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 독립기념관
2025년 광복 80주년 기념식장마다 태극기가 휘날리고 무대 위에서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소개된다. 그러나 한 이름은 여전히 빠져 있다. 의열단의 창립자이자 조선의용대의 총지휘관 약산 김원봉. 그는 일제의 심장을 겨눈 무장투쟁의 설계자였지만, 해방 이후 북한 정권 고위직에 올랐다는 이유로 '기념의 자리'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8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는 항일의 영웅이자 동시에 한국전쟁의 '전범'으로 불려왔다. 광복 80주년의 오늘, 우리는 이 모순된 이름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 김원봉과 열세 명의 청년은 "정의로운 일에 생명을 바치겠다"는 맹세와 함께 의열단을 조직했다. 그들은 공약 10조와 '5파괴·7가살'이라는 행동 지침을 세워, 일제의 통치기관과 친일 세력을 직접 공격하는 무장투쟁 노선을 분명히 했다.
의열단의 첫 거사는 1920년 9월 부산에서 일어났다. 박재혁은 중국인 고서상으로 변장해 경찰서장을 면담하던 중 폭탄을 투척했고, 경찰서장은 현장에서 사망했다. 박재혁은 곧 체포되어 옥중 단식 끝에 순국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최수봉이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기 위해 폭탄을 반입했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그는 법정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당당한 진술을 남겼다.
1923년 1월,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그는 경찰의 포위망 속에서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다 끝내 자결했다.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이 투쟁은 민중에게 강한 울림을 남겼다.
1926년 12월,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을 공격했다. 폭탄 일부가 불발되었지만, 그는 총격으로 일본인 관리들을 사살한 뒤 자결했다. 일제 식민 경제의 심장을 겨냥한 이 의거는 항일 무장투쟁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김원봉은 직접 폭탄을 던지지 않았으나, 표적을 정하고 자금을 마련하며 전략을 짠 설계자였다. 그는 개인적 분노를 조직적 무장투쟁으로 승화시킨 지도자였다.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 사진(1938.10.10. 중국 한구). ⓒ 독립기념관
조선의용대와 의용군, 그리고 분단의 그림자
192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단발적 폭탄 투쟁은 한계에 부딪혔다. 많은 단원들이 체포되고 순국하면서 조직은 약화됐다. 김원봉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1938년 10월, 김원봉은 중국 우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이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군사조직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의용대는 일본군 점령지 후방에서 선전·첩보 활동과 군사작전을 수행했고, 일부는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됐다.
그러나 주력 부대는 화북으로 이동해 중국 공산당 팔로군과 연계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군으로 재편됐다. 조선의용군은 태항산 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항일무장투쟁의 주력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조선의용군의 상당수는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남았다. 이들은 곧 북한군에 편입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남침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항일의 깃발을 들었던 군대가 해방 뒤에는 동족을 향해 총구를 겨눈 것이다.
광복 직후 김원봉은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해 통합 정부 수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정책, 냉전 구도, 그리고 친일 경찰의 탄압이 그의 길을 막았다. 특히 노덕술은 일제강점기 고등계 형사로 독립운동가를 고문했던 인물로, 해방 후에도 경찰 고위직을 유지하며 김원봉과 동지들을 집요하게 탄압했다.
<약산 김원봉 평전>은 이 시기 노덕술의 수사가 김원봉이 1948년 월북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배경 가운데 하나였다고 기록한다. 항일의 영웅이 해방 조국에서 친일 경찰에게 모욕당한 현실은 그를 더욱 고립시켰다.
북으로 간 김원봉은 내각 부수상과 노동상 등 고위직에 올랐다. 북한은 항일투사 출신들을 대거 영입해 체제의 정통성을 선전했다. 그러나 김일성을 중심으로 권력이 재편되면서 외부 출신 혁명가들은 차례로 숙청당했다.
1958년, 김원봉 역시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살설과 암살설이 엇갈리지만, 분명한 것은 이후 그의 이름이 북한의 공식 기록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항일의 기획자는 남한에서 외면당했고, 북한에서도 버려졌다.
김원봉 가족과 동지들의 비극
김원봉의 숙청은 곧 가족과 동지들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의 아내 박차정은 이미 1944년 중국 전선에서 전사했지만, 해방 이후 북한에 남은 의열단계와 연안파 출신들은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의 일인 독재 체제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차례로 숙청됐다. 소련파·연안파 숙청은 북한 권력 재편의 상징적인 사건이었고, 김일성은 이를 통해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했다.
남한에 남은 김원봉의 가족들 삶은 더욱 참혹했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 속에서 지속적인 감시와 차별을 받았으며, 일부는 고문과 폭행, 심지어 피살당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철저히 배제당한 채 생계를 잇지 못하고 비참한 삶을 이어갔다. 북한에 남은 동지들의 가족들 또한 연좌제의 굴레 속에서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사회적 배제 속에 고통을 겪었다. 항일의 영웅을 가족과 동지로 둔 이들이 해방 이후에는 역설적으로 '불온분자'의 가족으로 낙인찍혀 각기 다른 비극적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김원봉을 둘러싼 가장 첨예한 쟁점은 '국가 서훈' 문제다. 그는 의열단을 조직하고,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항일무장투쟁의 한 축을 이끌었지만, 해방 이후 북한 정권의 고위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정부는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훈장을 추서하지 않았다.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 경력을 기려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자, 보수 진영은 "6·25 남침 전범에게 훈장을 줄 수는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반대로 진보 진영에서는 "항일투쟁의 공과 한국전쟁의 과는 분리해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됐다. 논쟁 끝에 김원봉의 이름은 다시 지워졌고, 그의 공적은 여전히 '기념의 자리'에 서지 못한 채 역사 속에 묻혀 있다.
김원봉에게 '전범'이라는 낙인이 붙은 것은 단순히 북한 정권의 고위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6·25 전쟁 당시 북한 지도부의 일원으로 개전 준비와 정치 선전에 관여한 인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남한 사회에서는 그를 '한국전쟁 전범'으로 지목해왔다.
그러나 국제재판이나 사법적 절차를 통해 그가 전범으로 공식 규정된 적은 없다. 김원봉의 전범 이미지는 사실상의 법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언사 속에서 굳어진 것이다. 그의 항일투쟁 공적은 전쟁 책임이라는 프레임에 가려져 있었다.
비교의 거울, 백선엽

▲1950년 10월 19일 평양 입성 후 프랭크 밀번 제1군단장(소장)에게 평양 탈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제1사단장 백선엽 장군. ⓒ 청미디어
같은 시대, 정반대의 궤적을 걸은 인물이 있다. 바로 백선엽이다. 그는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했다. 특설대의 임무는 항일·공산 게릴라 토벌이었고, 그는 직접 쓴 회고록 <군과 나>에서 "상대는 독립군이 아니라 공산 게릴라였다"고 주장했지만, 항일 무장세력을 겨냥한 조직이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백선엽은 국군 제1사단장으로 낙동강–다부동 전선을 지휘하며 방어선을 지켰다. 이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이어지는 시간을 벌어준 결정적 역할이었다. 덕분에 그는 '전쟁 영웅'으로 불렸고, 2020년 그의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을 두고도 사회는 '영웅 예우'와 '친일 전력' 사이에서 갈라졌다.
김원봉은 의열단을 조직하고, 조선의용대를 창설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다. 동시에 그는 북한 정권의 고위직이었고, 6·25 전쟁의 지도부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공과 과가 분명히 공존한다.
그러나 공적을 삭제한다고 해서 역사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김삼웅의 <약산 김원봉 평전>은 "김원봉을 영웅으로만 그려서도 안 되고, 월북의 죄로만 재단해서도 안 된다. 공과 과를 함께 기록해 후대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광복 80년, 지금 필요한 것은 '영웅 만들기'도, '악마화'도 아니다. 불편하더라도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기록해야 한다. 약산을 위한 변명은 곧 기록을 위한 변명이다.
김원봉은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중국에서도 버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름을 지워서는 안 된다. 항일의 조직자이자 분단사의 희생양이었던 그의 생애를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숙한 기념의 출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약산 김원봉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