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북클럽 4기입니다. 꾸역꾸역은 '어떤 마음이 자꾸 생기거나 치미는 모양'을 뜻합니다. 책을 읽고 치미는 마음을 글로 잘 담겠습니다.
최근 들어 젊은 세대의 문해력 문제가 자주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사흘'을 '4일'로, '오늘'을 뜻하는 '금일'을 '금요일'로, '일이 처음 시작되는 계기'라는 뜻의 '시발점'을 욕설로, '우천 시 OO로 장소 변경'이라는 안내 문구를 '우천시'로 장소가 변경된 것으로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런 기사를 보고 남의 일인양 생각할 수가 없는 게 나 역시도 스마트폰 사용이 늘면서 어휘력과 문해력이 나날이 저하되는 걸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기만 해도 어휘력이 늘고 말과 글에 깊이가 더해지는 책'이라는 이 책의 소개 문구에 자연히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언어도 끊임없이 진화한다

▲<사연 없는 단어는 없다> 책표지. ⓒ 그래도봄
<사연 없는 단어는 없다>(2025년 2월 출간)는 30여 년 간 출판인으로 글을 다루는 일을 해 온 저자 장인용이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의 어원을 살펴보고 시대에 따라 변화해 온 의미와 쓰임,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낸 책이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언어도 생물처럼 끊임없이 진화한다는 점이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는 뜻이 바뀌어 새롭게 쓰이는 단어들이 많은데 그 대표적인 예가 '경제'다.
'경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을 두 글자로 줄인 말로, 원래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구하다'라는 계몽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서구의 '이코노미(Economy)'라는 용어를 '경제'로 번역하면서 이 단어가 내포하던 전통적 유교의 개념이 사라지고, 오늘날처럼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생산. 분배. 소비하는 모든 활동'을 의미하게 되었다.
결혼한 남성이 자신의 배우자를 부르는 호칭인 '마누라' 역시 원래의 의미와 다르게 사용되는 말이다. '마누라'는 왕이나 왕비 같은 왕족에게 쓰던 존칭어인 '마노라'에서 유래했다. 존칭어 가운데 극존칭이던 말이 세월이 흐르면서 아내나 중년이 넘은 여성을 허물없이 이르는 말이 된 것이다.
이외에도 가장자리를 뜻하는 '가'에 '없다'가 붙어 만들어진 '가엾다' 역시 '가장자리가 없다'라는 의미에서 '불쌍하고 딱하다'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이런 말의 변화는 외래 종교의 유입이나 다른 국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가속화되기도 한다. 특히 불교가 우리말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다반사', '찰나', '나락으로 떨어지다', '현관', '식당', '점심', '주인공' 등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많은 단어들이 불교에서 유래했다.
다른 언어로부터 유입된 말들은 '김치', '배추', '사돈', '가방', '구두' 등이 있다. 김치는 '소금물에 담근 채소'를 뜻하는 한자어 '침채(沈菜)'의 음운이 변한 말이고, 배추는 한자어 '백채(白菜)'의 음운이 변한 말이다. 그리고 사돈은 만주어 '사둔'에서 유래한 말이고, 가방과 구두는 각각 일본어 '가반(かばん)'과 '구쓰(くつ)'에서 온 말이다.
말의 변화에는 우리가 겪어온 삶과 역사가 담겨 있다. (중략) 더군다나 주변 강대국인 중국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고, 외래 종교로 유입된 불교의 영향도 우리말에 깊게 새겨졌다. 우리말을 기록할 수 있는 문자인 한글의 창제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터이다. 또한 근대에 들어서는 일본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는 일본의 영향이 극대화된 시기였으며, 해방된 이후로는 미국의 문물과 영어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 6P~7P
우리 민족을 순수한 혈통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우리말에 들어온 몽골어, 만주어, 거란어 등을 보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순수 혈통주의는 위정자들이나 선동가들이 외치는 구호일 뿐이고, 세상은 이웃하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교류하며 지내는 것이다. - 221P
저자는 언어와 민족에 대한 과도한 순수주의를 경계한다. 이 책을 통해 다른 문명과 섞이며 변화하고 확장해 온 우리말을 살펴보면서, 신조어가 범람하는 최근의 현상을 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지나친 외래어와 줄임말 사용으로 우리말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감을 갖고 있었는데 책을 읽으며 지금의 상황 역시 언어가 진화해 가는 자연스러운 흐름의 일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를 반영하는 언어들
최근에는 말의 변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자조적이고 체념 섞인 표현이 유행하던 몇 년 전과 다르게 요즘은 '럭키비키(운이 좋은 사람, 작은 행운을 유쾌하게 표현할 때 사용), '행집욕부(행복에 집중하기! 욕심부리지 않기!) 같은, 긍정적인 사고를 통해 삶의 만족도를 높이고자 하는 표현들이 자주 입에 오르고 있다.
새롭게 등장하는 이런 입말들에는 한 시대의 가치관과 문화적 특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웬열', '캡', '짱'같은 과거의 유행어를 들으면 단번에 그 시절의 분위기와 감성을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시대를 반영하는 문화적 산물이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언제까지나 사전에 실린 단어들의 사용만 고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과도한 문법 파괴나 비난. 혐오의 의미를 담은 신조어들은 사용을 자제해야겠지만,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창의적인 말들은 우리 언어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리라 본다.
실제로 이제는 대중적인 표현이 된 '혼밥', '꿀피부', '꽃청춘', '케이 팝 스타' 같은 말들은 국립국어원의 개방형 사전인 우리말샘에 올라 있다. '꿀을 바른 듯 윤기가 흐르고 촉촉해 보이는 피부'를 '꿀피부'로, '케이 팝으로 큰 인기를 얻은 가수'를 '케이 팝 스타'로 압축해서 표현한 이런 신조어들은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의 특성을 보여준다.
언어를 이해하는 일은 곧 세상을 이해하는 일이다. 올바른 말하기와 쓰기도 중요하지만 변화하는 언어와 그 언어가 만들어가는 세상을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브런치스토리와 블로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