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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 선생 사망 당시 묘비
장준하 선생 사망 당시 묘비 ⓒ 장준하기념사업회

장준하, 그는 '금지된 동작'을 맨 먼저 시작한 혁명가였다.

일본군 탈출이 그랬고, OSS참여, 김구 선생과 함께 환국, <사상계> 창간, 이승만 정권 비판, 5·16비판, 한일 굴욕회담 저지투쟁, 3선개헌 반대투쟁, 반유신항쟁, 100만인 서명운동 주도에 이르기까지 그는 '금지된 동작'을 맨 먼저 시작했다. 저항에는 수난이 따른다. 그것도 권부의 최고 수장을 겨냥하는 비판은 고난을 각오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유신체제를 선포하고 긴급조치를 통해 권력을 유지해 온 박정희는 폭압통치로 정권을 시종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72년 10월 박 대통령이 유신을 감행하여 국가권력을 집중, 대통령이 모든 국가권력 위에 군림하는 통치형태를 취하게 되었고 사회영역 전반에 걸쳐 관료적 권위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73년 8월에는 유신에 반대하던 김대중씨를 납치, 살해하려다가 실패했으며, 74년 4월에는 민청학련사건을 조작, 민주화운동을 탄압했고, 75년 4월에는 고려대에 휴교령을 내려 군대를 학교에 진주시킴으로써 학생들의 민주화요구를 완전히 차단하는 등 박정희 개인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장애가 되는 일체의 개인, 집단, 계층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최대의 강압, 물리적 폭력을 자행하는 등 극단적인 국가테러의 시대였으며, 장기집권을 꿈꾸던 박정희의 음모가 노골적으로 행동화되던 시대였다. (민주당, <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조사활동보고서>,1993년 9월)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 장준하기념사업회

박정희의 태생적 라이벌 장준하의 일거수 일투족은 최고 권력자에게 수시로 보고되었다. 특히 7.4 공동성명 당시 박정희는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대표를 맡아줄 것을 제의하고,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국가유공자로서 훈장을 제의해 온 것을, 현 군사정권에서는 아무 것도 맡거나 받을 생각이 없었다고 거절하면서 감정은 더욱 격화되었다고 한다. 장준하의 일사보국(一死報國)의 결의는 더욱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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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준하 형에게서 여러 번 이런 말을 들었다.

"나는 이 다음에 죽을 때에 병이 나서 앓다가 죽고 싶지 않다. 갑자기 총에 맞아 죽거나, 절벽에서 떨어져 죽거나, 폭탄에 맞아 죽거나, 그렇게 죽고 싶다."

"장 형, 그런 끔찍한 얘기는 다시 하지 마시오." 그것은 그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안병욱, <청과 의와 용의 인, 장준하>)

고종명(考終命)이란 말이 있다. 살 만큼 오래 살다가 편하게 죽는 것으로, 유교에서는 오복 중의 하나로 친다. 보통 사람들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죽기를 원한다. 하지만 혁명가는 그렇지 않다. 총에 맞아 죽거나 절벽에서 떠밀려 죽거나 폭탄에 맞아 죽거나 한다. 고문으로 죽거나 교통사고로 위장되어 죽고 독약을 넣은 음식을 먹다 죽는다. 처형대에서 사라진 혁명가도 수없이 많다. 그것이 혁명가의 운명이다. 혁명가 치고 제 명에 고종명한 사람은 거의 없다.

혁명가는 막힌 길을 뚫는다. 그래서 반체제이다. 암흑으로, 철창으로, 율법으로, 계엄으로, 법제로, 비상조치로, 묶이고 막힌 상황을 타파하고자 한다. 그것이 혁명가이다. 낡은 가죽(革)을 벗기고 새로운 생명(命)을 불어 넣는 일이다. 장준하는 다시 '금지된 동작'에 나섰다. 그의 전셋집의 거실에는 누군가로부터 받은 일주명창(一籌明窓)>이란 휘호 한 폭이 걸려 있었다. "심지 하나가 창을 밝히고 있다"는 뜻이 담긴다.

장준하는 이제 남은 심지에 마지막 불꽃을 댕기고자 했다. 몸을 던져 박정희 정권과 싸우는 일이다. 1975년 2월, 두 달간의 병원 치료를 받고 완치되지 않는 상태로 퇴원했다. 병원비의 부담도 수월치 않아 더 입원해 있기도 어려웠다. 유신헌법 철폐와 박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정부는 이를 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내용은 △ 유언비어의 날조, 유포 및 사실의 왜곡, 전파행위 금지 △ 집회 시위 또는 신문·방송 기타 통신에 의해 헌법을 부정하거나 폐지를 청원·선포행위 금지 △ 이 조치에 대한 비방행위 금지 △ 금지 위반 내용을 방송·보도·기타의 방법으로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 소지하는 행위의 금지 △ 주무장관에게 이 조치의 위반 당사자와 소속 학교·단체·사업체 등에 대해 제적·해임·휴교·폐간·면회취소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 부여 △ 이런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다는 것 등이었다.

일찍이 이와 같은 폭압통치는 민주주의 간판을 건 국가에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박정권은 국민의 숨통을 죄이며 유신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다. 장준하는 1월 21일 개인성명을 통해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국민투표를 거부하는 것이 민주회복의 당면과제"라고 주장했다. 긴급조치 9호는 장준하가 의문사 당하고, 1979년 박정희가 암살된 뒤 이해 12월 7일 해제될 때가지 4년 동안 지속되었다. '긴조 9호'시대는 민주주의의 참담한 암흑기로서 800여 명의 구속자를 낳아 '전국민의 죄수화' '전국토의 감옥화'라는 일제강점기를 방불케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저항운동은 지하로 잠복하게 되었다. 장준하는 잠행하면서 1974년 12월 25일 결성한 범민주진영의 연대투쟁기구인 '민주회복국민회의'의 재조직과 동아·조선 해직기자들의 '자유언론투쟁위원회'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등 민주화운동 단체의 연대에 심혈을 기울였다.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실록소설장준하#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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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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