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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연휴를 앞둔 2일 서울 시내 한 전통시장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추석연휴를 앞둔 2일 서울 시내 한 전통시장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 연합뉴스

'이번 추석은 역대급 연휴입니다.'

뉴스 앵커의 밝은 목소리를 들을 때만 해도 그 문장이 이렇게 무겁게 들릴 줄은 몰랐다. 비행기값을 확인하는 순간, 현실은 바로 정리됐다. 편도만 10만 원대, 왕복으로 계산하니 네 식구 이동 비용이 한 달 식비를 훌쩍 넘어섰다. 잠시 고향행을 고민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올해는 그냥 제주에서 쉬자." 그렇게 결심했지만, 그 '쉼'이 얼마나 다른 의미로 다가올지 그땐 몰랐다.

펑크난 바퀴와 멈춰버린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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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첫날은 하늘이 심술을 부렸다. 하루 종일 비가 퍼붓고, 설상가상 차 바퀴가 펑크가 났다. 결국 멀리 나가지 못하고 근처 친정집에서 오전과 이른 오후를 보냈다. 아이들은 집 안을 뛰어다니며 쌓인 에너지를 풀었고, 나는 카센터를 찾으며 '명절의 시작'을 실감했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쉬고 싶었지만, 도무지 쉴 수 없는 연휴의 첫날이었다.

연휴가 길어진다는 건 곧 끼니의 수가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3일부터 10일까지 일주일 동안 세 끼와 간식까지 합치면 총 35번의 식탁을 차리는 셈이다. 이번 연휴의 진짜 키워드는 '쉼'이 아니라 '돌봄'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려오는 "엄마, 배고파" 소리에 인덕션과 전자레인지는 쉴 틈 없이 돌아간다.

 (왼쪽)오일장에서 장보는 것을 즐기는 3세 꼬마. (오른쪽)제주 서귀포 외돌개에 가면 바람의 언덕 잔디밭 또한 절경.
(왼쪽)오일장에서 장보는 것을 즐기는 3세 꼬마. (오른쪽)제주 서귀포 외돌개에 가면 바람의 언덕 잔디밭 또한 절경. ⓒ 이현숙

둘째 날엔 서귀포향토오일장을 찾았다. 다행히 연휴와 장날(4일, 9일)이 겹쳤다. 아이들은 오일장 가는 길을 유난히 좋아한다. 마트와는 다른 사람 냄새, 생생한 목소리, 그리고 상인들의 인심이 있는 곳. 꼬마 손님에게는 사탕 하나, 요쿠르트 하나가 더 붙는다. 아이들도 그 따뜻함을 안다.

첫째 아이와 할아버지는 가장 먼저 옥수수와 호떡을 샀다. 엄마와 할머니, 둘째 꼬맹이는 계란 한 판, 콩나물, 부추, 당근, 양파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연휴 메뉴를 정하며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잡채면 되겠어. 한 솥 만들어두면 두 끼는 해결이겠지.'

하지만 경험상 안다. 잡채는 절대 이틀을 가지 못한다. 그릇에 담는 순간 사라지는 신기한 음식. 이번엔 꼭 넉넉히 만들어보리라 마음먹었다.

어디든 가야 하는 연휴

셋째 날, 날씨가 맑게 개었다.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오늘은 어디 가?" 그 한마디에 하루 일정이 정해진다. 집에 있자니 에너지가 폭발할 것 같고, 나가자니 관광객이 몰릴 게 뻔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다. 결국 향한 곳은 '외돌개'. 바람의 언덕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고른다. 반짝이는 윤슬 사이 홀로 선 외돌개는 어른들의 몫이었고,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아이들은 잠시나마 천국에 닿은 듯했다. 세찬 바람 속에서도 마음은 오랜만에 고요했다.

넷째 날의 행선지는 '비밀의 숲'이었다. 원래는 우도에 가려 했지만 오전 10시 반이 되기도 전에 성산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고, 종달리 선착장 역시 배편이 매진이었다. 급히 만장굴로 방향을 틀었지만 임시폐쇄 중으로 입장이 불가했다. 계획이 줄줄이 어긋나자 남편이 대신 찾아낸 곳이 비밀의 숲이었다.

입장료는 저렴했고, 조용한 숲길에 아이들의 웃음이 울려 퍼졌다. 사려니숲의 축소판 같은 공간에서 말과 염소에게 당근을 건네는 아이들의 얼굴은 햇살처럼 환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게 진짜 여행이지.' 관광지가 아니어도, 아이들이 웃을 수 있는 곳이면 충분했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아이들이 잠들었다. 창문 밖으로는 제주의 가을 바람이 스쳤다. 연휴가 절반이나 남았지만, 이상하게 그 피로가 싫지 않았다. 어쩌면 엄마에게 여행이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잠든 조용한 순간을 마주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비밀의 숲'. 사려니숲의 축소판 같은 공간.
'비밀의 숲'. 사려니숲의 축소판 같은 공간. ⓒ 이현숙

연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드디어 잡채를 만들 예정이다. 오일장에서 사온 재료들이 냉장고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비록 고향에는 가지 못했지만, 이곳에서 보낸 일주일은 또 다른 '돌봄의 기록'이 될 것 같다. 네 번의 외출, 수많은 설거지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 사이에 잠깐씩 찾아오는 평화. 그 모든 장면이 '엄마의 연휴'를 완성해 간다.

화려하지 않지만, 매일의 끼니와 짧은 여행, 예기치 않은 소소한 일들이 모여 또 하나의 기억이 됐다. 그리고 나는 다시 다짐해본다. 다음 연휴에는 조금 더 쉬어보자고. 하지만 알고 있다. 그 '쉼'이라는 단어가 내게 닿는 날은 아마 아이들이 잠든 그 순간 뿐일 거라는 걸. 그래도 괜찮다. 그 조용한 몇 시간 몇 분이, 이번 연휴의 모든 피로를 덮을 만큼 반짝일 테니까 말이다.

#제주살이#추석연휴#명절현실#외돌개#오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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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로 이주해 두 아이를 키우며 삶을 기록하는 엄마입니다. 도시 부모들의 로망과 현실, 육아와 배움의 이야기를 글로 전합니다. 생활 속에서 찾은 진짜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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