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군 출신으로 『사상계』를 창간한 장준하 ⓒ 장준하기념사업회
장준하는 어떻게 살았고, 사후에 어떤 평가를 받는가
그를 지켜 본 생전의 동지와 후학들의 견해를 모았다.
내가 아는 한 장선생의 인격은 고결했고 인품은 청아했다. 그는 신촌집을 팔아넘긴 후에는 샛집을 전전하는 청빈한 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때로는 독단적이요, 지나치게 비타협적인 성격의 일단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그가 혼탁한 시류에서 생의 원칙을 굽히지 않았던 때문이다. 우리는 뛰어난 민족적 동량을 너무 일찍 잃어버렸다. 생각할수록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 양호민(<사상계> 주간대리, 한림과학원 객원교수)
그는 청빈했고 또 청렴했다. 그는 돈에 욕심이 없었다. 물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일밖에 몰랐다. <사상계>를 키워 자유언론을 창달하고 민주적 교양을 펴고 자주독립 국민의 자질을 향상시키려는 것이 그의 커다란 사명이오, 염원이었다. - 안병욱(<사상계> 주간, 숭실대 명예교수)
1966년 일이 아니었던가 생각하지만 아마도 <사상계>가 수여하던 마지막 '통일문학상'의 날이었다. 아침에 회사에 나가니까 장선생의 그 흰 얼굴이 흙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두세 시간 후면 시상식이 있다는 아침이다.
"왜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요."
"수상식을 해야겠는데 상금이 있어야지."
그때 상금이 얼마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3만 원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나는 곧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 전화를 걸어 그 돈을 차용해왔다. 그때 환히 웃으시던 장선생, 정말 잊을 수가 없다. - 지명관(<사상계> 주간, 한림대 일본학 연구소장)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장선생과의 만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눈 감으면 선생의 미소를 머금은 해맑은 얼굴이 떠오른다. 선생과의 만남 그것은 나의 키(방향타)였다. - 계창호(<사상계> 편집부장)
장선생께선 잡지 저널리즘에서 언제나 우리들의 '사표'이셨고, <사상계>는 언제나 우리들의 '화두'였다는 것, 그리고 장준하 선생께선 우리에게 무엇이 참다운 지성이고 무엇이 참다운 용기인가, 그리고 무엇이 참다운 지사의 길인가를 일깨워주신 '참지도자'이셨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 노종호 (<사상계> 기자)

▲1953년 4월 창간된 『사상계』의 겉표지 ⓒ 장준하기념사업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어려운 시국 상황에다 극심한 경영난까지 겹쳐든 그 66년과 67년 두 해 동안의 힘든 시절은 곁에서 함께한 발행인 장준하 선생의 의연하고 돌올한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나에게 두고두고 한 거대한 동상의 그림자를 넓게 드리우고 있거니와, 그럼에도 그 어려운 시절을 끝끝내 선생 곁에서 함께하지 못한 내가 어찌 더 여기서 <사상계>를 말하고 선생을 말할 것인가. - 이청준 (<사상계> 기자, 작가)
<사상계>는 한국의 근대화와 민주주의라는 네이션 빌딩을 위한 주춧돌 놓기 과정에서, 서구식 민주주의와 그리고 실용주의적 문화 및 유럽의 새 예술사조 특히 동구의 반체제 작가들의 정신을 필요한 크기의 주춧돌로 배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와 민족주의가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가도 1960년대 시민사회의 시민에게 아울러 체험시켰다. 이것은 고귀한 업적이다. 이 업적을 이룩한 지식인들은 <사상계> 15년에 걸쳐 편집에 참여하고 헌신한 지식인 그룹이다. 이 가운데서 가장 용기 있게 기수노릇을 한 사람으로서, 민주주의를 위한 순교자로서 장준하를 우리는 남달리 기억하고자 한다. - 유경환(<사상계> 편집부장, 전 문화일보 논설위원)
장준하 선생을 가끔 떠올리면, 아주 부드러운 외모, 그리고 미소를 잘 짓는 얼굴이 생각난다. 내가 지금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의 이미지는 강직하고, 고집이 세고, 투쟁을 해도 타협이 없는, 그러면서도 상당히 인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함석헌 선생을 참 좋아했다. 함석헌 선생도 그를 참으로 아꼈다. 지금 장준하가 살아있으면 한국의 역사가 많이 달라졌을 텐데, 그렇게 죽고 그 죽음에 대한 수수께끼가 아직도 제대로 풀리지 않고, 그렇게 20년을 맞으니 감회가 깊다. - 강원룡 (크리스찬 아카데미 원장)
장선생과 같은 애국자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어서 이제 냉전의 벽도 녹아내려 남북간의 새 시대가 열리고 야만적 독재도 상당히 완화되었다. 아직도 애국자들의 헌신과 희생을 자신들의 전리품으로 만들어 나라와 겨레의 진운을 가로막고 있는 세력들이 있다.
갈 길이 먼 것 같으나 선생의 발자국이 있으매 우리의 발진이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며 선생의 말씀이 있기에 우리의 눈과 귀는 어둡지 않을 것이다. - 이부영 (전 국회의원)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지만, 의롭게 싸우시다가 비명에 돌아가신 선생의 삶과 사상은 아직도 뜻 있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 깊은 곳에 변치 않고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돌베개'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여 걸어가신 선생의 삶이 너무나 애국적이고 경건한 순교자의 삶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 최혜성 (전 통일원 상임연구위원)
민족 장준하 선생, 당신을 손문에게도 사바다에게도 견주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어느 누구도 아닌 민족 속의 당신일 뿐이며, 당신 이상으로서의 민족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장준하 선생, 살아 계실 때는 안경을 썼으나 이제 우리들이 가진 민족통일의 꿈속에서 당신은 안경조차도 내던진 맨 얼굴입니다. 우리 모두 당신처럼 온돌방 아랫목에서 죽지 말아야 합니다. 바람 찬 서낭당 마루에서 시멘트 매탄 건물들이 내뿜는 냉방장치의 폭염을 뒤집어 쓴 거리에서, 광장에서, 감옥에서 쓰러져야 합니다. - 고은 (시인)
나라 사랑에서 그분을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난도, 투옥이나 박해의 위협도, 그 어떤 시련도, 죽음까지도 그를 나라 사랑에서 떼어 놓지는 못했습니다. 장선생이 간절히 바란 것은, 자신을 다치면서까지 바란 것은 이 나라가 참되게 통일이 되는 것, 이 겨레가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렇게나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고 밝고 또한 옳게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장선생은 이것을 거스르는 모든 세력과 싸웠습니다. 불의와 부정과 독재에 대항에서 목숨을 내걸고 싸웠습니다. 매일 자신을 불사르고 자신의 전부를 던지면서 싸웠습니다. - 김수환(전 추기경)
선생님이 내게 보여주신 것은 결코 시정의 정치인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이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지성인이었고, 불의 앞에 용감히 도전하는 행동인이었습니다. 이런 선생님을 가르켜 한 동료는 "그는 금지된 동작을 맨 먼저 시작한 혁명가"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로보고 한 말입니다. - 법정 (승려)
선생님은 전반생을 항일구국투쟁으로, 후반생을 민주화투쟁으로 생애를 바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민족의 창의성을 북돋우고 동원하여 국가적인 현실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일체감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역사창조의 물결과 세계정세 속에서 우리가 처해 있는 위치와 나아갈 바를 정확히 판단하여 확고한 신념으로 행동화하여 항상 민중에 의지하고 민족과 자유를 위하여 전진하였기 때문에 민중으로부터 무한한 신뢰와 존경을 받으셨으며 스스로 정의구현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 홍남순 (변호사)
아! 어찌할 것인가. 선생님의 고매한 인격과 불같은 신념, 우뚝 선 정의의 혼을, 자유정신을, 민족애를 실천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참다운 양심을 지닌 민족지사가 없는 현실을. 나는 비록 의지 또한 약하지만 오늘도 장선생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기도하며 하루를 산다. - 안병원 (전 국회의원 보좌관)
장준하는 격랑 속에서도 틈만 나면 글을 썼다. 그러기에 84년 7월 7일 탈출부터 45년 8월 3일 삭발 때까지의 일기를 쓴 것이 노트 7권이나 됐다고 했고, 또 <등불> 5권과 <제단> 2권을 편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생활은 후일 <사상계> 편찬의 자산이 되었겠지만, 글을 좋아하면서도 감상적인 문약에 젖지 않았다고 한 사실은 기억해 둘 만한 것이다. 그러므로 투지 넘치는 장준하로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
그때 우리가 철석같이 모여가지고 자유민권운동을 한다고 했는데, 왜 그때는 마음을 같이했던 편집위원들이 군사독재자들에게 협력했느냐, 더구나 <사상계>가 탄압받고 장준하가 잡혀들어가고 했는데 왜 그랬느냐, 뒷날에 이에 대한 물음이 틀림없이 나올 것 같아요. 이 말을 왜 하느냐면, 우리도 우리 자체도, 그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기록에 남아야겠다고 해서입니다. 나는 정말 그걸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 김준엽 (<사상계> 편집위원, 전 고대 총장)
너
외로운
산중 고혼아
염라대왕도 눈앞이 흐려
감히 끌어갈 생각을 못한,
하늘님도 너무 아까와
차마 불러올릴 생각을 못한
너 외로운 산중 고혼아-
을지문덕 장군,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전봉준 장군, 유관순 불덩어리, 백범 김구 주석, 4·19영령들, 전태일, 김상진 열사들의 혼백에 덮 씌워
미쳐 춤을 추다가
산중 고혼이 된
아 -
우리 5천만의 뜨거운 님. - 문익환 (목사)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