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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금강하구다. 400km를 쉼 없이 달려온 강물이 바다에 몸을 푸는 기수역이다. 민물과 만난 바닷물이 수많은 생명체를 잉태한다. 바다에 삶을 기댄 어부는 그 풍요로움을 고된 노동으로 거둬들인다.

금강 하구 금강 하구를 막은 제방을 사이로 물빛이 다르다. 멀리 왼쪽이 군산, 오른쪽이 장항이고 그 너머 바다가 기벌포, 백강, 진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바다다.
금강 하구금강 하구를 막은 제방을 사이로 물빛이 다르다. 멀리 왼쪽이 군산, 오른쪽이 장항이고 그 너머 바다가 기벌포, 백강, 진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바다다. ⓒ 서천군청

하지만 두 물길이 굵은 콘크리트 벽에 서로 섞이지 못하고 막혀버렸다. 그 바람에 강 끝자락 물살은 본성마저 바꿔야만 했다. 겨울이면 먹이를 찾아 날아든 수십만 마리 철새 떼가 연출하는, 붉은 석양이 배경인 황홀한 군무가 위로라면 위로일까. 더구나 이곳 물살은 늘 급박한 역사의 격랑에 내놓이곤 하지 않았던가?

금강하구는 충청·전라의 명운을 결정하는 중요한 바다였다. 채만식은 소설 <탁류>에서 장항과 군산 사이로 흐르는 물이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이 다한다'고 표현했다. 명량에서 승리한 이순신도 배를 몰아 고군산도에 이르러 이 바다를 지켜내려 했었다.

강이 다한 바다는 여러 이름을 가졌다. 소정방이 올 때와 설인귀를 몰아낼 때는 '기벌포'였다. 논란은 있으나, 백제 부흥군을 도와 왜 수군이 나당연합군과 해전을 벌일 때는 '백촌강'이다. 그렇듯 이 바다는 삼국시대엔 동북아 세력 재편을 가져온 대격전지였고, 여말선초엔 드넓은 평야를 낀 왜구의 주 침략지이자 당대 최신 무기인 '함포'로 왜구를 격파한 방어기지이기도 했다. 교과서에 나온 '진포대첩' 바다다.

서천읍 서천 남산에서 바라 본 서천읍 전경. 뒤로 오석산이 보이고, 사진 한가운데 낮은 둥지 같은 산에 노란 띠처럼 두른 '서천읍성'의 자취가 보인다.
서천읍서천 남산에서 바라 본 서천읍 전경. 뒤로 오석산이 보이고, 사진 한가운데 낮은 둥지 같은 산에 노란 띠처럼 두른 '서천읍성'의 자취가 보인다. ⓒ 이영천

이곳에 그나마 남아있는 서천읍성이나 비인읍성이 모두 세종 치세에 쌓았거나 석성으로 변모한다. 한산읍성도 문종 때 고쳐 쌓았으니, 왜구와 해안 방어, 금강하구를 왜 지켜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했다고 여겨진다. 이런 측면에서 세종대왕은 도시계획가이자 군사전략가였으며, 국토 및 지역계획가임이 분명하다.

오래전 푸근한 인상을 잊지 못해 작년 화재로 임시 개장한 특화시장을 찾았으나, 어디 예전만 하겠는가. 거기서 백제의 산성 흔적이 남았다는 남산으로 걸음을 옮긴다.

기벌포와 진포대첩

해발 150m의 낮은 남산에 헐떡거린다. 산정에 남은 산성이 이 땅에서 번성한 백제의 옛 영화를 상기시킨다.

서천 남산 산성 서천읍 남쪽에 동-서로 길게 누운 남산의 정상에 남아 있는 백제의 옛 산성.
서천 남산 산성서천읍 남쪽에 동-서로 길게 누운 남산의 정상에 남아 있는 백제의 옛 산성. ⓒ 이영천

산 남쪽이 넓게 다가든다. 품을 넓혀가며 양양하게 흐르는 금강은 몸피가 굵다. 그러나 하구가 막혀 호수가 되고 말았다. 굴뚝만 남은 장항제련소 터에 새로 들어선 공장은 분주히 꿈틀거리고, 군산을 잇는 동백대교가 아련하다. 장항읍 푸른 송림이 울울하다. 송림 밖 바다가 기벌포다.

의자왕의 주색을 비판하던 성충(成忠)이 옥에 갇혀 죽음으로 '육로는 탄현을, 수로는 기벌포를 방어하라'는 충언을 남긴다. 그러나 백제는 전혀 다른 전술로 나당연합군에 맞섰고, 결국 패하고 만다. 이때 서해를 건너온 소정방이 덕적도에서 배를 이끌고 기벌포에 정박한다. 강물을 거슬러 육로의 김유신 부대와 협공하여 사비성을 함락시킨다. 660년이다.

금강과 기벌포 서천 남산 정상에서 바라 본 금강과 장항, 군산의 모습. 오른쪽 바다에서 한때 동북아의 세력이 재편되었고, 조선 건국으로 이어진 사건이 일어났다.
금강과 기벌포서천 남산 정상에서 바라 본 금강과 장항, 군산의 모습. 오른쪽 바다에서 한때 동북아의 세력이 재편되었고, 조선 건국으로 이어진 사건이 일어났다. ⓒ 이영천

그로부터 17년 후인 676년 상황은 정반대로 된다. 한탄강을 낀 전곡의 '매소성'에서 신라군이 당나라군을 대파한다. 수만을 살상하고, 당의 전매특허인 기병대를 격파하면서 말 3만 필을 전리품으로 챙긴다.

당나라는 설인귀를 전략 요충지인 기벌포로 급파한다. 신라도 사찬 벼슬의 시득(施得) 하여금 기벌포 점령에 나선다. 해전 초기 신라가 연패를 당하나 차차 전력을 만회해 전세를 역전시킨다. 크고 작은 22번의 전투 끝에 마침내 승리한다. 기벌포 해전이다. 이 전쟁을 끝으로 당나라 군대를 완전히 몰아낸다. 기벌포 해전과 관련된 '장암진성'이 장암리에 흔적으로 남았다.

기벌포 해전 당나라를 몰아내고 통일신라가 성립되는 기화가 된 해전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다.
기벌포 해전당나라를 몰아내고 통일신라가 성립되는 기화가 된 해전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다. ⓒ 서천군청

어렵사리 화약 제조기술을 터득한 최무선이 세계 최초로 '함포'를 만들어 이 바다에서 왜구의 전선 500척을 수장시킨다. 진포대첩(1380)이다. 배를 잃은 왜구가 내륙 깊숙이 침략해 노략질을 일삼는다. 군사를 나누어 옥천과 영동, 상주와 선산은 물론이고 함양을 지나 남원에 이른다. 이때 이성계가 남원 운봉에서 왜구를 전멸시킨다. '황산대첩'이다. 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성계는 조선 건국의 초석을 놓는다.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좌르르 쏟아내던' 장항과 군산 사이는 바다는, 흐름이 막혀 처치 곤란한 퇴적에 신음 중이다. 부드럽던 펄 대신 크고 작은 자갈이 파도에 드러났다. 새 떼며 갖은 바다생물 먹이사슬로 이어지던 생태계는 언젠지 모르게 주저롭게 변하고 말았다.

갯벌은 얕아졌고, 둑에 갇힌 하구는 급격하게 육지화해 퇴적물만 쌓인다. 생물이 떠난 삭막한 자리가 겨우 연명하고 있는 셈이다. 둑을 허물어 자연이 스스로 치유할 기회를 주는 건 어떤가?

서천읍성

산에서 내려와 그리 멀지 않은 읍내로 향한다. 1km 남짓 일정 규격으로 제단 된 논길을 따라 굴다리를 지나면 도회지가 급격히 다가든다. 서천읍 군사리다. 읍의 뼈대인 남북축 주 가로망인 군청로에 접어든다.

서천 봄의 마을 옛 시장을 이전한 자리에 시민 문화의 터전이 들어섰다. 시민과 건축 주체 간 끊임 없는 대화와 절충으로, 도시재생의 모범으로 꼽히는 곳이다.
서천 봄의 마을옛 시장을 이전한 자리에 시민 문화의 터전이 들어섰다. 시민과 건축 주체 간 끊임 없는 대화와 절충으로, 도시재생의 모범으로 꼽히는 곳이다. ⓒ 이영천

낡은 옛 시장을 철거한 자리에 시민의 뜻을 모아 건립한 문화시설 '서천 봄의 마을'이 이웃인 듯 인사한다. 성공적인 도시재생 사례로 유명 건축상 수상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 설득과 합의에 이르는 과정은 지루하고 힘든 인고의 길이었다. 작은 읍에 이런 건축이 가능하게 이끌어준 군민들의 성숙한 시민의식에 경의를 보낸다.

군청로 북쪽 끝단에 이르자 새 둥지처럼 아늑한 분지가 열린다. 군청은 읍 외곽으로 이전하였고, 한쪽 언덕길을 틀어 오르면 여중·고가 자리한다. 그 아래로 민가 수십 채가 오밀조밀하다. 옛 서천읍성 안의 현재 모습이다.

서천 읍성 복원한 동문 주변의 읍성 모습. 동문 밖 가파른 언덕 아래 향교가 자리한다.
서천 읍성복원한 동문 주변의 읍성 모습. 동문 밖 가파른 언덕 아래 향교가 자리한다. ⓒ 이영천

남산-서천읍성-오석산이 남북으로 축을 이루며 나란한 곳 중간이다. 낮은 산 성벽에 오르면 신기하게도 사방이 한눈에 잡히는 곳이다. 동문과 남벽, 서벽 일부가 복원되어 있고, 긴 계획으로 읍성 전체를 복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이 읍성을 보면서 없애기보다 제모습으로 돌아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한다. 그나마 자취를 더듬어 잃어버린 옛 모습을 되찾아가려는 노력은, 관광을 넘어 정체성 회복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생각이다.

서천읍성_1872년지방지도_부분 읍성 안 동헌자리엔 공동주택이, 객사 자리엔 여중고교가 들어서 있다. 둥지 같은 산자락 지형을 따라 성곽을 쌓았다. 지도 아래 좌측 장암진성이 뚜렷한 점으로 미루어, 조선 후기까지 장항의 이 진성을 중요시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천읍성_1872년지방지도_부분읍성 안 동헌자리엔 공동주택이, 객사 자리엔 여중고교가 들어서 있다. 둥지 같은 산자락 지형을 따라 성곽을 쌓았다. 지도 아래 좌측 장암진성이 뚜렷한 점으로 미루어, 조선 후기까지 장항의 이 진성을 중요시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여러 설에도 불구하고 진포대첩에서처럼 왜구가 금강 물줄기를 타고 내륙을 침략하는 행위를 방어하고자 세종 때 쌓았다 추정한다. 성 둘레는 1,068m, 높이 3m로 현재 성 흔적은 영조 27년(1751)에 쌓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인읍성

서천읍에서 비교적 먼 항구인 서면 마량포로 향한다. 쪽빛 바닷물이 서해의 색깔에서 벗어나 있는, 이맘때면 진한 동백꽃이 연상되곤 하는 포구다. 낚시바늘처럼 바다로 뾰족하게 구부러진 땅끝에 항구가 앉았다.

저술은 물론 여전히 방송 활동도 활발한 어느 작가와 2008년 초 여기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 밤낚시와 알싸한 소주, 당시 세태 등에 대해 격렬하고 진지한 토론을 여럿이 벌인 기억도 생생하다. 정치를 떠난 그분은 지금, 일상은 물론 표정까지 잔잔하고 푸른 마량포 앞바다처럼 바뀌었다.

비인읍성_1872년지방지도_부분 해안가를 방어 할 목적으로 쌓은 비인읍성의 모습이 아담하게 그려져 있다. 오히려 좌측 길게 뻗은 반도 끝 마량진이 더 큰 되회지인 것처럼 표현되었다.
비인읍성_1872년지방지도_부분해안가를 방어 할 목적으로 쌓은 비인읍성의 모습이 아담하게 그려져 있다. 오히려 좌측 길게 뻗은 반도 끝 마량진이 더 큰 되회지인 것처럼 표현되었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마량진은 비인의 만호성이다. 성곽 없는 진성으로, 해안방어기지였다. 석탄화력발전소와 회(灰) 처리장이 너른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항구다.

마량진에서 해수욕장을 지나 서해안고속도로 춘장대 나들목을 향해 가다 보면, 비인면 행정복지센터다. 초등학교와 담벼락 하나 사이로, 옛 관청의 기운이 물씬하다. 땅은 그 쓰임에 따라 특유의 기운을 내뿜기 마련이다. 비인 중심인 이곳도 마찬가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산자락이 뒤를 받치고 있고, 학교며 파출소 등이 한곳에 밀집해 있다. 수백 년 이어온 토지이용의 흔적이고, 그 결과물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세종 3년(1421) 왜구 침략을 막아내려, 고려 중기에 흙으로 쌓은 성을 다시 돌로 고쳐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 둘레 3km에 높이 2m 내외이며, 곳곳이 훼철되었어도 남은 성벽은 아직도 당당하다.

비인읍성 그리 높지 않은 성벽이 여전히 당당하다. 긴 마름모 꼴 성곽 상당 부분이 남았고, 민가 사이로 지나는 옛 성벽이 아련한 향수마저 느끼게 만든다.
비인읍성그리 높지 않은 성벽이 여전히 당당하다. 긴 마름모 꼴 성곽 상당 부분이 남았고, 민가 사이로 지나는 옛 성벽이 아련한 향수마저 느끼게 만든다. ⓒ 이영천

풍요로운 서천을 기억한다. 이곳에서 채취한 물김이 광천으로 가 '광천김'이라는 명성으로 소비된다. 불에 타 초라하게 임시로 내몰린 특화시장의 퍼덕이는 생명력도 생생하다. 넉넉한 인심에 지천인 어패류를 안주 삼아 마시던, 달착지근한 소곡주의 향이 여전히 뇌리를 지배하고 있다. 수십만 마리 철새 떼가 연출하는 군무에 넋마저 나가버린 강렬한 인상에, 겨울이면 금강하구로 발길이 저절로 이끌린다.

한때는 역사의 중심지였으나 흐름이 막혀버린 금강 물줄기처럼 답답해진 장항과 군산의 바다를 아프게 회억해 본다. 무엇 때문일까? 이 풍요로운 고장이 푸대접받아야만 하는 근인은 무엇일까. 옛 성곽에 낀 이끼에서 그 지혜의 한 가닥이라도 찾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기벌포해전#서천읍성#비인읍성#서천남산산성#마량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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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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