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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 장준하 선생 사인에 의문점을 제기하고 있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1975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 장준하 선생 사인에 의문점을 제기하고 있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 동아일보

장준하의 '의문사'는 다음날에야 언론 보도를 통해 사건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경찰에서 실족사고로 처리된 장준하씨 사인에 의문점이 있어 검찰이 장씨의 사인을 다시 조사하고 있다. 18일 서울지검 의정부지검 서돈양 검사는 현장을 둘러보고 포천경찰서에서 조사보고해 온 장씨의 사인에 몇 가지 의문점이 있어 함께 등산갔다 사고현장을 혼자 목격했다는 김용환씨(41, 중학강사, 서울동대문구 이문동 38)를 불러 자세한 경위를 듣고 19일 김씨를 다시 소환했다.

검찰이 장씨의 사인에 의문이 있다고 보는 점은 ① 추락사고 지점은 산이 너무 험해 젊은 등산가들도 마음대로 오르내리지 못하는 경사 75도, 높이 12m의 가파른 절벽인데 장씨 혼자서 아무런 장비 없이 내려오려한 점 ② 사고현장 벼랑 위에 오를 때는 멀리 등산코스를 돌아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는 등산코스도 아닌 벼랑으로 내려오려 한 점 ③ 사고 직후 김씨가 장씨의 시계를 차고 있었던 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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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특히 김씨가 장씨의 시계를 차고 있는 점에 대해 "사고 후 신고나 인명구조가 더 급한데 그 바쁜 시간에 장씨의 시계는 왜 풀어서 찾느냐?"고 김씨를 추궁, 김씨는 자신이 장씨의 곁을 떠난 사이 다른 등산가 등이 장씨의 시계를 훔쳐갈까봐 그랬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또 김씨가 65년부터 3년 동안 신민당 제4지구당 총무로 있었는데, 사고당일 등산길 버스안에서 장씨와 우연히 만났다고 진술한 점과 김씨가 사고 직후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군부대에 신고한 점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고 있다…(<동아일보> 8월 19일)

이같은 언론 보도에 검찰은 이례적인 기자회견을 갖고 "장씨가 잡았다 놓쳤다는 소나무가 휘어진 채로 있었던 점 등 검찰에서 조사한 결과를 종합, 검찰은 장씨의 사인을 실족사로 단정했다."고 밝혀 오히려 세간의 의혹을 증폭시켰다. 한편 검찰은 장준하 사인에 의문을 제기한 <동아일보> 한석유 지방부장, 장봉진 의정부주재기자, 성낙오 편집부 기자 등을 소환하고, 이들 중 성기자를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필자는 사고 뒤 몇 차례 현장을 찾았다. 높이 12미터, 75도 경사의 바위, 거기에 여름철의 장마로 바위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그런 곳에서 추락사했다는 데 외상이 거의 없었다.

"귀 뒷부분에 위치한 후두부 부위의 함몰골절상, 손바닥부위의 열상, 양쪽 겨드랑이 안쪽의 멍자국, 왼쪽 둔부의 쓸린 흔적을 제외하고는 다른 외상이 없어 외관상 추락사고로 보기에 깨끗한 편이었고, 장준하가 당시 착용한 의복에도 미끄러지거나 긁힌 흔적이 전혀 없었다.", "사체 주변에는 안경, 등산모자, 등산가방, 보온병 등이 놓여져 있었으나, 깨지기 쉬운 물건인 안경, 보온병이 깨지거나 위 물건에 긁힌 흔적이 없었다."(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장준하관련 보고서, 2002년 9월.)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죽여서 실족사를 가장하여 현장에 옮겨놓았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유신귀신'이 설치던 시절이었다.

장준하는 사고 전날 (8월 16일) 동대문을구에서 국회의원 출마시부터 알고 지내던 호림산악회(회장:김용덕)의 연락을 받고 8월 17일 아침 회원 40여 명과 함께 (이중 20명 정도는 낮선 사람이었다고 한다) 서울운동장 앞에서 모여 관광버스 편으로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3리 소재의 약사봉등산을 위해 떠났다. 일행이 약사봉 계곡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반에서 12시경이었다.

일행이 계곡의 넓적바위에서 점심식사 준비를 위해 배낭을 풀고 더위를 식히고 있을 때 장준하는 김용덕 회장에게 "나 산에나 좀 올라갔다 오겠다"라면서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이때 김용환 (41:국회의원선거때 도와주었다가 그 뒤 소식 끊어짐, 사고 당일에 나타남)이 장준하가 없어진 걸 알고 행방을 물어 곧 장준하의 뒤를 쫓아갔다는 것이다.

그는 장준하가 간 산의 능선쪽으로 약 10분쯤 따라 올라가서 그를 발견했다고 한다. 김용환에 따르면 그가 10분쯤 올라갔을 때 군인 2명이 텐트를 치고 있음을 발견, 60세쯤 되어보이는 분을 못 보았느냐고 묻자 텐트속에서 장준하가 나와 군인들과 함께 커피를 나눈 다음,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김용환은 이때부터 장준하의 배낭을 자신이 메고 갔으며 이런저런 신상문제를 나누며 40여 분간 올라갔다. 이들은 그곳에서 준비해 온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고 장준하가 일행이 기다릴 터니 내려가자고 하여 하산하기 시작했다는 것, 하산길은 올라갈 때보다 훨씬 가파른 길이었다. 10분쯤 내려와서 사고현장이 나타났다. 가파른 절벽에서 먼저 김용환이 소나무를 휘어잡고 의지하면서 건너간 다음, 뒤따라서 장준하가 건너뛰다가 잡았던 소나무가 휘어지면서 미끄러져 떨어졌다는 것이 김용환씨의 진술내용이었다.(윤재걸, '장준하 그 의문의 죽음', <신동아>, 1985년 8월호, 474쪽을 중심으로 호칭 등 약간 재구성.)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실록소설장준하#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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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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