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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4 15:16최종 업데이트 25.10.04 15:16

지역과 교류 만드는 '길손'

지역 쇠퇴 현실 속 사라져가는 전통문화

 땅끝만물슈퍼 앞 평상에서 점심식사 후 길가 농가의 담에 그려진 '땅끝해뜰마을'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땅끝만물슈퍼 앞 평상에서 점심식사 후 길가 농가의 담에 그려진 '땅끝해뜰마을'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 (사)사람길걷기협회

9월 8일, 국토종주 첫날의 첫 점심식사를 남전마을 땅끝만물슈퍼 앞에서 마치고 나니 언제인듯 비가 그쳤다. 길가 농가의 담벼락에 '땅끝해뜰마을'이라고 쓴 글자가 유난히 크게 들어온다. 자연의 운행 이치에 삶을 맞춘 소박한 해뜰마을이 항상 해가 뜨는 삶의 희망을 알리고 있다.

해 뜨는 마을 영전리의 기분 좋은 메시지에 업되어 마을 골목길로 접어들자마자 폐교가 나타난다. 기둥이 삭은 모습의 정문 안쪽 운동장에 '송암선교복지원'이라고 쓰여진 입석 간판이 보인다. 어린이가 사라진 학교가 요양 노인들을 위한 시설로 대체된 이 모습이 오늘날 한국이 겪는 초고령화와 지방 소멸의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지역 쇠퇴를 막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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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연구원은 9월 30일 발간한 '미래 국토이슈 전망과 대응전략' 국토정책 브리프 자료에서 국토의 메가트렌드로 인구 리스크와 지역소멸 두 가지를 꼽고, 수도권·대도시 집중과 지역 쇠퇴라는 양극화 현상이 앞으로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했다.

지자체든 역대 정부든 거의 대부분은 우리나라가 처한 이 같은 위기 현상에 대한 극복의 해법을 산업적 측면에서만 찾았다. 지방을 살린다며 일자리 기업이나 지역 거점 클러스터를 조성하기 위해 지역의 전통이나 특색을 무시하고 대대로 살아온 주변 산천의 지형과 자연마을까지 파괴하거나 피해를 주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2월 용인 원삼면 주민 200여 명이 반도체 클러스터 공사에 반발해 "청정자연 원삼면을 공장지대로 만드는 것을 규탄한다"며 시위와 삭발까지 하며 반대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지역 경제 활성화를 빌미로 한 산업적 접근이 환경 파괴와 생활환경 악화, 공동체와 전통 파괴 등 환경적·사회적 피해를 낳고 있다.

땅값, 집값 등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이 문제다. 대대로 살아온 삶의 이야기와 역사, 한국적 정서를 배태한 우리 국토와 지방의 자연마을들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작은 것 하나까지 우리의 것을 소중히 여길 때 한국적 정체성이 살아나고, 그것이 곧 세계와 통하는 통로가 된다. 지역 쇠퇴를 막을 해법의 시작은 기업이 아니라 지역의 특색과 전통이 살아 있는 소단위 마을이 돼야 한다. 이 땅의 혈맥을 돌게 하는 실핏줄 같은 마을이 살아나야 우리 국토 전체가 살아난다. 마을이 죽고 공장이 서는 것은 탈 많은 도시의 확장이며 우리의 것을 잃는 일이다.

지방이 해야 할 최우선 과제

가장 우선은 마을을 중심으로 대도시와 차별화된 지방 만이 가질 수 있는 자연 자원을 살리고 환경 공해를 없애므로 깨끗한 시골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삶의 환경이 좋은 곳을 찾아 사람들이 모이면, 사람이 있는 곳에 자연적으로 서비스·유통·운수·교육·시설·요식업 같은 지역 기반 일자리가 늘어난다. 교통 여건만 좋으면 마을이나 단위 지역이 모든 생활 기반을 갖출 필요가 없다.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의 '도시지역 자연환경 훼손 진단과 복원 방향'(2019)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자연환경이 많을 수록 거주지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도시에 있는 자연보다 야생의 자연이 마음의 안정과 힐링 기여도가 높았다. 즉 원래의 자연을 많이 보존하고 있는 지역이 거주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유리한 환경에 있다. 유휴 시간이 많아지는 첨단 AI시대일 수록 자연의 가치와 효용성은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지방 활성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의 특색을 살리면서 환경을 보존하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지역 정책이 우선 전제돼야 한다.

논밭을 가로질러 북평면이 시작되는 해남반도 동해안으로 나섰다. 이곳 평암리 안평마을 앞 바다는 만처럼 움푹 들어온 지형인데, 썰물 때면 만이 시작되는 곳까지 끝이 안보일 만큼 넒은 갯벌이 드러난다. 쌀 농사가 주업인 마을 주민들은 이 청정 갯벌에서 손낙을 즐겼다.

언제부터인가 해안가에 폐농기계와 건축자재들이 쌓여 방치되고 있고, 갯벌은 황무지처럼 적막하다. 설혹 시골 마을의 고령화가 빈 집과 빈 땅을 늘린다 해도 무분별한 공장 유치나 개발로 인한 환경 훼손의 빌미가 되어선 안된다. 깨끗한 자연환경을 지키는 것은 지방이 해야 할 최우선 과제이다.

한 지역 주민이 확인시켜 준 '도보 국토종주'의 가치

갯벌을 반쯤 삼킨 바다가 멀리 보인다. 바다가 꽉 차 있던 만조 때 이곳에서 백조 무리를 보며 겨울바다의 멋에 빠졌던 6년 전의 감동을 회상해 본다. 깨끗한 자연환경을 가졌기에 어디서도 보지 못한 바다에 잠긴 하얀 갈대밭을 보며 황홀해 했던 것도 이곳 북평면 해안가였다. 이 멋진 자연환경이 영원히 지켜지길 바라는 마음을 채워 담으며 둑방길을 걷는다.

안평마을 앞바다 드넓은 청정 갯벌을 자랑하는 북평면 안평마을 앞바다의 둑방길을 걷는다.
안평마을 앞바다드넓은 청정 갯벌을 자랑하는 북평면 안평마을 앞바다의 둑방길을 걷는다. ⓒ (사)사람길걷기협회

평암리 하천을 넘어선 곳부터는 해안길이 아닌 남부아랫길(국도나 지방도가 아닌 마을길)로 걷는다. 묵동마을을 향해 고갯길을 걷고 있는데, 차가 한대 우리 옆에 선다. 차창을 열더니 멀끔한 신사 한 분이 '걷기 잘 하시고 안전하게 잘 가시라'고 먼저 인사를 건넨다. 누군가 했더니 아까 오전에 점재를 넘어왔을 때 농사일을 보다 만났던 영전리 마을 주민 분이시다.

"아이고 너무 멋지게 변신하셔서 몰라보겠어요."

마을을 지키며 사는 분과 마을을 지나는 손님 사이에 정이 오간다. 정은 힘을 만든다. 조금은 지쳐가던 때 다시 힘을 낸다.

국토종주는 그 자체로 힘이 있다. 우리는 '국토종주' 깃발을 배낭에 양 옆으로 꼽고 걷는다. 그리고 마주치거나 지나는 지역 주민들께 반드시 인사를 건넨다. 이것은 하나의 흐름을 만든다. 국토종주의 행렬이 많을 수록 우리 국토가 기가 흐르는 살아있는 땅이 된다. 생산의 자급자족 체제가 아닌 교역이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듯, 지역에 손님이 지날 때 그 지역도 생동한다. 쌩 하고 차나 자전거로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교류 없는 통과'가 아니라 지역 주민과 인사하고 얘기할 수 있는 '교류를 만드는 길손'이어야 지역 활성화가 이뤄질 수 있다.

수백년 헌식굿 묵동마을 이야기

이 고개를 넘으면 전통 헌식 굿으로 유명한 500년 묵동마을이 있다.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듯 마을 어귀엔 550년 가량 된 느티나무가 서 있다. 정자목 옆 정자에 마을 어르신들이 앉아 계신다. 단원들이 쉬는 동안 인사를 드리고 정자로 올라섰다. 묵동마을의 헌식 굿의 유래가 궁금해 여쭈어보았다. 당산굿이나 씻김굿, 별신굿 같은 얘긴 여러번 들어봤지만 헌식굿은 생소해 더 궁금했다.

어르신들은 우리가 누군지 의아해 처음엔 입을 안 떼시더니 "우리나라를 알고 싶어 도보로 국토종주를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니 천천히 입을 여신다. 나중엔 마을 내력까지 상세히 설명해 주신다.

 묵동마을 정자에서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헌식굿과 마을의 유래를 상세히 듣고 있다.
묵동마을 정자에서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헌식굿과 마을의 유래를 상세히 듣고 있다. ⓒ (사)사람길걷기협회

"옛날엔 고기 잡으러 배를 타다가 풍랑이나 조난을 당해 죽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누군지도 모를 시체가 해안에 떠밀려 오면 그 분들 장사를 지내 주면서 혼을 위로하고 안식을 빌어 주었어요."

"아, 그랬군요. 안타깝고도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헌식굿으로) 대회 나가서 상도 타고 했는데, 지금은 하는 분도 없고 벌써 옛날 이야기가 됐네요."

묵동마을 헌식굿은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지내는 위령제 성격의 굿이다. 음력 정월 열나흘 날 저녁에 영을 불러와 대보름 밤에, 마을 앞 바닷가 들판에서 지냈다. 과거엔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왔다. 신원을 몰라도 뱃사람들의 죽은 영혼을 동등하게 귀히 여겼던 조상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헌식굿은 풍랑이 심했던 땅끝에서 발달해 송지면 동현마을에서도 이어오고 있고, 해남반도의 반대편인 이곳 북평면 묵동마을도 헌식굿의 전통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지역 소멸의 가장 직접적이고 큰 피해는 자연마을부터 찾아오고 있다. 전통문화가 같이 소멸되고 있는 점이 가장 안타깝다.

어르신은 이어 옛날 번영했던 마을 모습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

"옛날엔 마을 개천이 하얀색이 될 정도로 쌀 씻은 물이 많이 흘러내렸어요. 마을 서당에 공부하러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왔어요. 저기 서당 선생님의 비석이 있어요."

어르신이 가르키는 곳에 육영에 힘썼던 오난포 선생을 기리는 '난포오공육영비'蘭圃吳公育英碑가 앞에 문을 달고 사방으로 쌓은 돌담 안에 소중히 모셔져 있다.

"번성했던 큰 마을이었군요. 그러면 저 앞에 높은 돌 기둥은 무엇입니까?"

"이 마을이 하늘에서 보면 여성의 음부 모양이어서 부족한 기를 보완하기 위해 남성 상징물을 세웠던 것인데 옛날엔 더 높았지요. 거의 절반은 잘라졌어요."

잠깐의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못 듣던 얘기가 쏟아져 나온다. 바위는 '묵동리 좆대바위'로 불리는 남근석이다. 마을이 터 잡은 지형에 따라 재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풍수 신앙이자, 성 신앙의 성격도 갖고 있다. 이 모두 마을의 풍요를 빌고 악귀나 질병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가진 민속 신앙이다.

다시 바닷가로 나서면 한반도 최남단의 해상 관문이었던 이진마을이 있다.

 풍수신앙과 성신앙이 접목된 남근석이 묵동마을을 지키고 있다.
풍수신앙과 성신앙이 접목된 남근석이 묵동마을을 지키고 있다. ⓒ (사)사람길걷기협회



#해남#해뜰마을#한국종단트레일#국토종주#평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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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국토종주 HANT

나일영 (kumos) 내방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학술관련 IT회사 창업, 판교테크노벨리 IT 벤처회사 대표로 재직 중에 건강을 위해 걷기를 시작한 것이 계기가 돼 Hiker로 살며 사단법인 사람길걷기협회를 설립하고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사람길로 국토 종주길 창시자, 현재 사람길국토종주단 인솔 중. (사)한국여행작가협회 정회원. KIC Silicon Valley Alumni Me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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