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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충남 서천 금강하구로 향했다. 본래 목적은 도요새였다. 해마다 가을이면 금강하구는 수많은 도요·물떼새가 내려앉는 곳이기에, 그들의 쉼과 먹이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이 내겐 중요한 일정이었다. 바닷물이 빠진 갯벌 위로 작은 점처럼 흩어진 새 무리들을 찾아 나서던 중,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이 펼쳐졌다.

하늘 위에서 어딘가 낯익은 실루엣이 나타난 것이다. 긴 날개, 상대적으로 작은 머리, 넓게 퍼진 꼬리. 순간 '혹시 벌매?'라는 생각이 스쳤다. 평소 섬에서, 그것도 산 정상에서나 보곤 하던 그 새를 바닷가에서 만난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한 마리가 나타난 뒤, 어디선가 또 다른 벌매가 나타났고, 다시 또 다른 한 마리아 합류했다. 그렇게 개체 수가 늘어나더니 결국 열 마리에 이르렀다.

열 마리의 벌매가 동시에 범상(飜翔)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파란 가을 하늘을 넓게 가르며 원을 그리던 그들은 무겁지 않았고, 오히려 부드럽고 유연하게 흐르는 듯했다. "벌매는 산 위에서 만나는 새"라는 내 머릿속 고정관념은 한순간에 깨졌다. 그들의 비행은 놀라움과 함께 금강하구라는 공간이 품고 있는 힘을 다시금 깨닫게 했다.

ⓒ 대전환경운동연합

벌매(Pernis ptilorhynchus)는 독특한 맹금이다. 대부분의 맹금이 작은 새, 설치류, 파충류를 사냥하는 것과 달리 벌매는 말벌과 꿀벌의 유충을 주된 먹이로 삼는다. 땅속에 숨은 벌집을 발톱으로 파내고, 나무 위에 매달린 말벌집을 공격해 애벌레를 꺼내 먹는다. 위험을 무릅쓴 특화된 사냥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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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벌매는 몸에 특별한 적응을 가지고 있다. 머리와 목의 깃털은 촘촘하고 짧아 벌침이 쉽게 박히지 않도록 방어막 역할을 한다. 긴 부리는 벌집 깊숙이 닿을 수 있도록 진화했고, 발톱 구조 역시 땅속을 파내거나 집을 긁어내는 데 적합하다. 심지어 일부 연구자는 벌매 깃털에서 화학적 방어 물질이 발견될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독특한 생태 덕분에 영어로는 'Honey-buzzard(꿀벌 매)'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국 이름 '벌매'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한반도에서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철새로서 매년 이동 경로를 따라 관찰된다.

벌매는 시베리아와 한반도, 일본 북부 등지에서 번식한 뒤 가을이면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대륙까지 남하한다. 봄이면 다시 북상해 번식지를 찾아간다. 이동 과정에서 이들은 산 능선을 따라 상승기류를 타거나, 바다를 횡단하기도 한다.

그래서 보통의 관찰 기록은 산 정상에서 이루어진다. 탐조인들은 높은 산 정상에 올라 바람을 타고 이동하는 벌매 무리를 만난다. 하지만 이번처럼 금강하구 바닷가에서 10마리나 되는 무리를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그날 벌매가 금강하구 위를 돌며 범상하는 모습은, 마치 이곳이 그들의 여정 속 잠시 머무는 쉼터임을 보여주는 듯했다.

유럽에서는 유사종인 'European honey-buzzard(Pernis apivorus, 유럽벌매)'가 비교적 흔하다. 하지만 Pernis ptilorhynchus(동양벌매)는 주로 아시아권에 분포하기 때문에, 유럽이나 미국에서 나타나면 이른바 '길 잃은 손님(vagrant)'으로 기록된다. 그래서 서구의 탐조가들 사이에서는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깜짝 손님'으로 불리며 관심을 모은다.

이번 만남은 단순히 벌매 10마리를 목격했다는 기록을 넘어선다. 금강하구라는 공간의 힘을 증명해 준 순간이었다. 금강하구는 동아시아-호주 철새 이동 경로(EAAF) 상에서 가장 중요한 중간 기착지 중 하나다. 해마다 수십만 마리의 도요·물떼새가 이곳에서 쉬며 먹이를 채운다. 국제적으로도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어 보호받고 있는 이유다.

그날 내가 찾은 목적 역시 도요새였다. 그러나 도요새의 서식지에 발걸음을 옮긴 나는, 하늘 위에서 벌매의 장엄한 비행을 목격했다. 이는 곧 금강하구가 단지 갯벌새들만의 땅이 아니라, 이동 중인 맹금류조차 스쳐가며 연결되는 '생명의 길목'이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한강 하구, 낙동강 하구와 함께 금강하구는 한국의 3대 하구 습지로 꼽힌다. 하지만 이곳 역시 간척, 개발, 수질 오염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들은 여전히 이곳을 찾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벌매 10마리의 범상은 금강하구가 지닌 생명력의 증거이자, 우리가 지켜야 할 이유를 분명히 보여준다.

 비행중인 뒷부리도요
비행중인 뒷부리도요 ⓒ 이경호

보호 단체들은 벌매를 멸종위기종 목록에 올려 보전의 필요성을 호소한다. 그러나 현장에서 마주한 나는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마리에서 시작해 열 마리로 불어나며 하늘 가득 수놓던 그들의 모습은 단순히 '조류 관찰'의 차원을 넘어선, 살아있는 생명의 장엄한 드라마였다.

나는 도요새를 찾으러 나섰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벌매였다. 뜻밖의 조우가 내게 준 감동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자연은 때로 이렇게 예기치 못한 순간을 선물하며, 우리가 왜 이 땅의 생명을 지켜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다.

#벌매#멸종위기종#뒷부리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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