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기자말] |
무장(茂長)은 옛 무송현과 장사현을 합하며 앞 글자를 따 지은 이름이다. 그렇다고 뒤를 버린 것도 아니다. 무장읍성 안 뱀이 머리를 치켜든 사두봉(蛇頭峰)에 웅건하게 앉아있는 객사 송사지관(松沙之館)에 온전히 살아남았다.

▲무장읍성(1872년 지방지도_부분)네모난 무장읍성 성곽과 내부 건물배치가 자세하다. 뱀처럼 남으로 뻗은 사두봉과 객사, 남문과 동문은 물론 성 밖으로 향교과 사직단이 보인다. 좌측 상단 둥근 붉은 원이 옛 장사현이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남문 진무루에서 바라다보이는 객사가 고즈넉하다. 면사무소로 쓰이는 등 풍상을 겪었으니 읍성의 영욕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을 터다. 일제강점기부터 훼철된 남문은 옹성도 잃고 초라해진 진무루에 낮은 계단만 남았었다. 옆 허물어진 성곽은 무장초등학교 교문이었다. 숱한 고난에도 객사는 살아남았고, 수백 살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차가운 북풍한설에도 의젓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
1981년 여름, 하늘을 가린 이 느티나무 밑에서 한없이 슬펐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게 진정한 스승이 계신다면, 페스탈로치를 가장 존경하셨던 그분이 아닐까? 무장초등학교로 전근 가시기 수년 전 초등 6학년 담임이었다.
아담한 체구에 부드러운 미소, 아무리 어려워도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시던 선생님. 자녀 여럿에 학교 옆에서 셋방살이하셨어도, 월급 받으면 자전거 타고 먼 읍내까지 나가 학생들에게 나눠줄 문제집을 손수 사 오셨다.

▲송덕비객사와 연지 사이 송덕비와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해 여름 유명을 달리하신 선생님을 이 느티나무가 소환해 주었다. ⓒ 이영천
전근 이후에도 학업에 매진하셨나 보다. 그해 여름 박사학위를 받던 날,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신 유영두 선생님. 온통 울음바다에 매미 소리마저 구슬펐던 그 여름, 떠나는 운구차에 느티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려 시원한 바람을 불러들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을사년을 맞는 눈 쌓인 정초, 송사지관과 느티나무는 그렇게 선생님에 대한 옛 기억으로 다가들었다. 읍성 한가운데서 동헌과 사창(社倉 : 조선 시대에, 각 고을의 환곡(還穀)을 저장하여 두던 곳집. 문종 원년(1451)에 설치하여 점차 확대하였으나, 환곡의 문란으로 순조 5년(1805)에 호남ㆍ호서 지방은 관찰사 재량으로 그 존폐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으로 공간을 양분하는, 사두봉과 객사는 그래서 더 중심성을 갖게 되었을까?
동학사와 오지영
무장을 동학혁명과 떼어놓고 생각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자연스럽게 손화중이 먼저 떠오른다. 고창 성송면 괴치리는 전라도 동학의 최대 세력이던 손화중이 도소를 차린 곳이다.
괴치리 서쪽 덕림리에서 동학혁명을 오롯이 기록한 <동학사>의 저자 오지영이 태어났다. 동학혁명을 직접 겪고 쓴 동학사는 분명 그의 개인 기록이다. 그러나 책이 갖는 의의는 그분의 행적과 더불어 개인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다. 논쟁은 있을지라도, 동학사로 인해 동학혁명의 세세한 내용이 제대로 규명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옥사 터읍성 안쪽 남서쪽 귀퉁이, 연지 옆에 둥글게 옥사 터가 복원되었다. 1892년 8월, 선운사 마애불 배꼽에서 '석불비결'을 꺼낸 주모자로 오지영, 강경중, 고영숙이 갇힌 곳이다. ⓒ 이영천
복원된 연지 옆, 옥 터로 걸음을 놓는다. 동학혁명 전야라 할 수 있는 1892년 이곳 옥에 오지영이 갇혔다. 그해 8월, 선운사 마애불 배꼽에서 비결(앞날의 길흉화복을 얼른 보아서는 그 내용을 알 수 없도록 적어 놓은 글이나 책. -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을 꺼낸 주모자로 체포되어 강경중, 고영숙과 함께였다(관련기사 :
새 시대 비법 찾던 사람들, 불상의 배꼽을 부쉈다).
동학사에 언급하듯 비결 행방과 손화중 거취를 취조당하며 갖은 고문에 시달린다. 셋에게 사형이 언도 된다. 그러나 오지영의 두 형과 무장현 동학교도의 무력시위, 도인이 된 고을 관리들, 동문수학한 도사령 이중복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한다.
곧바로 처가가 있는 익산으로 근거를 옮겨, 이듬해 익산 농민봉기 우두머리로 나선다. 특히 동학 2차 봉기 당시, 북접을 설득해 손병희 하여금 공주 우금치 전쟁에 참여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동학혁명 후 양주 묘적암에 은거하다 1896년 북접에 합류, 다시 활동에 나선다.
1905년 손병희의 천도교 개칭 때 익산 대교구장을, 1909년 서울로 이주 천도교 중앙 일을 맡아보다 3.1운동 때 체포되기도 한다. 1921년 말부터 최시형 아들 최동호 등과 천도교 혁신운동에 나선다. 대일본 무장투쟁을 주장하지만, 보수파에 밀려 좌절된다.

▲남문과 성벽남문 옹성과 진무루, 그 옆으로 객사(송사지관)와 최근 복원된 읍취루가 성벽 안으로 보인다. ⓒ 이영천

▲동문과 성벽남문에서 경사진 언덕을 올라가면 나오는 동문. 경사지에 옹성을 두었으나, 문루는 없다. 시대별로 동문에 문루를 그린 옛 지도가 있기도 하다. ⓒ 이영천
민중을 중심에 두고 한평생 '토지혁명'에 매진한다. 동학 폐정개혁의 핵심이 봉건 해체를 요구하는 '토지의 균등 분작'이었고, 이를 실천에 옮긴 것이다. 항일투쟁의 일환이기도 했다. 1926년 익산 농민 230명과 함께 만주 지린성으로 이주, 7개 지역으로 나누어 토지를 개간하고 공동농장을 경영한다. 지사의 풍모다.
이 무렵 4권의 동학사 초고를 썼고, 1935년 서울에서 출판 활동에 매진한다. 아울러 긴 시간 철저한 고증을 거쳐 1940년 마침내 동학사(영창서관)를 출간하기에 이른다.
무장읍성
진무루에서 동문으로 성벽 위를 걷는다. 동문은 옹성 뿐 문루가 없다. 옛 지도엔 동문 밖 향교와 북측 사직단이 보인다.
둘레 1,231m의 읍성이 아담해 보인다. 평지성의 특징이다. 동문에 잇닿은 높이 3.2m 성벽이 단단해 보인다. 이 자리는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여러 차례 발굴을 통해 남문과 동문의 옹성 및 성벽이 복원되었다.

▲사창 터곡창지대 읍성의 위상을 보여주는 듯 정면 14칸, 측면 3칸의 웅장한 창고가 터로 남았다. 사두봉 낮은 능선 너머로 동헌 '취백당'이 보인다. ⓒ 이영천
1417년 법성포를 위시한 주변 곡창지대를 왜구 침탈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았다. 2만 수천 명이 동원되어 불과 3개월 만에 쌓았다니, 그 시급함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동문 가까운 사창 터에 주춧돌이 빼곡하다. 곡창지대 창고답게 놓인 주춧돌만으로도 웅장했던 사창이 그려진다. 전면 14칸, 측면 3칸의 읍성 사창 중 최대 규모로, 무장읍성의 위상을 대변하는 시설이라 할 만하다.
사두봉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읍취루와 네모진 연못을 지난다. 읍취루 뒤, 남문을 향해 뻗은 사두봉 정점에 객사가 앉았다. 월대를 가진 3중 건축물이 웅장하다. 기단 양 끝에는 예쁜 꽃이 피었고, 월대로 오르는 계단 면석엔 알 수 없는 동물이 새겨져 있다.
월대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객사가 읍성의 중심임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다른 읍성과 달리 한가운데 객사가 공간을 둘로 가르고 있다. 옛 지도를 보면 확연하다. 현대 도시 개념으로 보면 '지역지구제'로 구분된 공간구조로 이해할 수 있으며, 기능적 공간 분배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읍성 서측객사를 중심으로 성안 서측은 행정기능 공간이다. 동헌 등 각종 기관이 자리했다. ⓒ 이영천

▲읍성 동측읍성 동측은 군기고와 사창, 장시 등 읍성을 지탱하는 지원기능 공간이었다. ⓒ 이영천
사두봉 끝자락 객사를 중심으로 서쪽이 행정기능 공간이다. 동헌과 내아와 각종 청사가 자리한다. 연못을 복원하자, 묻혀있던 씨앗이 발아해 1백 년 만에 연꽃을 피웠다는 연지 옆이 옥사 자리다. 사두봉 동쪽에 시장이 있었다. 규모는 가늠이 어려우나, 군기고와 훈련청이 잇닿았던 것으로 보아 상당수 군사의 배후지 역할이라 추정할 수 있다.

▲취백당무장현 동헌으로 성안 서측 정점에 자리한다. 무장초등학교 시설로 쓰이는 등 수난에도 비교적 잘 보전된 건 다행이라 할만 하다. ⓒ 이영천
현감들이 쌓은 공덕이 하늘에 닿았을까? 객사 옆, 하늘을 뒤덮은 아름드리나무 아래로 늘어선 송덕비가 여럿이다. 이곳을 지나 사두봉 서쪽 길로 오르면 솟을삼문이 막아선 동헌 취백당이다.

▲19C 무장현도봄 기운이 완연한 1800년대 무장읍성의 모습. 번성하던 기운이 역력하다. 몇년 전 까지만 해도 읍성 안에 게첩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 이영천
지금은 사라진 안내판의 '19C 전라도 무장현도'는 봄빛으로 찬연하다. 성안이 세세하고, 남문을 비롯한 성 밖 빼곡한 초가는 당시 무장이 어떤 도시였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오래된 복원
어느 읍성이나 유사한 훼철 과정을 밟았지만, 무장읍성 안에도 2004년까지 초등학교가 있었다. 읍성 안으로 학교 다닌 세대에겐 특별한 기억이겠으나, 일제의 의도를 생각하면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무장읍성은 20년 넘게 복원 중이다. 발굴도 지속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첨단무기였던 비격진천뢰를 비롯한 건물지, 성 밖 해자까지 옛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특히 남문 밖 해자는 옹성이 있을 때와 없을 때 방향과 넓이, 깊이가 달랐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송사지관(객사)무장읍성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객사 송사지관이다. 뱀이 머리를 치켜드는 정점에 앉았다. 면사무소로 쓰이는 등 풍상은 겪었어도 잘 보존된 편이다. ⓒ 이영천
옹성이 들어선 후 해자를 건너는, 상판을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일종의 도개교인 조교(弔橋)가 발굴된 점은 우리 성곽 역사에서 특기할 만하다. 애당초 토성과 석성의 혼합이라 알려진 성곽도, 최근 발굴에서 완전한 석성이었음이 밝혀졌다. 복원계획은 성안의 공공 건축물 위주로 진행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20여 년 전 사진을 보면 남문과 동문 사이 성벽이 헐린 곳에 경찰서와 교회가 자리했었다. 동헌 앞은 무장초등학교 교사와 운동장이, 사창 앞은 황량한 나대지 곳곳에 민가가 자리했었다. 읍성이 그나마 보전될 수 있었던 여러 이유 중 하나가 무장 아전들이 죄다 동학교도였다는 설이다. 동학혁명 당시 점령된 다른 읍성 건축물들이 불에 탔던 점으로 미루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여하히 일제강점기를 지나는 동안 객사와 동헌 건물이 살아남은 건 다행이라 여겨진다. 군데군데 허물어졌어도 남은 성벽과 그 흔적도 제모습을 찾는 근거가 되어 주었다.

▲무장읍성 조감한가운데 객사를 중심으로 동-서로 나뉜 읍성의 공간구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항공사진이다. 남문과 성벽이 견고해 보인다. ⓒ 고창군청
혹자는 묻는다. 사람이 살지 않는 옛 읍성을 복원하여 무엇에 쓸 거냐고? 옛사람들이 그러했듯 성안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다만 꼭 그렇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한 공간을 차지해 수백 년을 지켜온 터줏대감이다. 그곳에서 역사가 생겼다. 문화가 꽃피웠고 시장이 열렸으며 삶과 놀이, 장삼이사의 애환이 깃들었다. 그런 유구한 맥을 이어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