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과 장준하 ⓒ 함석헌기념사압회
장준하의 거침없는 '도전'에 박정희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박정희가 얼마나 장준하의 일거수 일투족을 상세하게 살피고 있었는지는 한 '삽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장준하가 <씨알의 소리>를 만드느라 이대총장 김옥길의 집을 드나들 무렵이었다. 5남매의 자녀에 그의 집 살림이 딱한 사정인 것을 아는 김옥길이 하루는 쌀 한 가마를 자기 차에 싣고 청량리 밖 중화동에 있는 장준하의 사글세 집으로 직접 실어다 준 일이 있었다. 그 뒤 김옥길이 국무총리 김종필을 만나는 자리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김종필이 말했다.
"김총장께서 협조를 덜 하시는 것 같다고 각하가 서운해 하십니다."
"무슨 말이신가요?"
"장준하네 집에 총장께서 직접 쌀을 실어다 주셨다구요."
김옥길은 물론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대통령이 보고받고 챙기는가 싶어 놀랐지만 그것은 박정희가 장준하라는 인물에 대한 주의에 얼마나 비중을 두고 있는가를 말해준다.(박경수, 앞의 책)
어느 때부터인지, 재야·운동권에서는 '재야 대통령'이라는 호칭이 나돌았다. 물론 장준하를 두고 한 말이었다. 장준하는 반유신 투쟁의 과정에서 재야의 대표적인 인물로 부상되고 있었다. 함석헌과 윤보선은 너무 고령이었고, 김대중은 납치되어 온 이래 연금상태에 있었다. 김영삼은 유신체제 내의 야당총재라는 한계에 가로막혀 있었다. 박정희가 "장준하를 그냥 두고서는 대통령을 못 해먹겠단다." 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런 말이 재야인사들의 입을 통해 회자될 만큼 장준하는 박정희의 명실상부한 라이벌이었다. 더욱이 박정희는 자신의 경력에 대해 장준하에게 심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을 터이다.
주변에서 장준하의 신변을 걱정하게 되었다. 제1야당 대통령후보가 납치되고, 서울법대 교수가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변사되고, 인혁당사건으로 날조한 8명의 사형이 집행되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유신헌법 개정청원 운동을 준비하는 무렵 선생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유신헌법을 고치자고 하는 것은 바로 박대통령 그만 두라는 얘기 아닙니까? 지금 여건에서 그만두는 것은 그쪽에서 보면 대통령 자리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생명마저 위협받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쪽의 생명도 위협받지 않겠습니까?"
사실이 그럴 것이다. 선생님은 이 일을 시작하시면서 정말로 생명을 이미 거셨다고 나는 느꼈다. 그래서 선생님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두려웠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투옥정도가 아니라 죽음일 수 있다는 것이 당연히 예측될 수 있는 일이었다.(김도현, <우리 앞에 지금도 계신 이>)
모든 혁명가들이 그렇듯이 장준하에게 죽음은 크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죽음이 두려웠다면, 붙잡히게 되면 처형되는 일군을 탈출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일군과 공산군과 도적떼가, 추위와 굶주림이 기다리는 장점 6천리의 행군에 나서지도 않았을 터이다. 또 OSS대원으로 지원한 것이나, 아직 일군의 독기가 서려 있는 정진대 지원, 이승만과 박정희와의 사상결단의 싸움, 박정희의 '역린'을 건드리는 발언 등은 하지 않았을 터이다.
장준하는 박정희의 유신체제, 긴급조치에 생명을 걸고 싸웠고, 싸우다 죽었고, 상대도 스스로 친 덫에 걸려 죽었다. 그래서 역사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영역에 속하는 것인가.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