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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가슴에 품어 본 적 있는가? 찰랑찰랑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그런 하늘 말이다. 한없이 높아만 보이는 무한의 창공은, 뭔지 모를 넉넉함마저 안겨주지 않던가.

땅에도 그런 빛깔이 흐른다면? 휘감아 흐르는 맑은 물이 수없이 머리를 돌에 부딪는다. 얼마나 부딪쳤으면 퍼런 멍이 들고 만다. 절정의 순진무구다. 그런 빛깔로 물든 맑음이 남색(藍色)이다. 쪽빛이다. 떠안아 간직하고 싶어지는 물빛이다.

쪽빛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포구였나 보다. 얼마나 푸르렀으면 남포(藍浦)였을까? 아니면 이 지방에도 염색 원료로 사용했던 '쪽'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을까. 눈처럼 새하얀 베에 쪽빛을 염색하는 행위도, 하늘 닮은 빛깔을 품어보려는 순진무구다. 결코 가벼운 색이 아니다.

은은한 쪽빛 옷감은, 시원한 청량감으로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옛 남포현에서 쪽 염색이 얼마나 활발했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꾸준히 이어져 온 전통임은 분명하다. 쪽을 우려내고 발효시켜 염료로 만드는 과정도 긴 기다림이다.

남포읍성(1872년_지방지도_부분) 네모난 읍성이 관청 건물로 빼곡하다. 읍성 가까이 까지 바닷물이 넘실거렸음을 옛 지도는 보여준다.
남포읍성(1872년_지방지도_부분)네모난 읍성이 관청 건물로 빼곡하다. 읍성 가까이 까지 바닷물이 넘실거렸음을 옛 지도는 보여준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무창포 옆 용두해수욕장과 대천해수욕장 사이 바다가 남포방조제에 막혀 버렸다. 막힌 바다는 수십 만㎡의 농지가 되었다. 반대로 그 넓이만큼 갯벌도 사라졌다. 막히기 전 읍성에서 바다까지 5리 남짓이었으니, 쪽빛 바다가 무시로 넘실거렸을 터이다.

진서루 성안 외삼문인 진서루 뒤로 내삼문(옥산아문)과 동헌 등이 봄볕을 안아 평화롭다.
진서루성안 외삼문인 진서루 뒤로 내삼문(옥산아문)과 동헌 등이 봄볕을 안아 평화롭다. ⓒ 이영천

성안이 평화롭다. 따스한 봄볕이 쏟아지고, 사방은 고즈넉하다. 쪽빛 하늘에 퍼덕이는 새의 날갯짓만이, 쪽물을 빚는 장인의 바지런한 손길 같다. 곳곳이 허물어졌어도 제 모습을 지켜내려 몸부림치는 성곽이 애잔하다. 마치 대처로 돈 벌러 간 자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촌로의 뒷모습 같다. 하염없이 동구 밖을 쳐다보지만, 자식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번성했던 한 시대를 고이 기억할 뿐, 내세워 자랑하지 않는다. 읍성의 옛 영화도 긴 기다림의 쪽빛이었을까. 나긋이 지줄대는 이끼 낀 성곽이 푸르던 옛 영화를 전설처럼 들려준다. 꺾이지 않는 의기와 추상같은 기상으로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이 있었노라고.

남포읍성

읍성 동쪽으로 차령산맥 굵은 줄기가 뻗어 뒤를 든든히 받쳐준다. 따라서 성은 자연스럽게 바다가 있는 서쪽을 향해 앉았다. 이런 연유로 서문이 정문이었으리란 걸 도로망과 토지이용으로 가늠해 본다.

남포읍성 곳곳이 헐리고 남루하나, 끈질기게 제 모습을 지켜내고 있다. 동문~남문 까지 성벽이 복원 중이다.
남포읍성곳곳이 헐리고 남루하나, 끈질기게 제 모습을 지켜내고 있다. 동문~남문 까지 성벽이 복원 중이다. ⓒ 이영천(현장안내판)

서쪽으로 앉은 동헌과 외삼문인 진서루의 향을 통해서도 이런 경향성은 확실해 보인다. 물론 남문 밖에도 전통 마을의 전형이랄 수 있는 촌락이 형성되어 있다.

크고 작은 돌로 쌓아서인지 성벽이 친근하다. 세종 때의 여느 성곽처럼 아래엔 큰 돌로 기초를 다지고 위로 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돌을 맞물려 쌓았다. 옹성 절반이 도로에 싹둑 잘려 나간 서문에 이르니, 낡은 도포 자락처럼 곳곳에 허물어진 흔적이 역력하다. 서문에서 남포초등학교까지 길이 곧다. 이 길은 학교가 들어서기 전 곧장 동문까지 닿았으리라.

헐리고 허름한 성벽에 성이 견뎌온 인고의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특이함을 찾을 수 없는 성안 토지이용이다. 농사를 짓는 게 분명한 민가 2채와 서문 안 길 위아래로 펼쳐진 논밭이 성안의 절반을 차지한다. 성의 동쪽에 치우쳐 초등학교가 앉았다. 전교생이 30여 명 남짓이란다. 남문 못 미쳐 동문으로 가는 길이 좁아 구불거린다. 남문 역시 옹성을 잃고 남루하다.

동문 옹성 초등학교 옆 동문 옹성이 헐리어 누추하다. 성문 터도 흔적마저 사라졌다.
동문 옹성초등학교 옆 동문 옹성이 헐리어 누추하다. 성문 터도 흔적마저 사라졌다. ⓒ 이영천

학교 앞을 지나 동문으로 간다. 땡땡땡~ 금방이라도 수업 종이 울릴 것 같은 아담한 학교는, 단정하게 색칠된 교사에 잔디운동장이다. 동문 옹성 역시 곳곳이 헤지고 기울었다. 여기서부터 남문까지 낡아 헐린, 읍성 1/3에 해당하는 성벽의 복원이 한창이다.

동문에서 성벽에 올라 북벽을 걷는다. 불과 수십m에서 네모난 치성을 만난다. 나이 들어 아름드리로 굵어진 고목의 안내를 받으며 동헌에 이른다. 고려 시대 목조건물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다. 전면 7칸 측면 3칸으로 무척 웅장한 건물이다. 조선의 여느 행정기관이 그렇듯 이곳도 나라를 잃고 일시적으로 학교로 쓰였다니, 이 땅 곳곳에 새겨진 아픔이 어딘들 다르랴.

동헌-옥산아문-진서루 북벽 치성에서 바라 본 옛 관청인 동헌과 내삼문(옥산아문), 외삼문(진서루)이 푸른 하늘 아래 늠름하다.
동헌-옥산아문-진서루북벽 치성에서 바라 본 옛 관청인 동헌과 내삼문(옥산아문), 외삼문(진서루)이 푸른 하늘 아래 늠름하다. ⓒ 이영천

동헌 내삼문은 옥산아문(玉山衙門)이란 현판을 건 7칸 부속건물이다. 그 앞에 외삼문인 2층 누각 '진서루'가 학교 담장에 밀려 문지기처럼 서 있다. 누각에 오르면 뒷산은 물론 멀리 바다가 지척으로 다가든다.

북벽 북벽에 드리운 고고한 소나무가 마치 성곽의 친구처럼 다정해 보인다.
북벽북벽에 드리운 고고한 소나무가 마치 성곽의 친구처럼 다정해 보인다. ⓒ 이영천

북벽을 따라 완보한다. 굵고 잘생긴 소나무 몇이 성벽의 오랜 친구처럼 늠름하다. 온갖 풍상을 겪었음이 분명한 꼿꼿한 소나무에게 새삼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진다. 가까운 해미읍성이나 고창읍성만큼은 아니어도 이토록 온전하게 성벽을 지켜낸 힘은 저들 소나무가 지키고 가꿔온 기상이 아니었을까. 이토록 아담한 성곽이 홍주로 진군하는 의병에 맞서 5일을 버텨냈다니…

홍주 의병

홍주는 목사가 다스리던 큰 고을이다. 구한말 홍주에서 2차례 엄청난 의병 봉기가 있었으니, 어두운 우리 근대사가 홍주가 비춘 강렬한 빛에 얼마나 의지했는지….

을미사변과 뒤이은 단발령에 반발한 1896년 의거는, 김복한 등 유생이 주도한 부르주아적 의병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농민의 참여는 제한적이었다. 을사늑약 후인 1906년에도 김복한은 다시 봉기하지만, 붙잡혀 공주로 호송되는 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받아 평생 불구로 살아야 했다.

을미사변 후 낙향하여 청양 정산면 천장리에 은둔하던 민종식이, 그 뒤를 잇는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은둔지에서 극비리에 의병을 규합한다. 가산을 털어 무기를 준비한다. 이듬해 3월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공격해 보았으나, 중과부적임을 깨닫고 전략적으로 물러난다.

지티봉기 기념비 민종식이 이끄는 홍주 의병이 부여 홍산 지티에서 봉기를 기념하는 비석 제막식(2021. 11. 29) 광경.
지티봉기 기념비민종식이 이끄는 홍주 의병이 부여 홍산 지티에서 봉기를 기념하는 비석 제막식(2021. 11. 29) 광경. ⓒ 부여군청

한달 후에 부여 홍산에서 재봉기한다. 부대를 인근 여산으로 몰아 의병을 모집한다. 전라도 곳곳에서 수많은 장정이 모여들자, 홍산 북쪽 구룡천 상류 지티마을로 진출하여 봉기를 선언한다. 여러 고을의 중간지점으로 전술적 요충지다. 지난 2021년 11월 부여군은 이때의 봉기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다. 민종식은 여기서 의병 대장으로 추대된다.

의병이 서천읍성과 비인읍성을 일거에 점령한다. 세를 과시하며 이웃한 판교마저 점령하고, 남포읍성에 이른다. 성을 지키는 관군과 지루한 공방을 주고받는다. 그러기를 닷새다. 피아간 큰 피해는 없었으나, 작은 성에 갇힌 관군의 화력이 바닥을 보이고, 마침내 성은 함락된다.

서쪽 성벽 고고한 소나무가 잘 지키고 있는 성벽이, 홍주 의병의 기세를 전설처럼 이야기 하는 듯 하다.
서쪽 성벽고고한 소나무가 잘 지키고 있는 성벽이, 홍주 의병의 기세를 전설처럼 이야기 하는 듯 하다. ⓒ 이영천

보령과 청양을 점령한 의병은 기세를 몰아 내포의 중심지인 홍주성을 공략하여 점거한다. 이때 의병이 5천여 명에 달했다.

마도일기(馬島日記)

의병의 남포읍성 공략이 1906년 05월 14일이다. 그 와중에 의병장 민종식의 권유로 남포의 유력 유학자인 유준근 선생이 의병에 합류, 유생을 대표하는 장군에 임명된다. 내친김에 홍주성 공성에도 참여하고, 일본군의 극악무도한 진압에 열흘 가까이 항쟁을 이어간다.

마도일기(표지) 홍주 의병 주도자 9인 중 한 분인 유준근 선생이 대마도에 끌려가, 홍주 의병과 대마도에서의 생활 등등을 기록한 책이다.
마도일기(표지)홍주 의병 주도자 9인 중 한 분인 유준근 선생이 대마도에 끌려가, 홍주 의병과 대마도에서의 생활 등등을 기록한 책이다. ⓒ 홍성군청

홍주성이 일본군 반격에 패퇴한 6월, 유준근 선생 등 9인이 대마도에 유배된다. 일제 사법부가 의병 주도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큰 부담을 느낀다. 이들을 무기형으로 감형, 한반도가 아닌 일본 땅으로 유폐시킨 것이다. 그곳에서 선생은 '(대)마도일기'를 통해 을사늑약부터 홍주 의거 전후 사정, 대마도에서 유배 생활을 기록으로 남긴다.

마도일기(내지) 유준근 선생이 기록한 마도일기를 홍성군청이 구입, 보존하고 있다.
마도일기(내지)유준근 선생이 기록한 마도일기를 홍성군청이 구입, 보존하고 있다. ⓒ 홍성군청

이들이 대마도에 당도한 직후, 정읍·순창에서 무장봉기 했다가 좌절된 최익현과 임병찬 등도 유배당해 온다. 일제가 이들을 어찌 대했을지는 불문가지다. 일본식 의관을 강요하고 먹는 음식으로 핍박했으며, 군사시설을 방불하는 시설에 감금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한양을 향한 망궐례를 잊지 않았다 하니 진부해 보이는 위정척사임에도 불구하고, 의기만은 오상고절에 버금갔다 할 수 있다.

조금 더 꼿꼿한 최익현이, 74세의 노구로 무한 단식을 감행한다. 그 결과 그토록 경멸한 일본 땅 대마도에서 순국하고 만다. 최익현의 순국은 다른 의병 주도자들의 순차적인 귀환으로 이어졌다. 유준근 선생도 마찬가지다. 귀국 후 나약하고 소극적인 저항을 벌이는 유생을 비판하며, 3.1운동은 물론 무장봉기를 통한 항일운동에 모든 생을 바친다.

성벽 곳곳이 무너진 오랜 남포읍성에서, 가을 하늘보다 푸르른 올곧은 기상이 느껴진다. 늙은 고목과 고고한 소나무는 우리가 끝까지 잊지 말고 지켜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없이 웅변해 준다. 쪽빛 바다를 향한 읍성의 질긴 희망도, 가슴에 품은 변치 않을 순진무구의 창공이었을 터이다.

#남포읍성#홍주의병#유준근#마도일기#민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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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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