아프고 답답하다. 먼 길 마다 않고 달려가 봉사하는 우리 시민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2025년 새해, 더욱더 동고동락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다짐해본다. 같이 아파하고 고통을 감소시킬 방법을 찾는 것, 우리가 살면서 계속 간직하고 실천해야 할 본성이리라.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은이), 배대화 (옮긴이), 동북아역사재단(2013)


#안톤체호프#사할린섬#유형지#유형수#공감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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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정 (arete) 내방

미술애호가, 아마추어화가입니다. 미술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씁니다. 책을 읽고 단상글을 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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