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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역에 내리자마자 공기가 달랐다. 북한산이 바로 코앞에 보였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산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는 나에게 북한산이 이렇게 가까이 보인다는 게 부럽기만 했다. 물론 내가 사는 곳에도 공원이 있다. 화단과 벤치 몇 개가 전부인 곳을 공원이라고 하기엔 좀 뭐하지만. 나무와 숲이 있고, 걸을 수 있는 곳, 사람이 좀 모일 만한 공원에 가려면 차를 타고 가야 했다. 늘 아쉬웠지만, '서울이 다 그렇지 뭐' 싶어 그냥저냥 잊고 살았다.

불광역 바로 옆 서울혁신파크에 처음 가본 것은 공정여행 설명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건물은 북한산을 가로막지 않았고, 미래청과 상상청, 연결동과 참여동, 피아노숲과 지구를 생각하는 카페 등 공간마다 참신하고 재미있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는 게 틀림없어 보이는 곳이었다.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비건페스티벌이 서울혁신파크에 열린다는 소식이었다. 2017년은 혁신파크에서 비건페스티벌을 연 첫 해였고, 내게 강아지 가족이 생긴 해였다. 중형의 믹스견과 가족이 된 뒤로 어디를 가든 이 종의 개가 갈 수 있는지 이 무게의 개가 입장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비건페스티벌은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었던 축제였고 서울혁신파크에는 어떤 개와도 함께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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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페스티벌에 개와 함께 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에서 잠보는 환영받았고 다른 축제처럼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편하게 비건 음식들을 맛볼 수 있었고, 여러 공연과 강연, 동물단체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접할 수 있었다. 신기한 축제였다. 일회용품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쓰레기통에 은박접시나 나무젓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식기를 빌려쓰는 모습과 수돗가에서 씻는 모습, 가방에서 그릇을 꺼내 음식을 담아가는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새로운 광경이 기분 좋았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잠보도 피아노숲과 혁신광장의 잔디, 자신을 예뻐하는 사람들의 손길을 좋아했다. 그 뒤로 혁신파크에서 열리는 비건페스티벌은 나와 잠보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서울혁신파크에서 열린 열한번 째 비건페스티벌
서울혁신파크에서 열린 열한번 째 비건페스티벌 ⓒ 이익형

서울혁신파크에 세 번째에 방문한 건 2018년 동물축제반대축제(동축반축)이었다. 울산의 고래축제와 화천의 산천어 축제, 함평 나비축제와 같은 동물축제를 반대하는 축제였다. 동물들 입장에서 우리가 벌이는 축제가 어떻게 보일지 조금이나마 체험해볼 수 있는 행사였다. 피아노숲에서 고래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혁신파크 곳곳에는 공존을 바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동축반축은 학살로 귀결되는 동물축제들의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죽이지 않는 축제, 과소비하지 않는 축제를 직접 보여주는 새로운 축제였고 하나의 대안이었다.

피아노숲은 그냥 숲이 아니고, 혁신파크는 그냥 공원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나무와 고래가 노래하는 것을 들었고, 돼지가 음식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걸 배웠다. 다른 삶을 꿈꾸는 사람들의 말과 상상과 의지가 혁신의 풍경을 만들어냈다.

 제1회 동물축제반대축제가 서울혁신파크 피아노숲에서 열렸다.
제1회 동물축제반대축제가 서울혁신파크 피아노숲에서 열렸다. ⓒ 생명다양성재단

내가 만난 서울혁신파크는 그런 곳이었다. 어린아이부터 나이든 사람까지 모두의 놀이터이자 다양한 존재들이 모이는 곳. 새로운 아이디어를 요리조리 모의하고 시도해보는 실험실이자, 모두의 삶이 잘 겹치고 섞일 수 있도록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곳. 삭막해진 서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곳이었고 그래서 더 소중한 곳.

서울혁신파크는 은평구에 위치해 있지만 은평구민들 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비건페스티벌 등 혁신파크에서 열리는 행사에는 전국 각지에서 심지어 제주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고, 혁신파크의 입주 단체들은 은평구를 넘어 서울 전역과 전국에 이르는 활동들을 해왔다. 혁신파크는 서울이 아닌 우리 모두의 공간이었다. 그런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서울 시장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시민들의 실험실을 제대로 가치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사라지게 둘 수는 없다.

평생을 서울에서 산 나는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뒤로 골목을 잃어버렸다. 아니 빼앗겼다. 골목은 우리집 앞마당이었고 학교가는 길이었으며 친구들과 뒹굴었던 놀이터였다. 부모님들이 이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우리는 뭐하고 놀까 궁리하는 곳이었다. 좁은 골목길 끝에서 친구들과 비밀을 나누었고 미래를 상상했다. 나에게 땅이란 그런 골목길이 이어진 곳이었고 그래서 땅은 모두의 것이었다.

골목은 사라졌고 대도시 서울은 공동체가 부서진 지 오래되었다. 땅을, 그 땅에 함께 살아가는 누군가가 있다는 감각을 잊고 살게 됐다. 서울혁신파크는 잊었던 그 감각을 깨워준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혁신파크는 팔아먹으면 돈이 되는 부동산 따위가 아니다. 공동체가 깨진 도시에 사람과 사람이, 또 나무숲과 연결되는 생명의 공간이며, 깨져버린 공동체의 회복을 상상하는 공존의 공간,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창조의 공간이자 서로 얼굴을 맞대고 소리내어 웃고 떠드는 재미의 공간이며 모두의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공간은 삶 그 자체다. 땅을 빼앗긴다는 건 삶을 빼앗기는 일이다.

서울혁신파크가, 또 하나의 삶이 사라진다. 피아노숲을 오가던 청솔모도 혁신파크를 자유롭게 드나들던 개들도,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며 모여드는 이들은 더이상 갈 곳이 없고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만 남을 뿐이다. 땅을 울리는 공사 소음, 매끈하게 청소된 유리창에 부딪힌 새들, 고층빌딩에 매겨진 가격과 새로운 삶을 상상하는 가치를 대신한 죽은 공간. 혁신파크를 팔아 치운 건 미래를 팔아 치운 일이다. 서울시가 팔아 먹은 것은 은평구의 작은 땅이 아니라,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공동체를,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의 미래를 팔아 먹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미래를 제자리에 돌려놓을 시간이 아직은 있다고 믿는다. 우리의 땅이 기업의 회계숫자가 되지 않기를. 그래서 우리의 삶이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는 얼굴들을 마주보며 지속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정윤영은 싸람(싸우는 노동자를 기록하는 사람들)에서 활동하는 기록 활동가이며 작가이다.


#서울혁신파크#동물축제반대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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