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마흔두 살. 박정희 정권 아래 긴급조치1호 위반으로 의형제를 맺고 박정희 타도 싸움을 명세하였던 독립군 출신 장준하(1918-1975)와 군법재판을 받는 장면
ⓒ 통일문제연구소
전후 황폐한 지성계를 대변하고 민주주의 교육을 통해 4.19혁명을 주도한 <사상계>의 몰락은 우리나라 지성사의 비극이라 할 것이다.
<사상계>가 몰락, '사양길'에 빠지게 된 사유를 두고, 발행인 장준하의 정치컬러 또는 정치입문을 들기도 한다. 선과 악이 싸울 때 중도가 악의 편이듯 독재와 민주주의가 싸울 때 산술적인 중도나 가치중립은 악의 편에 속한다. 박정희의 포악한 철권통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예리한 비판정신이 요구되었을 뿐, '황희정승식'의 양비론은 궤변이거나 곡필일 뿐이다.
장준하의 <사상계>는 불의한 권력과 타협하거나, 그런 사람들의 글을 원천적으로 배제했다. 보복이 따랐고, 판로가 막혔다.
"장준하가 정계로 들어간 것과 함께 가해진 당국의 음성, 양성적인 탄압이 <사상계>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장준하로서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중국에서 김구로부터 영향을 받은 민족주의, 그리고 그의 신념이었던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계몽적인 내용의 편집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현실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는 정세판단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정진석, 앞의 글)
이와 함께 몇 가지 외적인 상황도 있었다. 월간종합 교양지가 속속 창간되어 <사상계>의 영역을 파고 들었다. 일본에서 재일교포를 상대로 하는 월간지 <한양>이 1962년 3월호로 창간되어 국내에서도 판매되고, 진보적인 교양지 <청맥>이 1964년 8월에 창간되었다. <동아일보>가 1964년 9월 <신동아>를 복간했고, 1968년 4월에는 <중앙일보>가 <월간중앙>을 창간했으며,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월간 <세대>도 1963년 6월에 교양종합지로 선을 보였다.
특히 거대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월간지는 자사의 필진과 판매 보급망, 여기에 자사 신문에 광고를 통한 홍보에서 <사상계>는 경쟁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불리한 여건은 또 있었다. 각종 문학지가 속속 창간되고, 특히 1964년 <한국일보>가 <주간한국>을 창간하면서, 딱딱하고 원론적인 논설보다 쉽게 읽고 즐길 수 있는 교양지와 주간지를 선호하는 신세대 독자들이 늘어났다. 신문사들이 경쟁적으로 발행하는 스포츠신문, 정부의 '3S정책'(스포츠·스크린·섹스)이 젊은 독자들을 빼앗아 갔다.
<사상계> 몰락의 또 다른 배경이다.
<사상계> 신인문학상(1964년)을 수상한 바 있는 작가 박태순은 1974년 '민주·민족이념을 추구하다 쓰러진 <사상계>'에서, 이 잡지의 역할을 이렇게 정리했다.
얄타체제·냉전체제의 최대 희생국이며, 탈냉전·탈분단의 '전후사 극복' 명제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당면한 과제가 되었어야 할 분단한국의 현실은 과연 어떠하였던가?
군사독재는 이 모든 논의들을 억압하였고, 잔인하게 짓밟았다. 1960년의 4월혁명과 1964년의 6·3사태를 겪으면서 성장한 한국의 학생운동이 1970-80년대를 거쳐가는 과정에서 그 어느 나라에서도 예를 구할 수 없을만치 민족·민주·민중 담론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시켜갈 수 있었던 것은 한국사에 부여된 이 같은 세계사적 전환시대 인식을 담지해 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들의 뒷전에 <사상계>가 노둣돌처럼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분단시대는 기억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