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철학사를 위대한 철학자의 이름과 저작을 따라가며 배운다. 하지만 이런 서사는 때때로 인물 중심으로만 흐르면서, 실제로 어떤 사상가가 후대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최근 미국 튤레인 대학교의 베커(Becker)와 컬로타(Culotta) 연구팀이 이 문제를 데이터로 풀어냈다. 연구진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방대한 철학 문헌을 모아 철학자들이 서로를 어떻게 인용하거나 언급했는지 계량적으로 분석했다.
기원전 550년부터 1940년까지 철학 텍스트 2245편에서 29만 4970건의 '인용(reference)'을 추출해,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는지 텍스트 속 관계망으로 뽑아낸 것이다. '누가 얼마나 많이 언급됐나(중심성)' '철학자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얼마나 했나(매개 중심성)' '서로 서로 인용한 비율은 얼마나 되나(상호 참조율)'를 수치화하고 시각적으로 제시했다.
비유하자면, SNS에서 누가 가장 많은 팔로워를 가지고 있고, 어떤 인물이 허브 역할을 했는지 찾아내는 것과 비슷하다. 연구자들은 이를 통해 철학사가 단순한 연대기의 나열이 아니라, 거대한 지식 네트워크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철학사를 '고독한 천재의 기록'이 아니라 '거대한 인맥 지도'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철학계의 극심한 불평등

▲플라톤의 인용 규모는 압도적 1위 ⓒ gottapics on Unsplash
이 분석에서 플라톤은 단연 '고대판 인플루언서'로 떠올랐다. 인용의 규모를 SNS의 "좋아요" 수와 리트윗 수로 치환하면 압도적 1위라는 얘기이다. 플라톤과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체 인용의 20%를 차지하며, 상위 10명의 철학자가 전체 인용의 40%를 독차지했다.
쉽게 말해, 철학자 100명 중 단 한 명이 전체 인용의 무려 40%를 차지한다는 뜻이다. 이런 분포를 물리학에서 '파워 법칙 분포(power law distribution)'라고 하는데, 소수의 슈퍼 스타가 대다수의 주목을 독식하는 구조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네트워크에서 중심성(centrality)이 가장 높으며, 둘의 영향력은 그동안 알려진 것보다 철학 텍스트에서는 훨씬 더 압도적이다.
연구진은 인용의 방향성, 즉 '상호 참조율(reciprocity)'도 분석했다. 이는 A가 B를 인용했을 때, B도 A를 다시 인용하는 비율을 뜻한다. 분석 결과, 전체 데이터 셋에서는 평균적으로 텍스트 100편 당 1~2편 정도만 서로 인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주변 철학자들은 영향력이 큰 거인 철학자(플라톤·칸트 등)를 자주 인용했지만, 반대로 거인들은 주변 철학자들을 거의 인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인용의 화살표는 거의 일방적으로 '주변→거인' 쪽으로 향했다.
이는 철학사가 단순히 시간 순서대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거인이 수많은 후배들에게 사유의 불씨를 던지는 방식으로 계승된 것임을 보여준다. 데이터가 그려낸 것은 바로 이러한 '철학적 전파의 단방향성'이며, 거인의 사상이 다음 시대의 지적 지평을 열어가는 과정이었다.
학문의 경계를 넘나든 연결자들
철학계의 '슈퍼 브릿지(bridge)'도 있었다. 네트워크 분석에서 '매개 중심성'이 높은 인물은 A와 C를 이어주는 B 같은 존재인데, 의외로 괴테, 프랜시스 베이컨, 벤자민 프랭클린이 꼽혔다.
- 괴테 : 문학과 과학, 철학을 잇는 다리.
- 베이컨 : 경험론 철학자이자 과학 혁신의 아버지.
- 프랭클린 : 정치·언론·발명까지 아우른 미국판 '르네상스 맨'.
철학 네트워크는 순수 철학자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경계인이 중심에서 다리를 놓아 주었음을 보여준다. 네트워크에서 또 다른 중심은 칸트였다. 그는 형이상학·인식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 많이 인용되며, 심리학(프로이트), 수학·논리학(괴델·러셀), 교육학(듀이), 여성철학(보부아르)으로까지 확산되었다. 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과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또한 철학자가 아닌 뉴턴과 다윈도 큰 허브였다. 뉴턴은 절대 공간·시간 개념으로, 다윈은 생물학을 넘어 정치·종교 담론에서 인용되었다. 고대와 중세를 잇는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 전통과 기독교 교리를 결합해 아퀴나스로 이어지는 토대를 마련했다.
호메로스는 철학 논의의 '문화적 원천'이었고, 괴테는 문학과 예술이 철학과 얼마나 긴밀히 얽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철학 네트워크는 문학·과학을 아우르는 거대한 지식망이었다.
데이터를 알고리즘으로 묶어 보면 학자들이 끼리끼리 모여 그룹을 이룬다.
- 고대 그리스 : 호메로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 중세 기독교 :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 계몽주의 : 루소, 칸트, 볼테르, 디도르
- 독일 관념론 :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분야 별로는 정치학파(루소, 홉스, 밀, 벤담), 형이상학파(칸트, 스피노자, 헤겔, 버클리)가 눈에 띈다.
이처럼 끼리끼리 모여 있지만, 다재다능한 르네상스형 인물들이 학문의 가교 역할을 하며 전체 네트워크를 떠받쳤다. 문학자인 호메로스와 괴테가 철학 그룹에 속한 것은 서구 철학이 문학·예술과 긴밀히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철학사를 다시 읽는 눈
이 연구는 철학사를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철학은 몇몇 고립된 천재의 산물이 아니라,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서로 이어가며 쌓아 온 집단적 사유의 과정이다.
플라톤의 질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답하고,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가 그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전통적으로는 비슷한 영향권 안에서만 묶이던 철학자들이, 데이터 속에서는 의외의 교차점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예컨대 니체와 마르크스가 전통을 비틀며 새로운 사유를 열어 간 장면은 단절이 아니라 여러 지적 갈래가 교차하는 허브로 드러난다. 특정 철학자가 단순히 '시대의 대표자'가 아니라, 다양한 사상 네트워크 속에서 연결 중심성을 발휘했음을 시각화로 보여준 것이다.
데이터로 그려낸 철학사 네트워크는 단순한 수치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사유와도 연결되고, 나아가 오늘날 SNS의 구조와도 겹친다.
[참고문헌]
Becker, R., & Culotta, A. (2025). A computational analysis and visualization of in-text reference networks across philosophical texts. arXiv. https://arxiv.org/abs/2504.200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