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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9 11:49최종 업데이트 25.07.30 09:00

최치원도 감탄한 계곡 소리, 직접 들려드립니다

[가야산 ①] 소리로 느끼는 여름 피서... 가야산 홍류동 소릿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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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올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늘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덮어버렸다
- 최치원 <제가야산독서당> 한글 번역

최치원의 시처럼, 경남 합천 가야산은 소리로 가득 찬 산이다. 바위에 부딪히며 흐르는 계곡 물소리, 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 제 목청껏 울어대는 새들과 매미 소리까지… 이 모든 자연의 음들이 어우러지는 곳, 바로 '홍류동 소릿길'이다.

홍류동 계곡 가야산 국립공원에서 해인사 입구까지 이르는 4km 계곡으로, 가을 단풍이 너무 붉어서 흐르는 물에 붉게 투영되어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문운주

지난 24일 광주에는 연일 폭염이 이어졌다. 땀이 마르기도 전에 또 흐르던 그런 날, 시원한 자연을 찾아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홍류동 계곡, 가야산 자락 아래 흐르는 이 계곡은 여름에도 그늘이 깊고, 물은 얼음처럼 차다. 단풍으로 유명한 가을도 좋지만, 피서지로서의 홍류동은 그 자체로 특별하다.

이곳은 특히 가을이면 붉게 물든 단풍이 물 위에 투영되어 계곡이 온통 붉게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름의 홍류동은 또 다른 매력을 품고 있다. 시원한 물소리, 푸르른 숲, 고요한 사찰…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 하루였다. 출발지는 정자 '농산정'. 그곳에서 치인교까지 약 2.4km 남짓한 산책길이다.

농산정은 신라 말기 학자 최치원이 은거하며 글을 읽고 바둑을 두던 정자로,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에 위치한다. 건물은 1922년 해체 후 재건되어 1936년 보수했다. 그 이름도 홍류동 계곡의 바위에 새겨져 있는 최치원의 시에서 비롯됐다.

듣고 느끼는 길, 홍류동 소릿길

농산정 최치원이 은거하며 글을 읽고 바둑을 두던 정자로,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에 위치한다. 건물은 1922년 해체 후 재건되어 1936년 보수했다
농산정최치원이 은거하며 글을 읽고 바둑을 두던 정자로,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에 위치한다. 건물은 1922년 해체 후 재건되어 1936년 보수했다 ⓒ 문운주

홍류동 소릿길 탐방은 최치원의 자취를 따라가며 자연의 소리를 온몸으로 느끼고, 풍화와 침식이 빚어낸 암각과 지형을 관찰하기다. 이곳은 단순한 산책길이 아니다. 계곡물과 바람이 수백 년, 수천 년에 걸쳐 깎고 다듬은 자연의 조각 공방이자, 신라인 최치원이 걷고 시를 읊었던 정신의 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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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은 문창후 유허비(文昌侯 遺墟碑). 문창후는 다름 아닌 최치원의 시호다. 신라 말,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벼슬을 뒤로 하고 자연 속에 머물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가 한동안 머물렀던 터로 전해지는 이 비석 앞에 서면, 자연에 기대어 살다 간 선비의 고요한 기상이 느껴진다.

비석을 지나 가야서당까지 둘러보고 나면, 건너편에 있는 농산정(籠山亭)이 눈에 들어온다. 이 정자는 조선 시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지금은 탐방객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을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인 홍류동 소릿길 탐방이 시작된다.

숲길로 발을 들이는 순간, 물소리와 함께 시와 이야기가 흐르는 길이 펼쳐진다. 바위에 새겨진 최치원의 시구, 그가 남긴 기문(記文), 그리고 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 있다. 이 길은 단순한 탐방로가 아니라, '듣고 느끼는 길'이다.

홍류동계곡 가야산 국립공원에서 해인사 입구까지 이르는 4km 계곡으로, 가을 단풍이 너무 붉어서 흐르는 물에 붉게 투영되어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홍류동계곡가야산 국립공원에서 해인사 입구까지 이르는 4km 계곡으로, 가을 단풍이 너무 붉어서 흐르는 물에 붉게 투영되어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 문운주
홍류동계곡 가야산 국립공원에서 해인사 입구까지 이르는 4km 계곡으로, 가을 단풍이 너무 붉어서 흐르는 물에 붉게 투영되어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홍류동계곡가야산 국립공원에서 해인사 입구까지 이르는 4km 계곡으로, 가을 단풍이 너무 붉어서 흐르는 물에 붉게 투영되어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 문운주

길 초입부터 맑은 계곡물이 흐른다. 물소리는 끊임없이 귓가를 간질이고, 그 위로는 참나무류와 물푸레나무, 개옻나무, 비목나무, 소각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푸른 숲을 이룬다. 짙은 녹음 속으로 햇살이 살짝살짝 스며들며, 숲은 걷는 이의 마음마저 환하게 비춘다.

이따금 송진이 흐른 자국이 깊게 남은 소나무를 만난다. 과거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다. 송진은 1960년대까지 의약품과 화학약품 원료로 널리 쓰였다. 속껍질은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구황 식품으로 이용되었다. 나무의 상처마다 산촌의 삶과 생존의 기억이 깃들어 있다.

벌레 먹고 구멍 뚫린 썩은 나무 하나도 이곳에선 역할이 있다. 누군가의 보금자리이자, 다음 세대 생명의 양분이 된다. 죽은 나무마저 자연의 일원으로 살아 있다. 조금 걷다 보면 길상암에 이른다. 그 앞에선 한참을 멈춰 서게 된다.

다슬기, 가재, 민물새우... 어린시절 계곡 추억까지

물길이 바위에 부딪혀 폭포를 이루는 곳, 바로 분옥폭포다. 부서지는 옥처럼 맑고 청명한 소리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곳을 지나면 물길은 다시 제월담, 낙화담, 용문폭포로 이어진다. 고요하게 고인 물과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 그 모든 지형이 저마다 물의 소리와 형상을 품고 있다.

"이곳에 수달이 살고 있습니다."

수달은 맑은 물과 풍부한 먹이가 있어야만 살아가는 민감한 생물이다. 그런 수달이 머문다는 건, 이 계곡의 생태계가 얼마나 건강한지 보여주는 증거다. 안내판에는 이곳에 다슬기, 가재, 민물새우도 함께 서식한다고 적혀 있다. 이들은 단순한 물속 생물이 아니다. 나에게는 어린 시절, 여름날 계곡에서의 추억이기도 하다.

짧은 거리지만, 홍류동 소릿길은 자연의 소리와 이야기, 그리고 선인의 자취로 가득한 길이었다.
물소리, 바람 소리, 숲이 전해주는 생명의 기운은 몸과 마음을 동시에 씻어주었다. 송진 자국 남은 소나무, 수달과 다슬기가 살아 숨 쉬는 계곡, 바위에 새겨진 최치원의 시까지…

이 길은 자연이 만든 하나의 시이자 조각이었다. 오전 여정을 마치고 가야산 상가지구에서 산채비빔밥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랬다. 숲과 물, 그리고 조용한 소리가 함께했던 오전. 더위를 피한 게 아니라, 자연 안으로 들어갔던 시간이었다.

#가야산#홍류동계곡#가야산소릿길#농산정#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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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며 삶의 의욕을 찾습니다. 산과 환경에 대하여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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