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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 1941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신성학교 시절의 가까운 동기생 김익준의 초청을 받은 것이다. 신성시절부터 마라톤선수였던 김익준은 신성중학을 졸업한 뒤 곧 도일하여 동양대학에서 자리를 잡았다. 뒷날 한국에서 7·8대 국회의원과 육상연맹 이사장을 지내기도 한 김익준은 활달한 성품과 천부적인 마라톤선수로서 일본스포츠계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동양대학의 마라톤선수 겸 육상 코치로서 선수합숙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김익준은 장준하의 아버지 장석인의 제자이기도 하여 장준하와는 각별한 사이였던 관계로 그를 일본으로 초청하고 숙식을 함께하게 되었다. 학우의 이런 배려가 아니었다면 장준하는 가정 형편상 일본 유학은 엄두도 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에 도착한 장준하는 동양대학 철학과에 들어갔다. 당장 일본신학교에 입학하기에는 실력이 모자랐던 것 같다. 그래서 1년 뒤에 일본신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장로교 계통의 이 학교는 150명 정도의 학생을 수용하면서 다른 대학들에 비해 신학적 분위기가 비교적 자유로운 곳이었다. 장준하는 여기서 좋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전택부·박영출·문익환·문동환 형제,전경연·김관석·박봉랑 등을 만나고, 이들과는 해방 뒤 <사상계> 등을 통해 동지가 되었다.

장준하가 일본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곳 3년 과정의 본과에는 박영출·김형도·지동식·황재경·오택환 등이 있고 2년 과정의 예과에는 전택부·문익환·문동환·전경연·김관석·장병길·박봉랑·김철손·백이언 등이 2년 혹은 동급의 1년생으로 있었다.

이들 가운데 전택부는 후에 장준하가 하던 <사상계>에 직접 참여했다가 YMCA 총무가 되고, 박봉랑은 후일 한국신학대 교수로 있으면서 <사상계>의 주요 필자가 되었다. 문익환은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까지 장준하와 같은 대열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75년 8월 장준하 사후에는 스스로 "나는 장준하의 대타다"라고 하면서 그 뒤를 이었고 그의 아우인 문동환은 장준하가 이 학교에서 못 끝낸 신학 공부를 뒤에 한신대에서 마치도록 주선하였다. (박경수, <재야의 얼 장준하>)

장준하의 일본유학 시절은 태평양전쟁이 막 시작되고 있어서 시국은 더욱 어려워졌다. 일본이 1941년 12월 8일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만주침략을 도발하여 중국과 전쟁중이던 일제는 전쟁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고 동남아 일대의 자원을 손에 넣고자 남방진출을 기도하면서 독일·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맺고 마침내 미국을 침략하기에 이르렀다. 개전 초기에는 필리핀·말레이반도·싱가포르·버마 등을 점령하고, 이어 뉴기니·과달카날섬에 진출,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위협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1942년 6월 반격에 나서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항공모함 4척을 격침시킨 데 이어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장준하의 일본신학교 시절의 편린을 박봉랑의 증언으로 들어보자.

일본신학교는 예과 2년, 본과 3년, 합 5년제 전문학교로서 100명에서 150명까지의 학생을 가진 작은 규모의, 그러나 안정되고 경건한 그러면서 신학적 분위기가 짙은 신학교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교회의 신학교가 폐쇄된 탓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한국학생들을 적지 않게 받아들였다.

내가 일본 신학교 예과에 들어갔을 때 그때 박영출·김형도·지동식·황재경·오태환 목사 등이 본과에 계셨고, 전택부형, 문익환 목사가 예과에, 그리고 역시 예과에는 전경연, 이영헌 목사, 김관석·김철손·백니언 목사, 장병길 교수 등이 들어오셨다. 내일의 한국의 신학의 꿈을 안으며 우리는 일본말 사전을 뒤져 독일어·영어·희랍어와 싸웠다.

장준하 형을 만난 것은 이러한 신학도의 공동체 생활속에서였다. 그때도 얼굴은 희고 안경을 썼었다. 알고보니 그는 내가 다닌 평양의 숭실학교의 기숙사에서 사감 선생님으로 수고하시던 장석인 선생님의 자제라는 것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장석인 목사님을 잘 몰랐지만 장목사님께서 그 때에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고 계셨기 때문에 적어도 그 이름은 잘 알고 그의 인격을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아들도 아버지의 모습과 비슷하구나 생각을 했다.(박봉랑, <신학생 장준하 형>)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장준하는 박영출 목사가 조선인 학생들을 위해 동경에 세운 숭덕학사(崇德學舍)에 다니면서 신앙생활과 교포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숭덕학사는 목회와 배일 민족의식을 가르치는 조선 기독교인들의 활동무대가 되고 있었다. 그 무렵 김익준의 초청으로 신안소학교의 벗 김용묵도 일본으로 건너와 동양대에 입학하여 숭덕학사에 다니게 되었다. 뒷날 중국 전선에서 항일투쟁의 동지가 되고 고대총장을 지낸 김준엽과 <사상계>에 신학 관련 많은 글을 쓴 박봉랑도 숭덕학사에서 만나게 된 동지들이다.

장준하와 박봉랑은 주일이면 동경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교포 어린이들을 데려다가 하루 종일 찬송가와 성경, 조선역사 등을 가르쳤다. 100리 길이 넘는 촌락에서 아침저녁으로 아이들을 데려오고 데려다주면서 가르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준하는 이 일을 일본을 떠날 때까지 계속하였다. 헌신적인 교육열, 교포 어린이들에게 조선역사를 가르치려는 나라사랑의 정신을 찾게 된다.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실록소설장준하#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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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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