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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ould like to share the meaning of this award, which is for literature, with you. - Standing here in opposition to violence together. Thank you.
(여러분과 문학을 위한 노벨상의 의미를 나누고 싶습니다. 여기, 폭력의 반대편에 함께 서서. 감사합니다.)"
- 한강 소설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 마지막 문장

작년 한강 소설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이 생중계될 때, "폭력의 반대편에 함께 서서"라는 구문을 배제하고 보도한 언론사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Standing here in opposition to violence together"을 똑바로 알아들었고, 정확히 인식했다. 더더욱이 작금의 시국에서는 못 들으려야 못 들을 수 없는 구절이기도 했다. 지금의 대한민국도 폭력의 반대편에 서서 온 국민들이 함께 연대하는 중이다.

나는 문득, 시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 하는 질문에 이르렀다. 작년에 타계하신 고 신경림 시인은 "내 시가 우리 사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회의 속에서 서서히 시와 멀어져 가고 있었다."(시집 <낙타>에 실린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 중에서)라며 문학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때를 회상했다.

시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시대의 거센 격랑도 통과하며, 신경림 시인은 산문의 말미에 이렇게 고백했다. "시는 그 시대의 질문이요 대답이란 명제도 그랬다. 그 시대의 삶에 깊이 뿌리박는 것으로 충분하지 그 이상의 해답은 있을 수 없었고,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에 충실한 시를 쓰자, 이렇게 마음을 정하면서 나는 시 쓰는 일이 조금씩 편하고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나 역시 시는 곧 삶이고, 삶이 곧 시라고 믿는다. 대한민국을 불안과 공포로 떨게 한 12.3. 계엄 사태는 불확실성을 높이며 안온했던 일상을 위협하고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로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지금, 여기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더 나아가서, 시는 언제나 폭력의 반대편에서 힘을 발휘했다.

하얀 종이에 인쇄된 까만 글자들은 무력해 보이나, 절망과 슬픔을 위로하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지난 한 달 남짓, 분노와 환멸감에 단 한 줄의 시도 읽지 못하고 적지도 못했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책장 앞에 서서 <당신에게 시가 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를 폈다.

당신에게 시가 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류근, 진혜원 엮음
당신에게 시가 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류근, 진혜원 엮음 ⓒ 해냄 출판사

"사람들이 자꾸만 천박해지고 각박해져서 도무지 염치와 수치를 모르는 세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점점 고민이 깊어지더군요. 사람들이 왜 자꾸만 나쁜 쪽으로 기울어질까. 그러다가 문득 이런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아,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고 시심을 잊어서 그런 거다! 이 시대야말로 시가 필요한 시대다!"

- 왜 서정시인가요? 시인과 검사와의 대화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류근 시인의 말이다. 류근 시인의 말에 덧붙여 진혜원 검사는 "마음을 순화시키고,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순수하게 동화시키는 것이 바로 서정시의 힘"이라고 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 이준관 시인 '구부러진 길' 중에서

구부러진 길의 동그마한 빈 틈들은 오점이나 단점이 아니다. 누군가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이다. 구부러진 하천에는 물고기도 많이 살고, 구부러진 길에는 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며, 어머니 같은 목소리도 들린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오늘을 함께하며 같이 울고 웃는 가족과 이웃이다. 평범한 보통의 날들이 곧 일생이고, 가족과 이웃과 함께하는 일상의 순간들이 인생 그 자체다. 오직 나 한 사람만을 이고 지고 걸어가는 서슬 퍼런 극단의 길보다 가족과 이웃과 함께 가는 너른 품의 구부러진 길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 김종삼 시인, '북 치는 소년' 전문

김종삼 시인의 '북 치는 소년'을 읽으면 눈앞에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진다. 양들의 등성이에 내린 진눈깨비가 하얗게 햇살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 위에는 북 치는 소년이 있다.

서양 나라와 나,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와 나, 어린양과 나, 진눈깨비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북 치는 소년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으로 선명하게 살아있다. 존재의 아름다움 그 자체가 꽉 찬 내용이다. 북 치는 가난한 아희, 서양 나라의 소년이 반짝이며 눈앞에 서 있다.

불의한 사건과, 부당한 상황과, 절망적인 조건 속에서 서정을 잠시 잊을 수는 있지만, 서정은 아름답게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다. 우리와 너무나 닮은, 서양나라의 북 치는 소년처럼 아름다운 사람에게서, 이곳에 숨 쉬며 존재하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렇기에 언제든 우리는 서정을 다시 되찾을 수 있다.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이 땅에 숨을 쉬고 있는 존재라는 동질감으로 하나 되는 서정을.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중략)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이성복 시인 '그날' 중에서

이성복 시인이 노래한 '그날'과 우리의 2025년, '이날'은 똑같이 아프다. 물론 다른 이유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아픈 것은 매한가지다. 국민들은 극단의 대립과 갈등으로 진통 중인 정국 상황 속에서 몸살을 앓고 있다. 다만 이성복 시인이 쓴 '그날'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현재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시대를 산다는 점이다. 국민들은 응원봉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 아픔과 절망을 평화적으로, 떼창으로 표현하고 있다.

언젠가 먼 미래에 지금 '이날'이 '그날'로 회상될 때, 병든 사회에서 느낀 절망과 고통을 평화적으로 견뎌내고 다 함께 민주주의를 지켜낸 국민의 이야기로 역사에 기록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안온하게 이어지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무탈한 날들이 다시금 회복되기만을 바란다. 같은 마음으로, 같은 서정으로, 다시 건강한 대한민국을 되찾길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양시인의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당신에게 시가 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 소월에서 박준까지, 우울한 시인과 유쾌한 검사가 고른 우리나라 극강의 서정시

류근, 진혜원 (엮은이), 해냄(2021)


#당신에게시가있다면당신은혼자가아닙니다#양윤미시인#류근시인#진혜원검사#시요일엔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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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문화예술기획자/ 『오늘이라는 계절』 (2022.04, 새새벽출판사) 울산북구예술창작소 감성갱도2020 활동예술가 역임(2022) 『사는 게 만약 뜨거운 연주라면』 (2023.10, 학이사) 장생포 아트 스테이 문학 레지던시 작가(2024) (주)비커밍웨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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