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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일 오후 여의도 새누리당사앞에서 열린 '인혁당재건위사건 '사법살인' 부정하는 박근혜 규탄 기자회견'에서 고 김용원씨 부인 유승옥씨와 고 우홍선씨 부인 강순희씨가 남편의 영정사진을 들고 오열하고 있다.
12일 오후 여의도 새누리당사앞에서 열린 '인혁당재건위사건 '사법살인' 부정하는 박근혜 규탄 기자회견'에서 고 김용원씨 부인 유승옥씨와 고 우홍선씨 부인 강순희씨가 남편의 영정사진을 들고 오열하고 있다. ⓒ 권우성

우홍선 열사는 1930년 3월6일 경남 울주군 언양면 동부리(현 언양읍 변양길)에서 4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농부였다. 15세에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이듬 해 언양공립중학교(현 언양중학교)에 진학했다. 4년 뒤 언양농업전수학교에 들어가 1년을 수료하고 1950년 5월 학업을 마친다.

가업인 농사 지을 준비를 하던 중에 6.25전쟁이 발발하고 그는 1950년 9월 학도병으로 입대했다. 마을 인근에 북한 유격대가 출몰하면서 당국이 부족한 병력을 충원하고자 학도병을 모집하여 응소한 것이다. 짧은 훈련을 마친 그는 최전방에 배치되어 보병 소대장을 맡아 전투에 나섰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고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치료가 끝난 후에는 병참장교로 복무했다.

군복부 중이던 1956년 한국은행 부산지점의 은행원 강순희와 결혼하고,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1958년 육군 대위로 예편하여 장인의 회사에 다녔다. 이 시기에 그는 고향 친구인 김영광이 주도하는 '통일청년회'에 참여한다. 김영광은 무소속 국회의원 김수선의 비서였다. 1958년 9월, 김영광·김병옥 등과 자주 만나 시국과 통일문제 등을 토론하고, 4.19혁명이 일어나고 본격적으로 통일론이 제기되면서 '통일청년회'를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으로 확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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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민청은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진보적 청년 학생들의 참여로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고 우홍선의 역할은 그만큼 많아졌다. 그는 통민청의 중앙위원회 위원장과 민주자주통일협의회 경북협의회 부위원장의 책임을 맡았다. '4월혁명 완수촉진 성토대회'와 '2대악법 반대학생성토대회' 등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우홍선 열사는 서울 중부서로 끌려갔다가 20일 만에 풀려났다. 조사 결과 군경력이 고려되었던 것 같다. 장인의 회사를 그만두고 계림요업의 유한공사를 거쳐 제일축전지제작소·원륭건설 등에서 일하였다. 원륭건설 총무부장으로 일하던 1964년 9월 3일 인혁당사건으로 수배령이 내리고 현상금 10만원이 걸렸다.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1964년 1차 인혁당사건 1심 판결에서 그는 '공소외'의 인물로 처리되었다. 얼마 후 당국은 무엇 때문인지 태도를 바꾸어 그에게 다시 현상금을 걸고 체포에 나섰다. 수배령을 피해 1년간 은신하다가 1965년 8월 26일, 인혁당사건의 대법원 판결 한 달 전에 검거되었다.

우 열사에게는 장기간 피신했다는 '괘씸죄'까지 곁들여져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고, 상고심은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12일 오후 여의도 새누리당사앞에서 열린 '인혁당재건위사건 '사법살인' 부정하는 박근혜 규탄 기자회견'에서 유가족들이 희생자 8명(여정남, 하재완, 이수병, 송상진, 김용원, 우홍선, 서도원, 도예종)의 영정사진을 들고 나왔다.
12일 오후 여의도 새누리당사앞에서 열린 '인혁당재건위사건 '사법살인' 부정하는 박근혜 규탄 기자회견'에서 유가족들이 희생자 8명(여정남, 하재완, 이수병, 송상진, 김용원, 우홍선, 서도원, 도예종)의 영정사진을 들고 나왔다. ⓒ 권우성

10년의 세월이 지난 1974년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 위기에 몰리자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조작했다. 검사 기소장이다.

우홍선(44·무직·전 인혁당 창당위원) 피고인은 65년 8월에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1년 3년간 집행유예의 선고를 받은 사실이 있는 공산주의자로서 항상 공산주의 국가건설을 위한 혁신세력 규합에 혈안이 되어 있던 중, 73년 10월 경 학원 일부에서 소요가 생기고 3월 위기설 등 유언비어가 유포되기 시작하자, 피고인들의 이상인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시기가 온 것으로 착각하고, 73년 1월 초 서울 충무로 1가 소재 다방에서 상 피고인 이수병·공소 외 이성재·피고인 전창일 등과 회합하여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혼란기가 닥쳐 올 것 같으니 이틈을 이용, 혁신계 동지들을 규합하여 있다가 유사시에 민중봉기가 일어나면 이를 공산혁명으로 유도하도록 조직을 갖되 그 조직은 비밀조직으로 하고 지도위원으로 도예종·서도원을 추대하고 동소에 회합을 한 4인 지도체제로 합의·결정하여 반국가 단체를 구성하고, 그후 74년 3월까지 사이에 위 지도위원 및 상피고인 김한덕이 수차례 공하여 서울시내 소재 다방에서 회합하여 위 공산주의 국가건설을 위한 정부 전복을 위하여 전국학생연합체를 구성하여 일제히 봉기시키고 피고인 등의 조직을 동원 이에 가세·영합시켜 이를 폭도화함으로서 국가기관을 점령한 후 정부를 전복,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기로 모의하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조직방안으로 민족통일촉진회에 위장 가입하여 조직원을 포섭하고자 제안하는 등 구체적으로 정권 타도방안을 토론함으로써 내란을 예비음모하고 반국가 단체를 구성하여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는 일방, 민청학련의 활동에 대하여 정보수사기관에 고지하지 아니하는 등 긴급조치를 위반한 자임.

박정희 정권이 용공조작을 할 때이면 상투적으로 써먹었던 '각본'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우홍선 열사 등에게 적용되었다.

우홍선 열사는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고 이튿날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뒷날 유족의 재심 신청으로 대법원의 무죄 판결은 다른 열사들과 같다.

남편이 재판 중이던 1975년 2월 8일 부인 강순희는 광고탄압을 받던 <동아일보>에 유료광고를 내어 남편의 조속한 생환을 기원하였다.

여보!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그 어느 때와도 변함없이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우리들이 당한 인권유린과 억울함 이 모든 감당하기 어려운 정신과 육신의 고통을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겨나갑시다. 안정과 평안이 보장된 내일을 불만 없이 누리며 살아갑시다. 동아를 비롯하여 온 겨레가 겪는 고난이기에….

건강과 인내 아름다운 꿈을 잃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저의 삶의 전부입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1975년 2월 8일
세칭 인혁당관계로 사형선고를 받은 우홍선 피고인의 아내 강순희 올림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민족민주열사열전#김삼웅인물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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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민주열사 열전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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