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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7 10:57최종 업데이트 25.04.07 10:57

이젠 봄이라 불러도 될까요?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 어느 해에 이처럼 목놓아 봄을 기다린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절기상으로는 입춘부터가 봄이지만 개구리에겐 경칩부터, 천문기상학적으로는 태양이 적도 위에 위치하는 춘분이 봄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이번엔 낮밤의 길이가 같다는 절기를 지나 청명(淸明)이 돼서야 찾아왔습니다. 기쁨으로 가득 찬 맑은 공기 속에 꽃씨를 뿌렸습니다.

뭉그적거린 지난 삼월은 고통이었습니다. 내내 서리와 비바람, 눈보라가 일었고, 강풍은 산과 나무를 쓸며 괴성을 지르더니 여기저기에 소나무 가지를 찢어발겼습니다. 촘촘하고 푸른 솔잎이 오히려 독이 됐습니다.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 애쓰다가 굵은 몸통이 뜯겨나간 소나무가 아둔해 보이더군요. 잎을 놓아야 몸뚱이를 다치지 않을 텐데 말이죠.

겨울이 길었습니다. 늦추위에, 폭설에, 최악의 산불까지 있었지만 절망하진 않았습니다. 때아닌 추위라 믿기 때문이 아닐까, 추위를 이겨내고 움트는 생명의 신비 때문이 아닐까, 다들 그렇게 버티며 이겨낸 삶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때가 돼도 오지 않는 것들 투성인데 그래도 계절만큼은 배반하지 않으리란 믿음 때문이 아닐까. 오만 가지 생각이 똬리를 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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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조롱당하고 나니 알겠더군요. 예전엔 빨리 꽃을 보고 두꺼운 옷을 벗어던지고픈 조급증이 일었지만, 이맘때 봄은 한 걸음 내딛고 두 걸음 물러서길 반복합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느낄 뿐, 사실은 물러선 만큼 반동을 이용해 앞으로 휙 나아가는 것일 테죠. 격렬한 산통을 느낍니다. 다른 계절에 없는 새로운 생명이 솟아나는 계절이니까요.

마음을 삭이려 꾸역꾸역 몸을 굴렸습니다. 매화나무를 필두로 보리수, 배롱, 산수유, 복숭아, 살구, 모과, 소나무, 반송, 밤나무, 감나무 가지치기를 했습니다. 햇볕을 골고루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겹친 가지, 웃자란 가지, 안으로 자란 가지. 다른 잎들이 받을 빛을 독차지하는 가지들이 나무의 성장을 망칩니다. 제 몸통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아요.

풀도 마찬가집니다. 쑥부쟁이, 꽃범의꼬리, 삼엽국화처럼 겉은 번듯해 보여도 제 영역만 넓히는 이기적인 식물들이 땅을 점령합니다. 올핸 병풀과 뱀딸기도 가세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른 식물도 자랄 수 있도록 탐욕을 솎아내는 겁니다. 이기적인 가지와 풀들이 30%를 넘기는 건 어림없는 일입니다. 20%도 많아요. 방치하면 정원은 사라지고 없겠죠.

가장 번거로운 일은 잘라낸 가지, 뽑아낸 풀더미를 치우는 일입니다. 차라리 가지치기나 풀 뽑기는 솎아내는 희열이 있지만, 뒷정리는 여간 성가신 게 아닙니다. 일기에 적기도 뭐하죠. 그래도 하지 않으면 정원은 엉망이 됩니다. 굵은 가지에 달린 잔가지를 발라내고, 여기저기 던져진 풀들을 손수레에 담아 퇴비장이나 먼데 풀숲에 버립니다. 그제야 일이 마무리됩니다.
봄 마당 매화, 수선화, 미선나무, 복수초
봄 마당매화, 수선화, 미선나무, 복수초 ⓒ 김은상

민망하게도 남의 떡에 설을 쇠었습니다. 혹독한 겨울을 차가운 길 위에서 보낸 수많은 시민들 덕분에 평온한 시골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동안 따뜻하고 소란 없는 나라에서 지내고, 시골구석에 틀어박혀 풀 뽑고 가지 치우며 소일했으니 면목 없습니다. 덕분에 야만으로의 후퇴를 막을 방법은 그 가능성에 대한 압도적 다수의 각성뿐임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봄비가 내립니다. 최악의 시간이 지나고, 회복의 시간이 왔습니다. 절망의 겨울이 지나고, 희망의 봄이 왔고요. 우리 모두 천국으로 가고자 했지만, 누군가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더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었지만, 그나마 걸림돌이 무언지 정확히 알게 됐습니다. 결국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국가는 훌륭한 국민이 만든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봄이라 말하니 조금 더 따뜻해지는 것 같지 않나요? 추운 겨울, 그 거친 계절과 싸워 이겨낸 새순은 피곤하고 지친 모습이 아니라 윤기 자르르하고 앳된 얼굴입니다. 복수초도 수선화도 지난해와 같은 자리에 피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정말 똑같은 반복은 없다는 걸 발견합니다. 조금씩 움직이고 번식하고 변화했죠. 다시 봄입니다. 2025년 청명(淸明)에 다시 찾은 봄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60대 이상 시민기자들의 사는이야기
#봄#시골#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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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노는 이야기, 뜰 2025

은퇴한 초보 뜨락생활자. 시골 뜨락에 들어앉아 꽃과 나무를 가꾸며 혼자인 시간을 즐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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