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아홉살 때부터 직장 생활을 했다. 햇수로 30년이다. 짧은 기간의 계약직을 제외하면 정규직으로 세 번 이직을 했다. 이직할 때마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원만하게 지냈다. 물론 함께 일을 하면서 모든 게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맡은 업무로 갈등도 있었고 오해도 있었다. 인간적인 갈등도 있었다. 하지만 이직할 때는 그동안의 열정과 노력에 대한 위로와 격려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렇지만 가장 최근에 다녔던 회사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퇴사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한 장면 ⓒ JTBC
퇴사 후 다섯 달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퇴사한 회사의 후임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처럼 업무 관련 전화가 아닌, 상당히 떨리고 분노가 섞인 목소리였다.
"김 실장님, 저 9월 말까지만 하고 여기 그만둘 거예요."
"네?"
"정말 힘들어서 더는 못 참겠어요."
퇴사한 직장의 후임이 전임자에게 전화해 자신의 퇴사를 알리는 상황이 조금 놀랍고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을 했기에 그의 퇴사 소식이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후임과 1시간 30분 정도 통화를 했다. 후임은 지난 5개월 동안 회사 대표인 A에게 받았던 스트레스를 쏟아냈다. 그의 이야기는 내가 1년 4개월 동안 일하면서 겪은 일들을 압축해놓은 듯했다.
자기 빌라를 사라던 대표
A는 내가 1년 4개월 동안 일을 했던 회사의 대표다. 회사는 정규직과 계약직을 포함해도 열 명이 되지 않는 소규모다. 나는 경력직으로 입사했다. 입사 후 처음 몇 달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A는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었다며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잔금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A는 은행과 지인들에게 대출을 알아보러 다녔다. 하지만 여전히 잔금이 부족했다. A가 살던 빌라도 부동산에 내놓았지만 팔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A는 내게 그의 빌라를 사라고 권유하기 시작했다.
"김 실장이 우리 빌라 사는 거 어때?"
"네, 제가요?"
"우리 빌라 살기 좋아. 주변 환경도 깨끗하고. 한 번 생각해 봐."
나는 전세로 살고 있다. 집을 살 여유도 생각도 없었다. A에게도 명확히 말했다. 처음엔 A의 말이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내가 결심만 하면 오늘 당장이라도 계약할 만큼 진심이었다. 나는 A에게 빌라를 사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압박감이 심했다. 나중엔 옆에서 듣고 있던 직원(대표의 친척)조차 "대표님 그만 하세요. 실장님 스트레스 받아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내가 이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A에게 받았던 가장 약한 스트레스였다.
무너지는 자존감
일하는 동안 A의 업무 지시와 방식에서 여러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들이 있었다. 법적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수 있는 사안도 있었다. 회사 생활이 다 그런거니 참을 것은 참고 이해할 것은 이해하면서 내게 주어진 업무를 했다. 그러던 중 직원들의 근태 건으로 A와 갈등이 있었다. 나도 잘못이 있었고 A도 잘못이 있었다. 근태 문제는 임직원 모두 잘못이었다. 그런데 A는 자신과 다른 정규직 직원(친척)의 잘못은 문제삼지 않고 내 근태만을 문제 삼았다. 그 문제로 직장 생활 처음으로 시말서를 썼다. 그 뒤로 A의 은근한 무시와 조롱, 뒷담화가 이어졌다. 그나마 위안은 A의 뒷담화 대상은 그의 친척 직원 포함 누구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퇴사하겠습니다."
이곳에서 일을 할수록 나의 자존감은 무너졌다. 이전 직장에서 십오년 가까이 장기 근속을 할수 있었던 것도 돈 보다는 일을 하면서 얻는 성취감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퇴사를 결정했다. 한 달 뒤 내가 맡고 있는 중요한 업무가 있었지만 A의 무시와 조롱, 뒷담화, 그리고 과도한 업무지시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내 무너지는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번엔 무책임해지기로 했다. 문제는 남은 연차 사용건이었다. 남은 연차가 8.5개였다. A는 내가 사직서를 쓰기 전까지는 연차를 요청할 때마다 승인해 주었다. 하지만 내가 퇴직의사를 밝힌 뒤로 남은 연차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대표님 연차 사용은 제 권리입니다. 내일은 신청한 교육이 있어서 꼭 연차를 써야 합니다."
"김 실장, 맡은 일을 다 하고 연차를 쓰세요. 그동안 연차를 승인한 건 배려 차원이었지 꼭 줄 필요는 없었어요. 내일 연차를 쓰려면 오늘 철야라도 하고 쓰세요.

▲연차사용A는 나의 연차를 승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단 결근 처리했다 ⓒ 김인철
내가 맡은 업무를 다 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건 관점의 차이다. 나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A는 내가 한 업무를 탐탁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업무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노동자로서 당연히 쓸 수 있는 연차를 못 쓰게 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나는 다음 날 신청한 교육이 있었기에 연차를 쓰겠다고 했다. 하지만 A는 결국 나를 무단결근 처리했다. 그리고 마지막 급여 명세서에는 그날의 임금과 주휴수당이 빠져 있었다.
"경력자라고 해서 뽑았더니 문서도 하나 제대로 만들지도 못하면서. 실습생 보다도 못하네..."
퇴사를 하고 나서도 직장 생활의 후유증은 오래갔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불안했다. A가 내게 했던 말들이 잊히지 않았다. 안정이 되지 않았다. 후임자와 통화한 그날, 나는 노동부에 내가 당했던 임금체불에 관한 진정을 넣기로 결심했다. 근로계약서, 대표와의 카톡 문자, 급여 명세서 그리고 체불된 임금을 요청하는 진정서 등 자료를 모두 모아 노동부 포털에 제출했다. 임금체불 진정을 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결심'하기까지가 힘들었다. 금액도 크지 않은데 진정을 넣어야 하나, 앞으로 취업할 때 불이익은 없을까. 하지만 결국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일하던 직장에서 빼앗긴 내 권리를 찾고 싶었다.
내 목표는 두 가지였다
첫째, 내가 노동자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임금과 주휴수당, 연차수당을 돌려받는 것이다.
둘째, 나와 후임이 겪은 고통을 미래의 직원들은 겪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노동부에 임금체불 진정을 넣고 일주일이 지났다. 다음 주 월요일 오전에 관할 노동부로 출두하라는 연락이 왔다. 막상 조사를 받으러 가니 내가 진정을 넣었는데도 심장이 떨렸다. 근로감독관은 두 시간가량 내가 넣은 진정 내용을 꼼꼼히 확인했다. 두 시간 정도 걸렸다.

▲임금체불 진정고용노동부 노동 포털에 임금 체불건으로 진정을 넣었다. ⓒ 김인철
"A의 위법 사실이 확인되면 형사 처벌도 원하시나요?
"아니오. 저는 체불된 임금만 받으면 됩니다."
처리 시한은 한 달이다. 그리고 노동부에 임금체불 진정을 넣고 한 달이 지났다. 처리 시한이 한 차례 연기 되었다. 근로감독관에게 확인을 했다. 추가 조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다시 한 달이 지났다. 처리 시한이 한 번 더 연기되었다. 다시 확인을 했다. 이번엔 내가 넣은 진정이 검찰에 넘어갔다고 했다.
"근로감독관님, 제 사건이 검찰에까지 넘어갈 사안인가요?"
"네. 중요한 사안이에요."
담당 근로 감독관은 그렇다고 했다. 나는 다시 기다렸다. 12월 13일 드디어 내가 넣은 임금체불 진정 처리 결과가 나왔다. 노동부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고 처리 결과를 확인하는 데 키보드를 치는 두 손이 떨렸다. '시정 완료' 이 짧은 한 마디를 확인하는데, 정당한 권리를 찾는 데 3개월이 걸렸다.

▲시정지시임금 체불에 관한 시정지시에 관한 문서이다. ⓒ 김인철
체불된 금액도 크지 않고 간단한 문제라 한 달이면 족히 해결되리라 믿었지만 처리 시한이 두 차례나 연기가 되었다. 급여 통장에 체불된 임금도 입금이 되어 있었다. 나의 승리다.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공식적으로 확인받았다. 처음 노동부에 임금 체불 진정을 넣을 때는 길어야 한 달이면 끝날 줄 알았다. 더욱이 이런 법적인 싸움은 생애 처음이라 진정 진행 과정도 몰랐다.
31일 고용노동부 노동포털을 보면, 지난 6월까지 상반기 체불액은 1조1005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같은 기간 1조436억원보다 5.5% 늘어난 수치다. 전체 체불액 가운데 85.5%인 9404억원은 근로감독관의 시정지시로 사업주가 지급하거나, 임금채권보장기금에서 지급되는 '대지급금' 등으로 청산됐다. 체불노동자는 13만6134명으로 나타났다.
-한겨레 신문, 2025. 7. 31.-
이재명 정부와 사회 일각에서는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바꾸자는 논의를 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명칭 하나를 바꾸는 것일 수도 있다. '근로'가 주어진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의미에 가깝다면, '노동'은 주체성을 가진 노동자로서 권리와 존엄을 의미한다. 즉, 현 정부가 대한민국의 근간을 이루는 노동자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의 문제다. 일단은 긍정적이다.
이재명 정부는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인 김영훈을 고용노동부 장관에 임명했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겠다는 방향성은 분명하다. 산업재해 사망, 임금 체불 등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소규모 사업장의 노동자들에게는 한계도 있다. 이런 정책들이 노동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기는 여전히 부족하다. 이재명 정부가 노동 친화 정부를 표방한다면, 가장 취약한 노동 현장부터 살펴 봐야 한다.
나의 경우도 그랬다. 법은 노동자의 연차 사용을 권리로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소규모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휴가나 연차 사용 등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쉽지 않다. 특히 5인 미만 사업장은 노동법의 사각 지대다. A도 자신의 회사가 5인 미만 사업장이기에 법적으로 연차를 주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노동부에 진정을 넣어서 5인 이상 사업장으로 인정이 되었기에 체불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임금 체불 진정을 2024년 9월에 제기했다. 진정 결과가 나오기까지 약 3개월이 걸렸다. 체불 기간도 길지 않았고 금액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고 힘들었다. 진정을 넣었을 때 따라올 불이익에 대한 걱정도 컸다. 무엇보다 이번 일을 겪으며 몇 달 혹은 몇 년씩 임금을 받지 못하고, 일을 하다가 다쳐도 산재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소송까지 당하는 분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인철 시민기자의 네이버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을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