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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낙안들판 읍성 뒤 금전산 자락에서 바라 본 낙안들판. 한가운데 둥근 옥산과 멀리 왼편에 삼각의 뾰족한 벌교 부용산이 아련하다. 촬영 시점은 지난 2024년 가을.
낙안들판읍성 뒤 금전산 자락에서 바라 본 낙안들판. 한가운데 둥근 옥산과 멀리 왼편에 삼각의 뾰족한 벌교 부용산이 아련하다. 촬영 시점은 지난 2024년 가을. ⓒ 이영천

낙안읍성 가는 길을 벌교에서 잡았다. 제석산과 부용산 사이로 힘겹게 벌교천이 빠져나가고, 옆 노강산이 끼어들어 연꽃 같은 낙안 들판을 떠받치고 있다.

엎어 놓은 밥사발 모양의 둥근 옥산(玉山)이 객을 반긴다. 멀리 북쪽에 준수한 젊은이 같은 산 셋이 읍성을 호위하듯 꼿꼿하다. 오봉산과 금전산이 뒷배라면, 백이산이 성의 앞길을 열고 있다. 벌판과 산자락, 흐르는 물길로 보아 이 땅이 한강수가 흐르는 곳에 자리했다면, 필시 조선의 서울이 되었으리라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단박에 알아보겠다.

동문 해자를 건너는 돌다리 앞에 얼굴이 뭉개진 3마리 석구 표정이 오묘하다. 기가 센 주변 산세를 다스리고 정유재란 때 수도 없이 죽어간 왜군 원혼의 침범을 막고 있다던가. 안내소 직원의 친절한 웃음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성벽을 돌아보고 골목에 들어, 흙담에 비취는 햇살에서 잃어버린 내 유년의 정취를 꺼내어 만끽하리라.

동문 앞 석구 얼굴이 뭉개진 오묘한 표정의 3마리 석구. 주변 거친 산세를 억누르고, 정유재란 당시 죽어간 왜적의 원혼이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앉혔다고 한다. 촬영 시점은 지난 2024년 가을.
동문 앞 석구얼굴이 뭉개진 오묘한 표정의 3마리 석구. 주변 거친 산세를 억누르고, 정유재란 당시 죽어간 왜적의 원혼이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앉혔다고 한다. 촬영 시점은 지난 2024년 가을. ⓒ 이영천

성벽과 성안

동문에 오르니 성안이 평화롭다. 유유자적 느리게 걷는 사람들 표정에 고즈넉한 읍성 분위기가 가득하다. 옹성에서 사방을 둘러본다. 정유재란 후 무기를 고려하면, 방어에 최적인 성을 쌓았음을 한눈에 알아보겠다.

읍성 안 길 동문 문루에서 바라 본 동문-서문을 잇는 길. 사람들 걸음과 표정이 평화롭다. 촬영 시점은 지난 2024년 가을.
읍성 안 길동문 문루에서 바라 본 동문-서문을 잇는 길. 사람들 걸음과 표정이 평화롭다. 촬영 시점은 지난 2024년 가을. ⓒ 이영천

쭉 뻗은 북벽으로 걸음을 옮긴다. 조밀한 초가 몇이 도란거린다. 직각으로 성벽이 꺾인 자리에 밖으로 불거진 치(雉)를 두었다. 거기서 다시 성벽이 곧다. 그 안에 객사가 있고 텅 빈 땅을 건너 동헌과 내아가 붙어 앉았다. 남문까지 이어진 흙길과 초가가, 가지런한 객사 기와지붕과 대조를 이룬다. 동헌을 지나니 성벽이 둥글게 휘어 나간다. 쉬엄쉬엄 걸었어도 서문이 금방이다.

각진 서문 옹성이 반쯤은 잘려 나갔다. 문루 없는 서문이 그래서 더 개방적으로 보인다. 이륜차와 발길이 무시로 길을 채웠다간 비워낸다. 성벽을 내려와 동-서문을 잇는 길에 든다. 동헌 앞, 키 큰 느티나무 품이 넉넉하다. 억울한 송사가 저 관아에서 많이 누그러졌을까? 모형으로 만들어진 인형은 무슨 죄로 허리가 납작할까. 이웃한 내아가 정갈하다.

낙안읍성 조감 가을 걷이가 끝난 평화로워 보이는 낙안읍성의 만추(滿秋). 뒷편 높은 금전산이 성을 호위하는 듯 하다.
낙안읍성 조감가을 걷이가 끝난 평화로워 보이는 낙안읍성의 만추(滿秋). 뒷편 높은 금전산이 성을 호위하는 듯 하다. ⓒ 국가유산청

남문으로 이어지는 골목이 겹친다. 커다란 노거수가 병풍처럼 감싼 자리는 그래서 삼거리다. 읍성 유일의 결절점이다. 이런 곳이면 어디나 장사하는 집 자리다. 낙안읍성도 예외 없이 밥집이다.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거리는, 이 집에서 맛보았던 미각이 되살아난다.

공터를 지나니 홍살문을 앞세운 객사다. 여느 객사와 다를 바 없으나, 좀 아담하다고 느낄 만큼 권위적이지 않다. 객사 앞에 정유재란 후 낙안읍성을 재건했다는 '임경업' 장군을 기리는 비각이 서 있다. 급변하는 명·청 교체기에 비운의 삶을 마감했던 그의 곧은 품성이, 낙안읍성 성곽에 그대로 구현되었을까? 찬찬히 살피며 걸었어도, 순식간에 길의 끝이다. 조그마한 아이스크림 가게가 정겨워 보인다.

벽안의 이국인

다시 동문에 올라 남벽을 향한다. 구부러진 치성에서 바라본 풍경이 따스하다. 성벽에서 벽안의 이국인을 만났다. 벨기에에서 왔다는 부부가 왜 낙안읍성까지 이르렀을까? 혹시 도시나 건축을 공부하였을까? 서툰 영어로 말문을 튼다. 예상했던 추측이 맞았다. 마침 연지를 지나는 길이다. 성안에 연못과 우물의 존재가 왜 중요한지를 공감한다.

여행의 경위를 묻자, 조선의 도시 원형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단다. 그러면서 초가지붕이 무척 신기한가 보다. 탈곡한 벼가 어쩌고 쌀이 저쩌고, 그걸 이용해 두껍게 지붕을 만드는 자연에서 얻는 구구절절 설명했으나, 그들이 잘 이해 했는지는 난망이다.

성안에 왜 부잣집이 없느냐고 묻는다. 역시 도시에 깊은 안목을 가졌음을 알아보겠다. 서양과 다른 조선의 부르주아에 대해 간명하게 설명해 본다. 특히 귀족(양반)이 토착 세력으로 누렸던 권위와 권세를 설명해 보지만, 이해하지 못했는지 표정이 뚱하다.

낙안 옛 지도(187년 지방지도) 지도 아래가 벌교로 남해로 빠지는 물길을 잘 나타냈다. 연꽃모양 낙안벌판과 지금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낙안읍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낙안 옛 지도(187년 지방지도)지도 아래가 벌교로 남해로 빠지는 물길을 잘 나타냈다. 연꽃모양 낙안벌판과 지금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낙안읍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성안 시민이 부르주아로 성장한 서양과 아시아적 봉건사회 변형이라는 차이를 모르면 이해할 수 없으니, 당연한 귀결이다. 토착 귀족인 조선 양반은 서양 영주처럼 장원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강력한 왕권에 기생하였으니, 뺏어 갈 적도 없었다. 따라서 농민을 직할 군사로 부릴 필요도 없었다.

이는 왕과 나라의 일이었기에, 왕의 대리인으로 내려 온 수령이나 군수 등과 수평 관계에서 토착적 권위와 권력만 지키면 되었다. 굳이 성안으로 들어와 수령의 보호 아래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향교와 사직단 등 권위가 표징인 시설들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성밖에 두었다.

이들 부부와 이상도시는 물론 인공지능이 지배할지 모르는 미래도시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적정한 인구 규모는 얼마여야 하는가? 고속의 교통수단이 확장을 촉진할까?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를 뛰어넘는 에큐메노폴리스(ecumenopolis, 세계도시)까지 시공을 넘나든다. 그사이 남문을 지난다. 초가지붕을 덧댄 비닐에 대해서도 궁금증 연발이다.

읍성 조망점 남벽과 서벽이 교차하는 지점의 낮은 산에서 본 낙안읍성. 우측 하단, 벽안의 벨기에 부부가 느리게 걷는 모습이 보인다. 촬영 시점은 지난 2024년 가을.
읍성 조망점남벽과 서벽이 교차하는 지점의 낮은 산에서 본 낙안읍성. 우측 하단, 벽안의 벨기에 부부가 느리게 걷는 모습이 보인다. 촬영 시점은 지난 2024년 가을. ⓒ 이영천

읍성 서쪽 낮은 산등성이에서 쉼을 한다. 이곳이 읍성 제일가는 조망 점(view-point)이라며 감탄한다. 성벽에 붙여 지은 집들을 궁금해한다. 성곽을 품은 도시가 확산해 나가는 원형임을 금방 이해한다. 우리 도시 어디에나 있는 서문시장, 남문시장의 원형이라는 설명에 무척 흥미로운 반응을 보인다. 결국 집적이다. 사람이든 재화든 자본이든 집적된 모든 것들이 만들어 내는 게 도시다.

낙안읍성

이제 골목이다. 지형과 필지를 따라 구불구불 꺾인 골목이 재미있다. 꺾어지는 곳마다 뭐가 나올까 걷는 재미와 변화가 맛을 더해준다. 명창이며 하급 관리, 주막에 감옥까지 빙 둘러본다. 성벽에서보다 부부의 표정이 더 상기된다. 마치 조선의 어느 골목을 거니는 느낌이란다. 남문에 이르러 성벽에 올라 구부러진 골목을 가늠해 객사 앞에 이르니 동문이 지척이다.

낙안읍성 조감(1990년 이전) 객사 옆에 낙안초등학교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1990년 이전 낙안읍성 모습이다. 곳곳에 초가가 아닌 개량지붕을 가진 집들이 보인다.
낙안읍성 조감(1990년 이전)객사 옆에 낙안초등학교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1990년 이전 낙안읍성 모습이다. 곳곳에 초가가 아닌 개량지붕을 가진 집들이 보인다. ⓒ 국가유산청

낙안읍성은 옛 지도 그대로다. 한때 객사 옆에 초등학교가 있었고, 남문으로 이어지는 'T'형 가로 결절점에 작은 시장이 있었다.

동문을 나서며 벽안의 부부와 헤어진다. 같이 걸은 짧은 시간 참으로 많은 이야길 나눴다. 언어 장벽이 조금만 낮았더라면, 더 많은 생각을 주고받지 않았을까. 해자를 건너니 안내판이 즐비하다. 임경업과 이곳 옥산마을 태생인 김빈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낙안읍성 역시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김빈길 장군 요청으로 태조 6년(1397) 쌓은 흙 성을, 세종 6년(1424)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성으로 바꿔 쌓으며 영역을 넓혔다고 실록은 기록한다.

직사각형 읍성은 둘레 1,468m, 높이는 3∼5m다. 옹성을 갖춘 동문과 남문에 누각이 얹혀 있고, 서문은 열린 옹성이다. 북문은 없으며, 큰 가로는 동-서문을 잇는 긴 길에서 남문으로 향하는 삼거리가 기본이다.

동벽 동문 옹성에서 바라 본 동벽과 금전산. 직사각형에 가까운 성 모양을 잘 보여주는 성벽의 일부이다. 촬영 시점은 지난 2024년 가을.
동벽동문 옹성에서 바라 본 동벽과 금전산. 직사각형에 가까운 성 모양을 잘 보여주는 성벽의 일부이다. 촬영 시점은 지난 2024년 가을. ⓒ 이영천

옛 모습 그대로 주민이 실생활 하는 성은 우리 전통과 풍속, 문화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다. 거주민의 주업은 공예와 점포, 농사와 민박이다. 그런 측면에서 수백 년을 이어온 초가집은 근본이 다른 전통이다. 옛 가옥의 맥은 물론 전라 동부의 마을과 성읍 공간구조 연구에도 독보적인 가치가 있다.

새처럼 하늘에서 읍성을 내려다보면 우리 정서의 고향이 어딘지 확연히 알 수 있다. 산등성을 닮은 초가는 우리 심성 안에 간직되어 있는 부드러운 곡선의 원형이다. 초가지붕 위에 하얀 박이라도 달렸다면, 달 뜨는 보름날이 연상되는 정서의 절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낙안읍성에서 잃어버린 고향을 찾은 기분이다. 좀처럼 찾기 힘든 초가지붕은 순박한 유년의 심성으로 나를 이끌고 간다. 햇살 품은 흙 돌담은, 할머니가 건네준 조청 바른 다디단 백설기를 다시 손에 쥔 느낌이다.

살아간다는 건 그런 것인가 보다. 상상으로 그려낼 수 있는 최고의 편안함을 주는 길에 접어드는 일. 낙안읍성 굽은 골목이 꼭 그런 길이었다. 순천 낙안읍성에서 편안한 자장가를 들으며 스르르 잠드는 감상에 젖어 보았다.

#낙안읍성#부르주아#이상도시#임경업#김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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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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