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별금지법은 누군가를 우대하기 위한 법이 아니다. 다양한 차이를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게 하려는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장치다. ⓒ norbuw on Unsplash
뙤약볕에 목덜미로 땀이 흘러내린다. 불쾌하게 끈적이지만 에어컨 바람이 스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놀랄 만큼 시원해진다. 여름 한낮의 대만, 교환학생 마무리를 목전에 둔 날이었다. 짐 정리를 하다 땀을 식히려 뉴스를 켰다. 26회 서울퀴어퍼레이드가 성황리에 열렸다는 뉴스가 보였다. 3만명 참여,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 모든 사랑은 평등, 맞불 집회도 열려….
댓글 창엔 익숙해졌지만 들을 때마다 늘 불쾌한 기상 알람 같은 혐오가 쌓여 있었다. "더럽다", "죄악이다", "차별금지법 절대 반대". 손가락이 멈췄다. 무지개가 아무리 높이 떠올라도 그 아래엔 늘 그늘이 진다.
26회 퀴어퍼레이드를 보도한 한 언론사의 포털 뉴스 댓글 창은 닫혀 있었다. 평범한 동료 시민의 이야기를 전하는 보도의 댓글 창은 왜 닫혀야 했을까. 언제까지 한국은 여론의 창구에 연대 아닌 혐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회로 남아야 할까.
대만 교환학생 기간 중 만난 '캐롤 양'씨는 50대의 대만 언론인이다. 이탈리아에서 온 룸메이트 레티지아가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는, 우리 일행을 데리고 동단, 남단 등 접근이 어려운 지역까지 기꺼이 안내해 주었다. 동단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둔 어느 해산물 식당, 캐롤씨가 나에게 무언갈 보여주며 말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 소설이야."
낯선 표지 위에 작게 쓰인 한국어 제목을 더듬어 읽던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大都市的愛情法>,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이었다. 대만에 사는 중년 여성이 한국 퀴어 소설을 '최애'로 꼽다니. 좀 더 진지한 소설을 좋아할 거라 지레짐작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조심스럽게 한국의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에서는 어른들과 성소수자를 주제로 한 대화가 쉽지 않고, 동성혼 법제화도, 차별금지법도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고. 그래서 50대인 캐롤씨가 '최애' 소설로 퀴어 소설을 꼽은 게 의외였다고 말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캐롤씨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대만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동성혼을 법제화한 나라이긴 하지만, 우리도 처음엔 반대가 심했어." 대만 역시 낯설지 않은 반대와 마주해야 했다. 전통적 가정의 해체, 사회의 타락, 아이들의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가득했다.
대만 헌법재판소가 동성혼 금지 조항을 위헌이라 판결한 뒤에도, 2018년 국민투표에서 동성혼 법제화를 제한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거리 시위와 갈등도 한동안 계속됐다. 그럼에도 2019년, 대만은 특별법을 통해 동성혼을 제도화했다. 캐롤씨는 짧은 설명 끝에 웃으며 말했다.
"But, nothing happened.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
매년 10월, 대만에서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LGBT+ 프라이드'가 열린다. 한국에서도 퀴어퍼레이드가 열리지만, 늘 그 맞은편엔 '동성애 반대' 집회가 따라붙는다. 대만에선 보기 힘든 풍경이다.
2024년 프라이드 현장에서 라이칭더 총통은 "자긍심은 모든 성소수자의 권리"라고 선언했다. 성평등은 국가의 책임이라는 그의 발언은 '사회적 합의' 뒤에 숨어 차별금지법 제정을 미루거나 때론 혐오와 손잡는 한국 정치권과는 대조적이다.
차별금지법은 누군가를 우대하기 위한 법이 아니다. 다양한 차이를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게 하려는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장치다. 차이를 이유로 권리를 배제하며 유지된 사회를 과연 언제까지 '질서'있다고 부를 수 있을까.
동성혼 허용 이후, 대만은 무너지지 않았다. 전통적 가정도, 아이들의 정체성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오히려 지도자가 퀴어퍼레이드 한복판에서 국민의 '자긍심'을 말하는 사회가 되었다.
불쾌하게 끈적이던 여름의 땀도, 한 줄기 바람에 사라진다. 차별금지법이 그 바람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우리가 두려워했던 혼란은 생각보다 쉽게 지나갈지 모른다. 그리고 결국,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