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천수만의 석양녘 하늘을 날고 있는 흑두루미
천수만의 석양녘 하늘을 날고 있는 흑두루미 ⓒ 김병기
겨울진객 흑두루미의 군무, 황홀경에 빠지다 김병기

불그스레한 파스텔 톤 도화지에 찍힌 점, '검은 별' 같았다. 가까이 다가오면서 언뜻 내비치는 흰 빛은 길고 하얀 목의 실루엣이다. 바다를 향해 탁 트인 벌판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수백 마리의 무리가 논을 박차고 일제히 솟아올라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군무를 췄다. 검은 점은 날개를 펼쳐 어깨동무를 하듯이 다가오면서 합창을 했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흑두루미 수천 마리가 연출한 황홀경은 붉은 노을이 검게 타버릴 때까지 이어졌다. 이 순간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였다. 순식간에 나타난 승용차 10여 대에서 내린 사람들은 대포 같이 큰 카메라를 들고 논바닥으로 허겁지겁 뛰었다. 일찍 와서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누르던 이경호 대전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의 입에선 연신 이런 감탄사가 터졌다.

"와, 대박이네~ 와, 진짜 대박이여~"

물 먹는 흑두루미... 성큼성큼 걷는 황새

 서산 천수만의 거대한 농경지
서산 천수만의 거대한 농경지 ⓒ 김병기

지난 2월 28일 찾아간 충남 서산 천수만. 충남 육지부와 안면도 사이에 있는 이곳은 세계적인 철새도래지이다. 1984년 간척사업 때 방조제로 이곳을 막자 인공 담수호인 간월호와 부남호가 형성되었고, 주변에 6400ha에 달하는 거대한 농경지가 만들어졌다. 시베리아 등에서 동남아시아를 오가는 철새들은 추수 때 떨어진 낱알을 먹으면서 장거리 비행을 앞두고 몸집을 키우며 연료를 비축한다.

이날 낮, 간월호 옆 A지구 농경지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희귀한 장면이 연출됐다. 흑두루미 한 마리가 큰기러기 무리 옆의 물웅덩이에서 긴 목을 아래쪽으로 숙여 물을 한 모금 입에 문 뒤에 머리를 하늘로 치켜들어 꿀꺽 삼키는 모습이다. 이솝 우화가 떠올랐다. 여우의 집에 초대되어 접시에 담긴 국물 앞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두루미. 천수만의 흑두루미는 달랐다.

 천수만 흑두루미
천수만 흑두루미 ⓒ 김병기

20여m 떨어진 곳에서는 황새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으면서 논에 있는 먹이를 찾으며 두리번거렸다. 한 곳에 3종의 멸종위기종이 모여 있는 진풍경이다. 황새를 좀 더 가까이 보려고 차를 앞으로 이동했더니, 반대편에서 요란스러운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논바닥에서 쉬던 수백마리의 흑두루미들이 불청객을 보고 놀라서 일제히 날아오른 것이다.

흑두루미들은 내 머리 바로 위에서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을 가리고 날았다. 몇 해 전, 흑두루미를 취재하려고 순천만에 갔었을 때에도 이렇게 가까이서 겨울진객을 관찰하지는 못했었다.

이경호 처장은 "이곳은 흑두루미들이 일본 이즈미시와 순천만에서 월동을 마치고 북상하기 위해 천수만에 잠시 모여든 중간 기착지"라면서 "캐나다 두루미나 검은목두루미, 시베리아 흰두루미, 재두리미도 일부 섞여 있는데, 3월 첫 주나 둘째 주에는 이곳을 뜰 것"이라고 설명했다.

천수만은 200여 종의 철새를 한 번에 관찰할 수 있는 곳이었다.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논둑 바로 옆에서 큰기러기와 쇠기러기들이 한가하게 모이를 주워먹는 건 흔한 풍경이다. 세종시의 장남들판에 날아온 큰기러기들은 300~400m 정도만 다가가도 화들짝 놀라서 날아오르는 데, 이곳에서는 차안에서 불과 20~30m 거리에 있는데도 뒤뚱거리며 살짝 자리를 피했다.

개똥지빠귀는 나뭇가지에서 쉬고, 논바닥에서는 종다리와 밭종다리, 왜가리 등의 새들이 쉴 새 없이 날아다녔다. 하늘에서 이들을 노리는 맹금류들, 공중을 선회하던 흰꼬리수리와 독수리는 잠시 논바닥에 내려앉아 깃털을 골랐다. 전봇대 위에 앉은 큰말똥가리는 코앞에서 차 문을 열자 비로소 똥을 싸면서 높이 날아올랐다. 천수만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자연사 박물관이었다.

 천수만의 큰말똥가리
천수만의 큰말똥가리 ⓒ 김병기

 천수만의 큰기러기
천수만의 큰기러기 ⓒ 김병기

 천수만의 황새
천수만의 황새 ⓒ 김병기

큰고니들의 집단 난투극? 사랑 찾는 짝짓기였다

농경지를 가로지르는 해미천을 살폈다. 큰고니 20여 마리가 청둥오리와 뿔논병아리 같은 새들과 함께 물 위에 떠서 유유히 놀고 있었다. 이 장면을 영상으로 담으려고 잠시 정차했는데 기이한 장면이 펼쳐져 숨을 죽이면서 지켜봤다. 야생에서의 짝짓기를 위한 집단 난투극이었다.

시작은 큰고니 3마리가 편을 지어 다른 무리를 향해 소리를 지르면서부터였다. 긴 목을 움츠렸다가 내뻗으면서 상대방을 위협하듯 바짝 다가가면서 고래고래 울어댔다. 표적이 된 큰고니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들듯하면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몸이 서로 닿자마자 이들은 크게 날갯짓을 하며 노랑 부리로 상대방을 쪼아댔다. 미끄럼을 타듯이 물위를 오가며 집요하게 상대방을 쫓아내는 큰고니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서너 쌍이 무리에서 유유히 떠나면서 서로의 목을 쓸어내리며 스킨십을 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카메라로 찍으니 '하트' 모양이 연출됐다. 그 뒤에도 전투는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짝짓기에 성공한 쌍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데이트를 했다. 이날 전투는 10여분에 걸쳐 진행됐고, 그 뒤에야 평화가 찾아왔다.

이경호 처장은 " 남쪽으로 내려와 겨울을 보내는 월동지에서는 무리를 지어 활동을 하는데, 번식지에 가서는 짝을 이뤄서 생활을 한다"면서 "번식지로 향하는 중간기착지인 이곳에서 자기 짝을 찾고, 첫날 밤을 지낸 뒤에 잉태한 상태로 툰드라 지역 등으로 날아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짝짓기 전에 다투고 있는 큰고니
짝짓기 전에 다투고 있는 큰고니 ⓒ 김병기
천수만의 겨울은 사랑의 계절 #shorts 김병기

'새들의 천국' 천수만의 눈부신 겨울... 백미는 석양녘

 천수만의 노랑부리저어새
천수만의 노랑부리저어새 ⓒ 김병기

큰고니뿐만이 아니었다. 드넓은 농경지처럼 해미천도 수많은 종류의 새들의 쉼터였다. 중대백로와 가창오리, 고방오리, 흰뺨검둥오리, 청둥오리, 넓적부리, 큰재갈매기, 한국재갈매기, 붉은부리갈매기, 가마우지 등이 물 위에서 헤엄을 치거나, 모래톱에 앉아 쉬었다. 노랑부리저어새 한 쌍도 물가에서 어슬렁거렸다.

이 처장은 "이곳은 대규모 농경지이고, 습지나 하천의 물고기 등 먹이가 아주 풍부한 곳이어서 새들이 장거리 이동을 앞두고 충분한 열량을 채울 수 있는 적합한 장소"라면서 "비행 속도가 빠른 흑두루미는 3~5일에 걸쳐 시베리아에 도착을 하는데, 길게는 3주 정도 날아가는 철새들도 있다. 3월 중순이면 대부분 북상한다"고 말했다.

거대한 농경지 곳곳에는 마시멜로와 비슷한 모양의 '곤포 사일리지'가 놓여져 있었다. 가을에 벼를 추수한 뒤 남은 볏짚을 곤포에 밀봉시켜 만든 것으로 소먹이용이다. 농촌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 처장은 "과거 현대(그룹)가 이곳을 관리할 때는 워낙 농경지가 방대해서 엉성하게 수확을 하다보니 떨어진 낱알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농경지를 분양을 하기에 곤포 사일리지가 등장했다"면서 "이 때문에 먹이가 많이 부족하고, 종수와 개체수도 많이 줄어든 상태"라고 우려했다.

이 처장은 이어 "이곳이 인간과 사람이 공존할 수 있는 땅으로 남으려면 서산시도 순천시처럼 흑두루미 생태관광을 통해 지역 경제를 살리는 보존정책을 적극적으로 펼 필요가 있다"면서 "홍콩의 마이포 습지공원 사례 등을 이곳에 접목시킨다면 자연과 인간이 윈윈할 수 있는 생태지역으로 바뀔 것"이라고 제안했다.

 천수만의 석양녘 하늘을 날고 있는 흑두루미
천수만의 석양녘 하늘을 날고 있는 흑두루미 ⓒ 김병기
 천수만의 흑두루미
천수만의 흑두루미 ⓒ 김병기

이날 목격한 천수만 풍광의 백미는 석양녘에 연출됐다. 해가 떨어지기 직전인 오후 6시 10여분께였다. 수천 마리의 흑두루미 떼가 들판에서 낱알을 주워먹으면서 합창을 했다.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배경으로 논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1열, 때로는 2열 횡대로 늘어서서 붉은 노을의 중앙에 검은 선을 그었다가 화려한 날갯짓을 하면서 논에 안착했다.

붉은 휘장 속에 깃든 원초적 야생의 풍경, 이 황홀경은 20여분 간 지속됐다. 지구상에서 멸종될 위기에 처한 새들이 석양녘에서 펼치는 아름다운 향연이었다.

천수만의 황홀경, 타는 노을 속 흑두루미 날다 김병기

[관련 기사]
큰고니 20마리의 전투? 난장의 끝은 황홀경 https://omn.kr/2cex9
이 사진 찍으려고... 차들이 빽빽합니다 https://omn.kr/2ceyn

#천수만#흑두루미#철새#큰고니#큰기러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환경과 사람에 관심이 많은 오마이뉴스 기자입니다. 10만인클럽에 가입해서 응원해주세요^^ http://omn.kr/acj7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