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8일 오후 2시를 넘기는 시각, 묵동마을에서의 휴식을 끝내고 다시 길을 나선다. 언덕을 넘어가는 길가 먼 발치로 바닷가에 옹기종기 모인 신홍마을이 보이고, 이내 너른 들판 위의 서홍마을 중앙을 통과한다. 두 마을 다 300여 년 역사를 가진 땅끝의 자연마을들이다. 서홍리 청정 앞바다로 나서 둑방길을 따라 걷는다. 걸어오는 동안 썰물이 더 진행돼 드넓은 갯벌만 남았다. 갯벌 안으로 돌담길이 조성돼 있다. 바지락 채취 등을 위해 갯벌 한가운데에 조성해 놓은 길이다. 단원들이 갯가 그늘에 쉬고 있는 동안 단원 한 명이 거의 안보일 때까지 걸어 들어갔다가 나온다.
"망둥어랑 게들이 엄청 많아요."
누구도 터치할 사람이 없는 이곳은 갯벌 생태계의 천국이다. 그런데 물때에 맞춰 갯벌을 이용하던 분들이 노쇄하거나 돌아가시면서 해루질 같은 전통 어로 방식도 점차 사라져가는 것 같다.
이색적인 자연 해변을 넘어
우린 둑방이 끝나는 해안가 동산 쪽 해변으로 곧장 걸어간다. 동산 아래 모래톱엔 등산할 때 산에서 보던 너덜지대의 돌보다 작은 자연석이 해변에 넓게 흩어져 있다. 아마도 침식 작용으로 동산에서 떨어져 나온 돌들이 독특한 해변 너덜지대를 형성한 것 같다. 모래톱 한 켠엔 키를 훌쩍 넘기는 갈대가 무성하다. 관광코스로 개발해도 좋을 것 같은 이색적이고 아름다운 자연 해변의 모습이다.
관광형 조망 포인트에서 선택되고 박제된 자연을 액자처럼 보던 현대문명사회에선 이런 '자연한 자연'의 해변의 모습을 볼 기회가 쉽지 않다. 자연이 만든 이채로운 해변 속으로 들어가 자연의 일부가 되어 걸을 수 있는 것이 도보 국토종주만이 갖는 매력이다.

▲해변 너덜지대이진마을로 향하던 길에 작은 돌들이 수놓은 이색적인 자연 해변을 걷는다. 건너에 완도와 달도가 코 앞에 보인다. ⓒ (사)사람길걷기협회
해변 너덜지대를 통과한 후 들로 나서면 드디어 저 멀리 이진마을이 보인다. 한반도 최남단의 해상 관문이자 조선 수군의 만호 군진이 설치됐던 매우 특별한 마을이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 앞에 버티고 선 동산 위로 이진성벽이 보인다. 성 둘레 2.5km 중 지금도 성벽 940m의 원형이 잘 남아 있는 성안 마을의 모습이다.
조선 수군 재건의 성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지방 관부와 민가가 함께 성안에 있던 읍성처럼 이진성은 수군만호의 지휘부와 마을이 같이 있던 성지이다. 그 많던 읍성이 일제의 '조선 지우기'로 철거되고 남은 것이 손에 꼽을 정도인 점에서 볼 때 원형이 남아 있는 이 이진성의 존재가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
이진성은 왜구 침입에 시달리던 고려 후기에 구축되기 시작해 1555년(명종 10) 일본이 전남 남해 일대와 제주도를 대대적으로 침략한 을묘왜변 이후 필요성이 더욱 커져 1588년(선조21) 군진이 설치됐고 임진왜란 후인 1627년(인조 5)엔 종4품 만호가 지휘하는 만호진으로 승격됐다.

▲이진마을로 향하는 길에 마을 남쪽의 둔덕 위로 이진성의 모습이 보인다. ⓒ (사)사람길걷기협회

▲이진성 남문 옹성 하단석남문은 유실됐지만 옆에 남문 옹성의 하단석은 지금도 원형대로 볼 수 있다. ⓒ (사)사람길걷기협회
특히 이진성은 이순신 장군이 수군을 재건한 중요 군진 중 하나였다. 당시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임진왜란(1592)의 명·일 간 휴전 협상(1593~1596)이 결렬된 후 일본은 다시 정유재란(1597)을 일으켰다. 이 때 이순신을 밀어내고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부산에 상륙한 왜군을 치러 삼도 수군 160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정했다가 칠천량에서 폭망하고 만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을 통털어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인 이 한 번에 삼도 수군은 와해되고 만다.
이로써 이순신 장군이 철통 같이 지켰던 남해 제해권을 왜군이 쥐게 됐고, 그 여파는 너무나 컸다. 왜군은 대대적인 서진정책으로 전라도 공략전에 나섰고 쉽게 남원 및 진주 등지로 침범했다. 바다로 전북 부안 앞바다까지, 육로로 충청·전라·경상도 일대가 유린되었다. 이제 일본은 재침의 애초 계획 대로 전라도 곡창지대 점령을 통한 해상 보급로 확보와 함께 한양 함락을 목전에 두었다. 안그래도 붕당의 폐해가 극한으로 치닫고 있던 조선의 멸망이 1910년보다 300여 년 앞당겨질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나라의 존망이 위태롭게 되자 조정은 백의종군으로 내친 이순신을 급히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수군을 수습하게 한다. 1597년 8월 3일, 진주 손경례의 집에서 선조의 교서를 받아 든 이순신은 그날 바로 출정을 준비한다. 당장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구례를 시작으로 곡성, 순천, 보성, 장흥을 돌며 군사·무기·군량과 병선을 모았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칠천량 몰살 와중에 도망쳐나와 숨겨둔 12척의 전선을 장흥 회령포에서 입수한 것은 조선 수군 재건의 기반이 됐다.
전함을 찾은 즉시 이순신 장군은 마량 앞바다부터 해상 기동훈련에 들어갔다. 이 때 벽파진과 전라 우수영에 결전의 진을 치기 전 마지막으로 이순신 함대가 들른 곳이 이곳 이진이다. 이진은 완도와 달도로 남해안의 물길을 협곡처럼 가둔 내해에 숨은 군진이다. 좁은 수로 같은 앞바다 건너엔 완도가 있고, 그 너머에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노량해전을 준비한 마지막 통제영이 있던 완도군 고금도가 위치한다. 그만큼 이진은 전략상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
이순신 장군 회복시켜 준 이진샘과 명량해전
남문지 쪽으로 마을에 들어선다. 남문은 유실됐지만 옆에 있는 남문 옹성의 하단석은 지금도 원형대로 볼 수 있다. 마을 안 장군샘 쪽으로 들어간다. 마을 광장 한 켠에 '이진성 장군샘'이 있다. 정사각형의 석축 우물은 약 200년 전(1839) 만들어졌는데, 샘은 수백년 더 이전부터 있었나보다. 이순신 장군이 기동 작전 중 토사곽란으로 몸이 아팠을 때 이 샘물을 마시고 치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밤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엄청난 부담감에 몸의 병까지 커진 상태였다.

▲이진성 장군샘이순신 장군이 토사곽란으로 몸이 아플 때 이 샘물을 마시고 치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사)사람길걷기협회
이순신 장군이 이진성에 유했던 당시는 정유재란 발발 직후 궤멸된 조선 수군을 시급히 재건하던 때였다.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조차 없었다. 개인적으로 당시 장군 자신은 고문 후유증과 만성 위염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이 압송돼 투옥된 게 연유가 돼 어머니를 잃고 모친상조차 지키지 못한 고통이 무엇보다 컸다. 아끼던 막내아들도 왜적에게 숨을 거둬 가족의 불행사가 내내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자신이 피땀흘려 일궈낸 수군은 와해돼 지휘관들과 군사들은 피란민에 섞여 여러 섬으로 숨어들어갔고 남은 군사들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전력과 사기가 바닥인 상태였지만 왜군의 한양으로의 진격을 막기 위한 나라의 존망을 건 일전을 준비해야 했다.
이순신 장군은 잘 알고 있었다. 바닷길을 내 주면 일본이 한양으로 직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만약 수군을 폐하면 적들이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 -<이충무공전서>
왜군도 수시 정탐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이순신이 다시 돌아왔지만 13척의 전함만 갖고 있다는 사실을. 어차피 이순신과 일전이 필요한데, 제아무리 이순신 함대라 해도 이번이 격멸할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을.
당시의 악조건 속 모든 부담감을 한 몸에 지탱했을 장군을 생각하니 애잔키만 하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장군에게 진정한 휴식을 주었던 이진마을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토사곽란으로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아플 때 이진마을의 온 주민들이 나서 장군을 극진히 보살폈던 것이 큰 힘이 됐다. 장군이 이진에서 몸을 치료하고 떠난 지 20여 일 만에 벌어진 전투가 세계 전쟁사상 최대의 기적 명량해전이다.
이순신 장군은 결전 전날 장수들을 불러모아 "살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졌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했으며,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그대들 뭇 장수들은 살려는 마음을 가지지 마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 <정유일기, 1597.9.15>
그렇게 죽기를 각오하고 나선 명량해전이었다. 13척의 배로 133척의 적선을 맞아 대승을 이룬 것도 기적이지만 왜군에게 빼앗긴 제해권을 되찾고 조선의 패망을 막아낸 결정적 승전이었다는 점에서 명량해전은 그 무엇보다 값진 대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