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모임 후 친구가 모임에서 찍은 단체 사진을 보내왔다. 그런데 사진 속의 내가 어쩐지 예쁘다. 주름도 없고 피부에는 잡티 하나 없다. 알고 보니 보정 카메라(어플)로 찍은 것. 피부과에 가지 않아도 이렇게 손쉽게 예뻐질 수 있다니. 사진 속의 사람들은 모두 시간을 거슬러 20대로 회귀했다. SNS 사진이 다 예쁘고 화려한 이유였다.
여기, 사진 보다 더 리얼하게, 감추고 싶은 주름뿐 아니라 인물의 정신세계까지 파고들어 꿰뚫어 그린 화가가 있다. 바로 루시안 프로이드다. 성이 낯설지 않다. 맞다. 바로 정신분석학자 시그문드 프로이트의 손자다.
그는 독일에서 태어나 1933년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이주해 전후 영국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레온 코소프(Leon Kosoff), 프랭크 아우어바흐(Frank Auerbach) 등과 함께 이른바 '런던 파'(School of London)로 분류되는 작가다.
그의 조부가 인간이 감추고 싶어 하는 내면, 무의식까지 꿰뚫으려 했듯이 루시안 프로이드도 그의 이젤 앞에 앉거나, 누워 있는 인물의 민낯을 넘어 그 정신까지 담아 내려했다. 자신의 자화상도, 설사 앞에 앉은 인물이 영국 여왕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과, 루시안 프로이드가 그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초상화를 비교해 보자.
주름 하나 없는 초상화, 현 시대의 'SNS 사진'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 1575 ⓒ 위키피디아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는 우리 시대 'SNS 사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부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분을 발랐고, 주름하나 없다.
그녀가 들고 있는 시들지 않는 장미처럼, 실제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는 그려진 시기와 상관없이 20대 같다. 그녀의 초상화는 꽤나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것으로 다른 나라의 귀족들에게 보내져 강건하고 노쇠하지 않는 대영제국의 이미지, 그 자체였다.

▲엘리자베스 2세 초상, 루시안 프로이드, 2001 ⓒ 게티이미지
반면 루시안 프로이드가 그린 엘리자베스 2세는 어떠한가. 여왕의 깊게 파인 팔자 주름, 화난 듯한 이마 주름, 꾹 다물어진 입술. 이 초상화를 보고 있으면 아무리 여왕이라도 인생의 고통을, 세월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느껴진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는 살아 있는 생명의 피해 갈 수 없는 세월을 더 부각할 뿐이다. 2001년 공개된 후, "150년 만에 최고의 초상화"라는 비평부터 여왕이 키우는 웨일스 산 "코기 개"같다는 조롱까지, 이 초상화는 극과 극의 반응을 오갔다.
정작 여왕은 언제나처럼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여왕에게 위엄과 권위의 필터를 끼우기 원했다면, 루시안 프로이드에게 초상화 의뢰를 하지도 않았을 터. 영국의 또 다른 리얼리스트 화가 그레이엄 선더랜드(Graham Suntherland)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자마자 화를 참지 못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작품을 불 태워 버린 것과 대조된다. 반면 루시안 프로이드가 여왕을 그린 이 작품은 2023년 내셔널 갤러리에서 <루시안 프로이드: 새로운 시각> 전시 당시 찰스 3세 왕이 대여를 허락해, 많은 대중도 볼 수 있었다.
프로이드의 작업은 수십 시간, 수백 시간의 관찰과 작업을 요구한다. 그는 꾸미지 않은 본래 상태 그대로를 추구하며 긴 시간에 걸쳐 모델을 바라보면서 '진실'에 다가간다. 빠르게 찍어서 필터를 덧입히고, 다리를 늘리는 요즘 우리가 '찍어서 올리는' 이미지와는 정 반대의 것을 추구한다.
반면 '필터 카메라'만으로 셀카를 찍는다면, 진실에는 점점 멀어진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더 이상 내가 아는 내가 아니다. 거울속 자신의 모습에서 오히려 인지 부조화가 생기는 것이다.

▲데이비드 호크니를 그린 루시안 프로이드, 2002년. ⓒ Brigeman Images
프로이드가 그린 호크니를 보자. 이 작품이 완성 되기 까지 호크니는 총 120시간을 모델로 앉아 있었다고 한다. 젊었을 때 생기 발랄하고, 도시적, 세련된 이미지를 뽐냈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도 육체의 피로함을 감출 수 없다. 얼굴의 살은 쳐졌고, 빛나던 금발은 힘없이 늘어졌다. 그러나 호크니의 눈빛 만큼은 날카롭고 강인하다. 그림 속 호크니가 숨 쉬는 듯 하다.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자,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앞에 있는 대상에 집중하는 것, 오랜 시간 관찰하는 것, 두꺼운 더께를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10년 어리게 나온 사진보다, 거울 속 내가 더 소중한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