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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추모 시위 모습
1987년 추모 시위 모습 ⓒ 국가기록원

전두환 5공정권의 몰락에 결정타 역할을 한 사건이 있다.

경찰이 한 대학생을 끌어다 물고문으로 죽이고, 이를 은폐한 사실이 폭로되면서 국민이 궐기하고, 마침내 6월항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 희생자가 바로 박종철 열사이다.

박종철 열사는 1965년 4월1일 부산시 서구 아미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무원이고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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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되는 해 토성초등학교에 입학하고, 2학년 되던 해 가족이 영도다리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4학년 무렵에 서대 3가로 이사를 했다.

1979년 가을, 중학교 3학년 때에 부산과 마산에서는 박정희의 폭압적인 유신체제에 반대하여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방학이 되어 서울에서 내려온 형으로부터 서울의 소식과 부산에서도 학생들과 시민들이 시위에 나서게 된 이유를 자세히 듣게 되었다. 그리고 친구와 시내로 나가서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참여했다. 어린 마음에도 박정희 정부가 크게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박종철 열사는 1980년 봄 중구 혜광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기에 그의 집이 도시계획에 걸려 새로 집을 지어야 했는데, 새 집을 지을 돈을 융자받는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과 집단적으로 사기를 당했다. 주민들은 민사소송을 제기했으나 그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박종철 열사의 식구들은 아버지가 사는 공무원 관사로 옮기게 되고 살림은 점점 어려워졌다.

박종철 열사는 학원에 갈 형편이 못되어 1년 재수 끝에 서울대학 인문대 언어학과에 합격했다. 그가 대학에 진학한 1984년 봄은 전두환 정권의 광기가 넘쳐나던 폭압의 시기였다.

중학생 때부터 '부마항쟁'에 참여했던 그는 교내의 서클 '사회사상연구회'(사사연)에 참여하고 한국사회의 모순구조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종철아 잘가그래이.. 아부지는 할말이 없대이" 박 군 아버지의 목소리를 플래카드에 담아나온 시위대
"종철아 잘가그래이.. 아부지는 할말이 없대이" 박 군 아버지의 목소리를 플래카드에 담아나온 시위대 ⓒ 6월항쟁기념관

박종철 열사와 '사사연' 학우들은 점차 심화되는 정부의 학원탄압에 맞서 학원자율화 등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제작하여 영등포시장 일대에 배포하는 등 대사회적인 방향으로 학생운동을 전개했다. 교내에서 아무리 외쳐도 언론에서는 한 줄도 써주지 않고, 국민들은 정부의 학원탄압을 거의 모르고 있다는 판단에서 취한 행동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대학들이 비슷한 상황이었다. 박 열사는 학우들과 1980년 5월 광주 참극을 찍은 사진을 돌려보며 충격을 받게되고, 힘을 모아 전두환 군사파쇼정권을 축출해야 한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1984년 5월 18일 광주민주항쟁 4주년을 맞아 첫 거리 투쟁에 나섰다.

경찰이 지키고 있다가 교문을 나서는 학생들을 거칠게 제지했다. 시위대의 맨 앞에 섰던 그는 학우 몇 명과 '닭장차'에 실려 관악경찰서로 끌려갔다. 새벽 4시에 풀려나긴 했으나, 이것이 그의 반독재 민주투쟁의 첫 시련이 되었다.

박종철 열사는 2학년이 되어 언어학과 홍보부장에 뽑히고, 4월23일 언어학과는 <언단(言壇)>이라는 회지를 창간한다. 그는 이 회지에 '시평(時評)'을 고정적으로 썼다. 그 중의 한 편이다. 전두환의 방미를 재치 있게 규탄하는 글이다.

드디어 내일(24일)이면 아저씨께서
미국 나들이를 가신다는 데,
어찌된 영문인지 환송을 해 줄려고 해도 가시는 시간조차 알리지 않네 그리고 보니 어딘가 구리내가 나는 것 같아 또 작년 매국방일 때처럼 마치 도둑 고양이 같이 다녀오실려면 가셔서 아예 오지마세요

"매국 방미(訪美) 결사반대."

박 열사는 1985~1986년에 서울대학생들의 반독재 시위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개인적인 안일한 삶보다 민주화와 통일조국의 실현을 위해 온몸을 던지기로 다짐하면서 학과공부와 함께 다양한 사회과학 서적과 각종 이념 서적을 읽으면서 투사의 길을 걷는다.

다음은 1985년 12월1일에 발행한 언어학과 회지 <말씀> 제 2호에 실린 글의 후반부이다.

살을 에는 겨울바람과 무겁기만 한 파쇼의 폭압을 우리들 개개인의 구체적인 실천 작업으로 이 겨울로서 끝장내 버리자. 그리하여 다시는 이 땅에 어떠한 겨울도 찾아들지 못하게 하자. 학우여! "파쇼헌법 철폐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는 명확한 우리들의 슬러건은 앞세우고 우리 삼민운동의 승리의 그날까지, 승리의 그날까지, 승리의 그날까지 투쟁하라!!!

그는 그렇다고 시위나 일삼는 학생은 아니었다. 방학이면 학우들과 '농활'(농촌 봉사활동)을 하고 '공활'(공장 활동)을 하면서, 이 땅의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어려운 실태를 체험했다. 대림동에 있는 세왕전기회사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를 하여 생활비를 벌기도 했다.

민중의 권익을 위해 헌신하고자 한 박종철 열사의 꿈은 전두환 정권의 '호위무사' 역할을 떠맡은 경찰에 의해 깨뜨려지곤 했다. 1986년 4월 11일 왕십리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장시간 노동 철폐하고 8시간 노동 쟁취하자.",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성동경찰서로 끌려갔다.

재판에 넘겨진 박종철 열사는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1986년 7월15일 출소했다. 3개월여 동안 구치소 생활을 한 것이다. 구치소 안에서도 함께 구속된 동료들과 "학살정권 강간정권, 군부독재 타도하자!", "성고문 자행하는 전두환 일당 처단하자!"는 등의 구호를 외치고, 이로 인해 구타를 당하는 등 '옥중투쟁'을 벌였다.

그 당시 경기도 부천경찰서에서 한 여대생을 경찰이 성고문한 사건이 일어나서 '강간정권'이라 규탄한 것이다.

한국현대사에서 큰 변곡점이 되는, 그리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1987년이 되었다. 신년의 분위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1월 13일, 박 열사는 자취집 근처에서 경찰에 붙잡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경찰은 학생운동의 선배 박종운의 거처를 대라며 추궁하였고, 그는 끝까지 '모른다.'고 답했다.

수사관들은 박종운의 거처를 모른다는 그를 결박하고, 다리를 들어 올린 채 욕조통의 물 속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저항하자 몇 명이 달려들어 물고문을 계속했고, 10시간 이상 계속된 고문으로 숨을 거두었다. 고문에 가담한 수사관들은 조한경·반금곤·황정웅·강진규·이정호 등 5명이었다.

박종철 열사를 죽인 이들은 인근 병원의 의사를 불러 응급처치를 시도했지만 이미 숨진 후였다. 살인범들은 증거인멸을 위해 여러가지 시도를 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1과장 황적준 박사가 "물고문 도중 질식사 한 것 같다"는 의견에, 경찰은 부검감정서에 '심장마비'로 해달라고 협박까지 했다.
 1987년 추모 시위 모습
1987년 추모 시위 모습 ⓒ 국가기록원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가 알려지자 방학 중인 데도 학생들은 추모제를 지내고 항의집회를 열었다. 1월 17일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수사관이 심문을 시작, 박종운 군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 치니 박군이 억 하고 죽었다."는 식의 보도 자료를 발표하여 다시 한번 국민의 분노를 유발시켰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은 정부의 조작으로 은폐되다가 가톨릭 김승훈 신부가 정의구현사제단의 이름으로 사건조작과 은폐 축소사실을 폭로하면서 진상이 알려지고, 각계 민주인사·단체들이 1987년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조작 범국민규탄대회'를 열었다. 이날은 바로 민정당이 전두환의 후계자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날이다.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은 6월 9일 연세대에서 시위 중이던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직격탄(최루탄)에 맞아 신음하다가 숨진 사건과 더불어 '살인정권'에 대한 분노로 폭발하여, 전두환 정권을 몰락시키는 6월항쟁으로 전개되었다.

박종철 열사의 희생은 그동안 방관하던 중산층, 이른바 '양복입은 셀러리맨'들까지 분개시켜 반정부 시위에 나서도록 하는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민족민주열사열전#김삼웅인물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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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민주열사 열전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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