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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 선생 사망 당시 묘비
장준하 선생 사망 당시 묘비 ⓒ 장준하기념사업회

필자는 사고가 나고 한 달 뒤 사고현장에 비문을 세우는 일 등에 참여하고 나서, 장준하가 타계할 때까지 편집위원으로 있었던 <씨알의 소리>(1975년 9월호)에 기고한 '약사봉 계곡의 진혼곡'의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서 그의 인간과 사상의 단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필자는 이 글 때문에 수사기관에 끌려가 혼쭐이 났었다)

인간 장준하 선생의 일생일대! 그 파란 많고 수난에 찬 생애는 현대 민족사의 영욕 그대로이고, 기복과 굴절은 민족 이상의 굴절 바로 그것이었다.

산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마음을 혜량하면서도 이 할 일 많은 시대에 먼저 가버린 그의 죽음은 시대고(時代苦)의 아픔을 아는 청년들에게 너무나 큰 절망이었다. 조국 광복을 위해 이역에서 일제와 싸웠던 그가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억압과 박해를 받아야 하는 역사의 슬픈 아이러니는 정의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에게는 너무나 큰 부조리였다.

그는 사색인으로서 행동하고 행동인으로서 사색하는 지성인이었다.

그는 이론과 행동을 이율배반이 아닌 동일선상에서 일체화시킨 도덕인이었다.

그는 많은 지식인들이 순수라는 이름의 수인(囚人)이 되어 보신(保身)에 전력할 때, 정의를 위해서는 일신을 홍모처럼 버리고 일어서는 자유인이었다.

그는 '금지된 동작'을 맨 먼저 시작한 위대한 혁명가였다.

그는 젊은이들이 내출혈의 아픔을 감내할 때 고난의 면류관을 함께 쓰고 고행길에 오른 선지자였다.

그렇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자였고, 행동하는 지성인이었고, 불의와는 결코 한 치의 타협도 않는 외곬의 반골(反骨)이었다. 야인이고, 들사람이고, 현대의 아웃 사이더였다. 그는 명철한 언론인이었고, 주체적인 민족주의자이며, 비폭력적인 사회개혁주의자였다.

비동시적인 것들이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비현실적인 것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며, 비논리·비상식적인 것들이 정석(正席)을 차지해 버린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에서 그는 참의 불변치(不變値)를 위해 일생을 바쳐 싸워왔다.

생전에 집 한 칸 없이 전셋집으로 전전해 온 고인은 진짜 서민의 지도자였다. 망국민으로 대륙에서 돌베개를 베고 풍찬노숙하며 광복투쟁을 벌여 찾은 삼천리강토가 내 집 내 땅인데, 해방된 내 땅에서 제 집 없음이 무슨 허물이 되겠느냐고 가족을 위안시켰다는 그의 금욕주의적인 고결한 생활자세는 지도자의 사표요, 국민윤리의 표상이 아닐수 없다.

야스퍼스는 전후 독일 국민의 4가지 죄를 논하면서 마지막으로 '형이상학적인 죄', 즉 히틀러 치하에서 싸우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죄까지를 쳐서 일대 참회운동을 벌이자고 주장했다든가.

선생께서는 이 죄 많은 시대에 생존함이 부끄러워 후세인으로부터 '형이상학적인 죄'를 면하려고 하늘나라로 먼저 간 것일까? 부서질지언정 휘어질 줄 몰랐던, 그렇게도 강인한 그의 생명력을 그처럼 사랑하던 산에서 빼앗길 줄 그 누군들 알았을까?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실록소설장준하#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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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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