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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눈 덮인 전주천엔 김이 오르고, 맞은편 둔치 노천시장은 시끌벅적하다. 추운 날씨를 헤치고 시골에서 수확한 푸성귀를 들고 노천시장을 찾는 즐거움에, 사고 파는 이 모두가 함박웃음이다. 그러나 남부시장 상인들은 심사가 불편한가 보다. 귀에 들릴 만큼 퉁명스러운 말들이 오간다.

매곡교에 올라 시장으로 든다. 남문 밖 시장이니, 성곽을 가졌던 여느 도시에나 있는 그런 곳이다. 하지만 전주 특유의 맛과 멋이 넘쳐나는 곳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콩나물국밥과 피순대는 고유명사가 되었고, 시장은 특유의 생명력으로 강인하다. 동학과 한국전쟁 때 잿더미가 되기도 했었다.

천변 도로를 따라 싸전 다리에 이른다. 천 건너로 완산 7봉의 하나인 투구봉과 곤지산이 보인다. 1894년 늦은 봄, 무참하게 가해진 포격은 저 산 위에 왕의 대포였다. 싸전 다리를 건너 곤지산을 향해 돌격하는 동학혁명군 잔영이 바람 같다.

전주부성(1872년_지방지도_부분) 전주부성의 안팎이 자세하다. 성안의 옛 가로망이 지금은 보행자 전용도로나 2차선 길이 되었다. 남문 밖으로 오목대, 전주향교 등도 보인다.
전주부성(1872년_지방지도_부분)전주부성의 안팎이 자세하다. 성안의 옛 가로망이 지금은 보행자 전용도로나 2차선 길이 되었다. 남문 밖으로 오목대, 전주향교 등도 보인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곤지산 아래 초록 바위가 한산하다. 도로가 잘라버린 산등성이 흔적이 가파른 절벽으로 남았다. 초록 바위는 예로부터 처형장이었다. 역적이든 가톨릭 신자든 이곳에서 수도 없이 죽어 나갔다.

완산 7봉을 뒤로하고 팔달로를 걷는다. 무척 포근한 표정의 성당이 반겨준다. 비잔틴풍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동성당은 회색과 붉은색 벽돌을 아주 조화롭게 쌓아 만든 예쁜 성당이다.

전주성 성벽

성당에서, 로마 교황의 권위를 앞세운 교조적 원리주의인 '울트라몬타니즘'이 같이 보인다. 피로 얼룩진 조선 가톨릭 선교의 원인이라 생각한다.

조선 가톨릭의 시작은 자생적 수용이었다. 실학이 바탕인 북경 가톨릭 영향이다. 그러나 이는 로마 교황청엔 불법이었다. 따라서 갈등에 내놓인다. 처음 실학을 수용한 지배계급도 분화를 맞는다. 성리학 가치와의 충돌이었고, 내부의 근본적인 갈등이었다. 이를 수용하지 못한 부류가 공서파, 받아들인 부류가 신서파다.
전동성당 진산사건의 주인공인 윤지충과 권상연의 피가 흐른 성벽 돌로 지은 성당이다.
전동성당진산사건의 주인공인 윤지충과 권상연의 피가 흐른 성벽 돌로 지은 성당이다. ⓒ 전주시청

명례방 공동체 사건(1784)으로 최초 순교자(1786)인 김범우의 집에 명동성당(1898)이 터를 잡는다. 1791년 금산군 진산에서도 사건이 일어난다. 사대부이자 정약용 고종사촌인 윤지충이 어머니 신주를 땅에 묻어 버리고, 가톨릭 의식에 따라 제를 치른다. 공서파에게 맹렬한 탄핵을 받지만, 외사촌인 권상연은 이를 두둔하고 나선다.

사건은 한양까지 번져 당쟁 조짐을 보인다. 가톨릭에 유화적이던 정조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윤지충과 권상연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사건은 그 이상 확대되지 않았으나, 가톨릭에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많은 사람이 번민하며, 가톨릭에서 이탈하기도 한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전주로 압송되어, 참수에 처해진다. 모름지기 초록 바위에서다. 참수된 머리가 남쪽 성벽에 며칠이고 효수된다. 이른바 신해박해다. 10년 후(1801)인 신유박해 때도 가톨릭 신자 여럿이 흡사한 방식으로 순교한다.

1891년 프랑스 신부 보두네가 전동성당 터를 매입하고, 명동성당 설계자 프와넬 신부에게 설계를 맡기나 성당 건립은 지지부진하다. 1907년 7월 친일파들 건의로 '성벽처리위원회'가 설치되고 나라 곳곳 성벽이 노골적으로 훼철된다.

전동성당 설경 비잔틴풍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한 예쁜 성당은 풍남문, 경기전과 더불어 한옥마을의 명물이 되었다.
전동성당 설경비잔틴풍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한 예쁜 성당은 풍남문, 경기전과 더불어 한옥마을의 명물이 되었다. ⓒ 전주시청

전주성 성벽도 이때 훼철이 이뤄진다. 보두네 신부의 노력으로 성벽 돌이 성당 자재로 사용된다. 가톨릭에는 무척 고마운 일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피가 흐른 성벽 돌은 성물이기 때문이다. 1908년 착공하여 1914년에 완공한다. 명동성당 건립에 참여한 중국인 벽돌공 등 기술자들이 참여한다.

성벽이 무너지자, 일본인들이 앞다퉈 전주성을 잠식해 들어온다. 뜻있는 조선인들이 경기전과 인근만은 지켜내자고 성 동남쪽으로 옮겨온다. 이들의 노력으로 온전히 지켜진 전통이 지금의 한옥마을이다.

나무보다 키 작은 집들

가장 좋아하는 골목으론 경기전∼전동성당∼풍남문∼남문시장에 이르는 길을 주저 없이 꼽는다. 그리 넓지 않은 길 양쪽에 열 지어 선 나무들 품이 넓다. 나무보다 키 작은 주변 집들은 소담해 보인다. 다니는 차도 뜸해 위협적이지 않다. 걸음마저 저절로 느려진다. 하마비가 지키는 경기전 앞, 사시사철 변하는 얼굴에 반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미음완보(微吟緩步)라 했던가. 저절로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경기전으로 걸음을 이끈다.

경기전 주변 설경 경기전~전동성당을 중심으로 한옥마을의 정겹고 환상적인 풍경이 일품이다.
경기전 주변 설경경기전~전동성당을 중심으로 한옥마을의 정겹고 환상적인 풍경이 일품이다. ⓒ 전주시청

홍살문을 지나 정전에 이르러 이성계 어진을 만난다. 뒤뜰에서 마주친 전주 사고가 오래된 누이인 듯 반겨준다. 조경묘는 또 어떤가? 이곳이 조선왕조의 탯줄이라고 웅변하는 듯하다. 서걱거리는 작은 대숲을 지나 태조로에 나온다.

이곳을 풍패의 고장(豐沛之鄕)이라 부르는 건 이성계 조상의 터전이 전주였기 때문이다. 한나라 유방의 고향인 패군 풍현에서 유래한, 새 왕조를 창건한 모태의 상징이다. 풍패는 아직도 도시 곳곳에 전주의 상징으로 남았다.

조선 건국(1392) 때 완산유수부로 승격되고, 태종 때 전주부로 개칭(1403)되어 전라감영을 두었다. 완산주는 전주 남쪽 완산 7봉에서 유래하였고 전주는 완산주에서 따온 것이니, 전주의 뿌리는 곧 완산 7봉인 셈이다.

풍남문 야경 전주부성의 남문인 풍남문의 야경. 안쪽에서 본 모습으로 '호남제일성'이란 편액을 달았다.
풍남문 야경전주부성의 남문인 풍남문의 야경. 안쪽에서 본 모습으로 '호남제일성'이란 편액을 달았다. ⓒ 전주시청

고려 성곽을 고쳐 쌓은 전주성을 1734년 대대적으로 개축하면서, 남문을 명견루(明見樓)라 불렀다. 불과 30년 후인 1767년 큰불이 일어난다. 이 화재로 성안 민가는 물론 문루가 소실되어버린다. 이를 복구하면서 남문을 풍남문(豐南門), 서문을 패서문(沛西門)이라 칭하며 풍과 패가 사용된다.

패서문(서문) 터 전주부성 서문인 패서문 터. 전주 서문교회가 지척이며, 주변은 차이나타운이 조성되어 있다.
패서문(서문) 터전주부성 서문인 패서문 터. 전주 서문교회가 지척이며, 주변은 차이나타운이 조성되어 있다. ⓒ 이영천

1771년에는 전주 이씨 시조라는 이한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를 창건한다. 1775년 동문과 북문을 다시 지으면서 각각 완동문(完東門), 공북문(拱北門)이라 칭한다. 유사시를 대비한 산성으로 기존 위봉산성에 더하여 1812년 '견훤고성'이라는 남고산성을 중건한다. 전주 가까이 동고산성과 보완적인 관계다. 이로써 풍패지향의 위용을 갖춘다.

4대 문을 찾아

태조로에서 경기전 옆 중앙초등학교 길을 따라 동문 터로 향한다. 성 전체는 둘레 3.3km 남짓 맞춤한 거리다. 잠깐 거리에 완동문 터다. 곧장 길을 서쪽으로 잡는다. 유명한 콩나물국밥집과 헌책방이 즐비한 '동문 예술 거리'를 지난다. 적당한 폭의 길가엔 2∼3층 단정한 건물들이 열병식 한다.

전주부성 현재의 시가지에 옛 성벽과 4대문, 성안팎 시설물의 위치를 표시한 안내판.
전주부성현재의 시가지에 옛 성벽과 4대문, 성안팎 시설물의 위치를 표시한 안내판. ⓒ 이영천

팔달로를 건너니 선남선녀의 미래를 축복하는 '웨딩 거리'가 마중한다. 중간중간 키 큰 나무와 잔잔하게 미소 짓는 정갈한 거리 표정에서 은근한 정감이 돈다. 일본 우동집이던 '박다옥'이 사뭇 옛 자태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패서문 터에 서니, 여러 생각들이 어긋난 시선처럼 각기 다른 곳을 향한다. 길은 차이나타운이다. 전라도 최대 시장이었다는 서문시장이 동학혁명 때 잿더미가 되었다. 이곳을 복원하려 약령시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옛 영화에는 이르지 못한다. 을사(1905)년에 서문 밖에 너른 부지를 구한 교회는, 강제 병합된 이듬해 큰 교회를 세웠다.

풍패지관 전주부성의 객사인 풍패지관. 규모에 있어 왕조 탯줄 도시의 위상에 걸맞다.
풍패지관전주부성의 객사인 풍패지관. 규모에 있어 왕조 탯줄 도시의 위상에 걸맞다. ⓒ 이영천

길을 건너니 객사 풍패지관이다. 굉장한 규모는, 왕조의 탯줄 도시로 손색없다. 객사 옆 사잇길이 이채롭다. 옛길을 보행자 전용도로로 바꾸었다. 사람만 다니는 길에서 느끼는 색감이 따스하다. 어깨를 부딪쳐도 상관없다. 지나는 사람들 모두가 미소 띤 얼굴이다. 이 길로 수백m 북쪽으로 가니 공북문 터다.

북문 터 조형물이 '영화의 거리'와 함께 전주영화제의 이미지가 되었다. 여기서 전주시청에 이르던 슬럼가를 헐어 공간이 새로 조성되었다. 공북문에서 풍남문을 잇는 객사 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한다.

객사길 북문에서 객사인 풍패지관에 이르는 보행자 전용 길. 이 길로 곧장 가면 풍남문에 이른다.
객사길북문에서 객사인 풍패지관에 이르는 보행자 전용 길. 이 길로 곧장 가면 풍남문에 이른다. ⓒ 이영천

한때 이 공간은 신시가지 개발로 음울할 만큼 위축되기도 했었다. 옛 전북도청사 철거와 전라감영 복원을 두곤 논쟁도 일었다. 조선총독부 청사 논쟁에 버금갔다. 감영은 복원 중이고, 슬럼화이던 공간은 다른 색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무척 반가운 일이다. 한옥마을 역할이 컸겠으나, 감영과 객사길 등 전통이 비추는 빛과 색이 무언지 사람들이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게 고무적이다.

감영을 지나 남문 길로 든다. 곳곳에 옛 정취가 물씬하다. 짙게 물든 근대의 설렘이 나이 든 풍취로 남았다. 풍남문 위용을 다시 느낀다. 옹성을 둘러 2층 누각을 세웠다. 좌우에 포루와 종각을 두었다. 앞뒤로 풍남문과 호남제일성 편액이 붙었다. 남부시장에서 뜨끈한 콩나물국밥으로 사라진 성벽 자리에 쌓인 시간의 무게를 위무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전주를 상찬한다. 하지만 21세기형 삶과 복거(卜居)는 새로운 방식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생각과 철학의 대전환이 지름길 아닐까? 야만의 시대를 극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상생과 협력, 나눔과 이타심, 상식과 관용이 향기로운 공기처럼 흐르는 그런 세상 아닐까? 모든 게 온전한 고을(全州)은 꼭 그래야만 한다.

#경기전#전동성당#풍남문#풍패지관#전주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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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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