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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남원은 내겐 이미지 도시였다. 광한루에 여행을 다녀오신 어머니 쟁반에 '그네 뛰는 춘향이'로 기억된, 머릿속 도시였다. 그러니 그리 익숙하지 않았다. 생활권이 먼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남원 시가지 교룡산성 남벽에서 바라 본 남원시가지 모습이다.
남원 시가지교룡산성 남벽에서 바라 본 남원시가지 모습이다. ⓒ 남원시청(네이버 블로그 : 남원에 빠지다)

역시 역사적 실체가 마음을 이끌어 주었다. 동학혁명으로 잇닿자 금세 친숙해졌다. 자주 찾지는 못했어도 흠씬 정감 가는 남원은, 그러나 쓰라린 역사의 고장이기도 하다.

동으로 운봉∼인월∼아영을 거쳐 함양∼경주로 이어지는 지리적 여건은 통일신라 5소경 중 하나였다. 전라도 정벌이 목적인 정유재란 때는 내륙 방어의 관문이었다. 동학혁명 때는 김개남의 근거지였으며, 그에 앞서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가 교룡산성 은적암에서 동학의 교리를 완성한 고장이기도 하다.

남원읍성(1872년지방지도_부분) 네모진 남원읍성과 주변이 자세하다. 지도 좌측 상단의 낙타 뿔 같은 교룡산성이 호각세로 그려져 있고, 읍성 아래 광한루 묘사가 재미지다.
남원읍성(1872년지방지도_부분)네모진 남원읍성과 주변이 자세하다. 지도 좌측 상단의 낙타 뿔 같은 교룡산성이 호각세로 그려져 있고, 읍성 아래 광한루 묘사가 재미지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평상시엔 읍성, 위급 시엔 산성이라는 조선의 방어 체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도시가 남원이다. 1872년 지방지도에 명확히 나타난다. 정사각형의 읍성과 남원 진산인 교룡산이 호각지세로 그려져 있다.

교룡산성

두 개의 뿔로 우뚝 솟은 교룡산이 품을 열어 반겨준다. 산성 입구 우거진 아름드리나무 사이로 비껴드는 겨울빛이 따스하다. 계단을 오르며 두어 번 꺾어 드니 아담한 홍예가 정겹다. 수구를 건너 아찔한 높이의 남벽에 오른다.

교룡산성 동문 정문 역할을 하는 교룡산성 동문. 문루 없는 아치이다.
교룡산성 동문정문 역할을 하는 교룡산성 동문. 문루 없는 아치이다. ⓒ 남원시청(네이버 블로그 : 남원에 빠지다)

지형 활용에 무척 충실한 산성이다. 가파른 경사에 숨이 차오른다. 이토록 험한 산성에 99개 우물이 있었다니, 쉬이 믿어지지 않는다. 숲 사이로 보이는 남원 시가지가 아늑해 보인다. 얼마나 올랐을까 별장청 터가 나타난다. 불어오는 찬 바람이 다디달다. 여기서 선국사로 방향을 튼다.

오르기보다 내려가기가 더 어려운 게 산행이라던가. 신발도 맞춤하지 못해 자꾸 미끄러진다. 골짜기보다 품이 넓은 절집이 평화롭다. 절 뒤로, 너른 건물터가 경사지에 펼쳐져 있다. 동학혁명 당시 김개남 부대가 여기 주둔했으리라. 빙 돌아 다시 가파른 산길이다. 마른 땀이 다시 흐를 즈음, 숨이 거칠게 깔딱거린다. 은적암 터다. 등산로에서 왼쪽으로 살짝 벗어난 편편한 땅이다.

은적암 터 수운 최제우가 동학 교리인 '논학문(論學文)'을 집필하고 '검결'이라는 칼 춤을 췄다는 은적암 터. 옆으로 교룡산 산신단이 같이 한다.
은적암 터수운 최제우가 동학 교리인 '논학문(論學文)'을 집필하고 '검결'이라는 칼 춤을 췄다는 은적암 터. 옆으로 교룡산 산신단이 같이 한다. ⓒ 남원시청(네이버 블로그 : 남원에 빠지다)

수운이 교리를 밝히는 '논학문'을 집필한 곳이다. 휘영청 달이 밝은 어느 밤, 나무 칼을 든 수운이 이곳에서 "시호! 시호! 이내 시호!"로 시작하는 '검결'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옆에 교룡산 산신단이 있어, 이 터가 남원 민중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는지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은적암 사방으로 찬바람이 매섭다. 교룡(蛟龍)이니, 때를 잘못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한 영웅호걸이다. 수운이나 김개남이 교룡이었음은 분명하다.

남원읍성

남원의 큰 물줄기인 요천과 교룡산에서 발원한 광지천 둘 다 남서쪽으로 흐른다. 두 물줄기 사이에 읍성이 앉았고, 동서남북 길이가 각 850∼870m로 정사각형에 가깝다. 둘레 3,441m의 벽이 두꺼운 성으로, 편편한 곳에 쌓은 평지성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실록은 1477(성종 8)년 축성을 시작하여 1492(성종 23)년에 완성했다 기록한다. 처음 쌓은 성이 좁았던지 증축 논의가 일어난다.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으나, 여러 정황상 1530년 이전에 증축된 것으로 보인다.

남원읍성과 교룡산 남아 있는 읍성 북벽과 그 너머 지척으로 교룡산이 보인다.
남원읍성과 교룡산남아 있는 읍성 북벽과 그 너머 지척으로 교룡산이 보인다. ⓒ 남원시청(네이버 블로그 : 남원에 빠지다)

200여m 남은 북벽에 오른다. 네모난 치성에서 북문 터까지 복원이 한창이다. 남원읍성 북서쪽으로 교룡산성이 지척이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니 '만인의총'이 애처로이 읍성을 응시하고 있다. 성 가까이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옛길을 따라 성안을 걷는다. 용성초등학교 자리에 객사 '용성관'이 있었고, 바로 아래 남원문화원 자리가 관아와 내아다. 이들 건축물을 비켜 가로망이 직선으로 남-북을 이었고, 객사와 동헌을 가르는 동-서 가로가 용성관에서 직교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 때 동·서·남문의 문루가 불에 탔다.

강제 병합으로 남원읍성이 차례로 훼철되기 시작한다. 신작로와 철도로 남원읍성을 허물어나갔다. 전주~순천 간 도로가 개설된 1911∼1913년 사이 북문이 사라진다.

남원읍성 치성 네모난 치성과 성벽 밖으로 발굴 당시 해자가 보인다. 저 끝에서 북문 터까지 현재 복원 중이다.
남원읍성 치성네모난 치성과 성벽 밖으로 발굴 당시 해자가 보인다. 저 끝에서 북문 터까지 현재 복원 중이다. ⓒ 남원시청(네이버 블로그 : 남원에 빠지다)

전라선(1935)을 개통하면서 요천이 흐르는 방향과 나란히 철도를 끌어들인다. 그 자리에 남원역을 앉히고 철로 주변을 가로망으로 둘러싼다. 이로써 격자형이던 옛 읍성의 가로체계가 뭉크러져 버렸다. 아울러 근대화라는 미명으로 성안 곳곳을 파헤친다. 대부분 성벽이 이때 훼철되었다.

정유재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도 남원읍성은 큰 곤욕을 치렀다. 1593년 6월(음) 2차 진주성 전투 때 진주성을 함락한 왜군이 남원읍성도 공격해 쑥대밭을 만든다. 파손된 성을 명나라 장수 낙상지가 곧바로 고쳐 쌓는다. 정유재란(1597) 때 이곳 수비 책임을 맡은 명나라 총병 양원이 성을 보강한다. 성벽을 수리하고 해자를 더 깊이 팠으며 여장을 높여 쌓는다.

해자 2019~2020년 발굴 당시 남원읍성의 북벽 해자.
해자2019~2020년 발굴 당시 남원읍성의 북벽 해자. ⓒ 남원시청(네이버 블로그 : 남원에 빠지다)

그해 전주를 목표로 왜군이 세 갈래 길로 내륙 깊숙이 침범한다. 섬진강 물길로 1대가, 좌군은 진주-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우군은 합천을 지나 황석산성으로 진군한다. 남원은 바람 앞에 내놓인 등불이다. 고니시, 시마즈, 우키다가 이끄는 5만 6천 병력이 8월 12일 남원으로 몰려들어 성을 포위한다.

성안 백성이 7천여 명이다. 여러 장수가 교룡산성에서 진지전을 펼치자 주장한다. 그러나 양원은 거만했다. 평지성이니 1천 기병을 믿었던 모양이다. 기병을 포함 명군이 3천이다. 2천 군사로 전주에 주둔하던 명 장수 진우충이 지원을 거부한다.

어쩐 일인지 인근의 권율과 이원익의 1만 조선군도 섬진강의 왜군을 견제하며 주저한다. 웅치전투에서 왜군을 막았던 전라 병마사 이복남이 1천 군사를 이끌고 꽹과리와 북을 치며 당당하게 남원성으로 입성할 뿐이다. 이 모습에 왜군이 당황할 정도다.

13일부터 전투가 시작된다. 다음 날, 왜군이 장대를 높이 세워 조총을 난사한다. 명 군사들이 사상을 내고 동요한다. 그날 밤 명-왜군 간에 합의가 있었을까? 양원이 도망칠 계책을 구한다. 15일 볏짚으로 해자를 메운 왜군 공격에 성이 함락되고, 이복남 등 조선군은 화약고를 폭발시켜 자폭해버린다. 7천 백성들도 코가 베어진 채 모두 살육당한다.

만인의총 정유재란 당시 남원읍성 전투 패배로 죽임을 당한 백성과 조명연합군의 넋을 기리는 합동 묘다.
만인의총정유재란 당시 남원읍성 전투 패배로 죽임을 당한 백성과 조명연합군의 넋을 기리는 합동 묘다. ⓒ 남원시청(네이버 블로그 : 남원에 빠지다)

이를 묘사한 왜 종군 승려가 쓴 글은 참담함 그 자체이다. 양원을 비롯한 50여 명만이 살아 도망간다. 읍성이 어찌 되었을지는 불문가지다. 이 패배의 결과가 '만인의총'이다.

춘향전과 광한루

한겨울, 남문 밖 광한루원이 적요하다. 꽃피고 새 우짖는 춘삼월에 이팔청춘 이몽룡은 방구석에서 얼마나 갑갑했을까. 춘향전은 춘심에 흠뻑 젖어 광한루로 향하는 그의 발길에서 시작한다. 민중이 읊어가며 써낸 최고의 고전소설 춘향전은 남원이 배경이다. 1872년 지방지도는, 소설이 묘사하는 읍성과 그 주변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남원 토박이 방자의 요란스러운 사설을 따라 춘향전 속 남원으로 걸어 들어가 보자. 객사 뒤에 '정유난순절팔충열단'을 그려 놓았다. 장시가 성안과 남문 밖에 표시되어 있다. 동문 밖 선원사와 문루에 잇닿은 요천 변 동림이 울울하고, 서문 옆에는 관우 사당인 관왕묘가 있다. 남문 밖에 오작교가 도드라지게 표현되어 있고, 그 옆에 2층 누각의 광한루가 서 있다. 북문 밖 향교와 낙타 등 같은 교룡산성 묘사가 무척 세세하다.

광한루 남원 객사 용성관의 별서로 지어진 광한루. 춘향전의 본 무대이기도 하다.
광한루남원 객사 용성관의 별서로 지어진 광한루. 춘향전의 본 무대이기도 하다. ⓒ 남원시청(네이버 블로그 : 남원에 빠지다)

광한루는 남원 객사 용성관에 딸린 1419년에 세워진 공용 누각으로, 자연경관에 인공 정원을 덧붙였다. 남문 밖 북적거리는 장시와 별개로, 정적이고 유유자적하는 쉼의 공간이다.

양녕대군 폐위를 반대하던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낙향한다. 그의 조상이 지은 정자를 철거한 자리에 누각을 지어 '광통루'라 이름한다. 한글 창제에 힘을 보탠 정인지가 달나라에나 있을 법한 풍경이라며 '광한루'로 바꿔 부른다. 기축옥사로 호남 유학자의 씨를 말려버렸다는 정철이 이곳을 찾아 큰 연못을 파고 3신 산을 조성하고 오작교를 놓아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광한루원을 나오며, 명창 임방울이 쇳소리로 불렀던 '쑥대머리'를 읊조려 본다. 춘향전은 애틋한 사랑 이야기다. 우리 정서에 이처럼 깊숙이 젖어 든 이야기도 흔치 않다. 묘사하는 장소는 매우 구체적이다. 민중이 지어낸 이야기 속 서사는 남원읍성 그 자체다. 읍성 옛 건축물이 마치 춘향전 무대 같다. 만남과 사랑, 이별과 그리움, 재회하는 장면이 모두 현실에 버금간다.

읍성을 온전히 복원해 내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서문과 남문 터에 표석을 세웠듯, 성벽을 따라가는 표식은 가능해 보인다. 이로써 읍성 윤곽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면, 장소와 역사, 이야기가 훨씬 더 강렬하게 기억되지 않을까?

#남원읍성#교룡산성#광한루#정유재란#춘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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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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