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김정은 만남 불발은 오히려 다행이다. ‘한반도 평화’ 새 전환점이 다가오고, APEC 의장국 한국이 국제위상을 높여야 한다. 불발 뒤 숨겨진 의미를 함께 살펴보자.

▲'천마총 금관 모형'과 한미 정상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천마총 금관 모형'을 선물한 뒤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19년 6월의 역사를 다시 들춰본다.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는 마치 무대 위의 단역배우처럼 국제 무대의 중심에서 금방 벗겨져 나갔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리더십을 널리 알리고자 했던 바로 다음 날인 6월 30일, 전 세계의 관심은 판문점으로 쏠렸다.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북한 땅을 밟은 역사적인 순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오사카 G20 정상회담이 폐막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판문점에서 남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되자, 아베 총리가 주도했던 국제제도의 논의는 실종되어 버렸다. 마치 스타의 출연보다 중요한 것은 없듯이.
그 이후의 흐름은 더욱 비극적이었다. 판문점 회담 다음날인 7월 1일, 일본은 한국을 향해 경제 전쟁의 포성을 울렸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수적인 소재 3개 품목의 수출을 규제하겠다고 선언했다(니혼게이자이신문 2019년 7월 1일 자). 7월 4일부터 이 조치는 구체적으로 발동되었다. 마치 누군가의 리더십을 보장받지 못했을 때의 보복처럼, 일본은 "자유무역"의 원칙을 스스로 허물며 자국의 분노를 표출했다.
비밀스러운 미중 빅딜과 트럼프-김정은 만남 불발
이번에 경주에서 개최되는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도 비슷한 상황이 재연될 뻔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여러 차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만남을 제안했다. 실제로 "그가 연락한다면 (만남에) 100% 열려있다"며 거듭 구애했다(미국 NBC 방송 2025년 10월 24일 자). 판문점의 32시간 만남을 재현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하지만 북한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결국 2025년 10월 29일 한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에는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며 만남이 불발되었음을 공식화했다(세계일보 2025년 10월 29일 자).
트럼프-김정은 회담의 불발은 사실 한국에게 독이 아닌 약이 될 수 있다. APEC 의제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2019년 오사카의 교훈을 거울삼아, 이번 경주 APEC에서 한국은 국제 규범을 조정하고 재설정하는 주도국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할 기회를 얻었다(관련기사:
트럼프 '관세폭탄' 후폭풍, 세계무역지도가 바뀔 수 있는 핵심 세 가지). 새로운 '레짐 메이커' 한국의 역할이 빛을 발한다면 국제규범의 귀환도 꿈은 아니다.
"2025년 APEC 의장국인 한국은 'Connect–Innovate–Prosper'를 축으로 AI·공급망·포용성 의제를 선도하겠다는 구상을 공식화했다. 연중 다자 회의 트랙을 통해 아시아·태평양에서 '분쟁해결 절차 최우선' 원칙을 재확인하고, 비상권한 남용을 통상정책에서 억제하는 가이드라인을 회원국 합의문에 반영할 창구를 확보했다. 의장국의 조정력은 규범 이행을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경제적 확실성'의 조건으로 재정의하는 데 쓰일 수 있다."
2019년 판문점 회담의 역사적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분단된 적국의 땅을 밟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군사분계선을 넘어간 것은 지정학적으로 격이 다른 신호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이중적이었다. G20이라는 선진국 중심의 다자협력 체계는 "피스메이커"의 극적 순간에 밀려났고, 국제규범의 논의는 뒷전으로 밀렸으며, 일본의 리더십 실종은 곧 국가 간 상호 신뢰의 붕괴로 이어졌다.
이번 APEC에서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바로 그 비극을 역전시키는 것이다
한국은 2005년 부산 APEC에서 선진국과 개도국의 이해를 조정해 '부산 로드맵'을 이끌어낸 국가다. 그보다 훨씬 이전인 1991년 서울 제3차 APEC 각료회의에서는 중국, 대만, 홍콩의 '경제권'으로서의 참여 문제라는 극도로 민감한 주권 문제를 해결하는 중재자 역할을 했다. 당시 한국은 한중 수교를 앞두고도 대만과의 관계를 유지하던 기로에서, 세 경제권을 모두 포함시키되 '국가'가 아닌 '경제 단위'로 재정의함으로써 중국의 체면과 대만의 외교적 고립 탈출이라는 상충하는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켰다.
이제 2025년, 한국이 APEC 의장국으로 나서는 시점에서 상황은 더욱 절박하다.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와 중국의 희토류 수출통제, 그리고 신냉전 구도 속에서 다자주의 질서는 거의 붕괴 직전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에 대해 "현재 그들이 내고 있는 관세에 추가로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미국 폭스뉴스 2025년 10월 10일 자). 세계 GDP의 60% 이상, 교역량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APEC의 21개 회원국들은 보호주의의 광풍 앞에서 상호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APEC 의장국으로서 한국이 미중 정상회담을 주선하고, 북미 정상회담을 주동해야 한다는 단순한 외교적 야심은 오사카의 실패를 반복할 뿐이다. 대신 한국이 해야 할 일은 세계무역 질서의 위기 속에서 '대화의 가능성'을 담보하되, 국제제도 자체의 정당성과 효율성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2019년 판문점의 극적 순간이 결국 국제기구의 역할을 축소시켰다면, 2025년 경주의 APEC은 오히려 국제규범의 필요성을 재확인시키는 무대가 되어야 한다."
경주의 터닝포인트
구체적으로 한국은 다음을 주도해야 한다. 첫째, 지정학적 긴장 속에서 '공급망의 정상화'라는 실질적 의제를 강조함으로써 보호주의의 유혹에서 회원국들을 돌아서게 하는 것이다. 둘째, 인공지능과 디지털 경제라는 새로운 국제규범의 영역에서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디지털 격차를 줄이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셋째, 미중 간의 '거래(deal)'가 아니라 '상호 신뢰의 복구'라는 원칙 위에서 회담이 이루어지도록 의제를 설정하는 것이다.
트럼프-김정은 회담의 불발은 역설적으로 '청년 외교관'인 한국이 2019년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2025년, 성숙한 '성장외교(실패의 교훈을 제도개혁과 다자주의 복원으로 연결하는 전략적 외교)'로 응답할 기회를 얻었음을 의미한다. 2005년 부산 APEC에서 '자유롭고 개방된 무역 체제'를 지지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던 바로 그 한국이, 이제 '다자주의적 협력과 신뢰'라는 더 높은 수준의 국제규범을 제시할 차례가 온 것이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부산 김해공항에서 시진핑 주석과의 미중 정상회담을 통해 관세 전쟁을 해결하는 '빅딜'을 체결한다면(뉴시스 2025년 10월 29일 자), 그것은 사실 한국의 리더십이 아니라 두 강대국의 리더십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여전히 예측 불가능한 미중 관계 속에서, 회원국들의 공통 이해를 모아 '개방과 협력'의 원칙을 재확인하는 선언문을 도출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장국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대한민국의 진정한 '피스메이커' 역할이 있다.
국제규범의 '조정자'가 되는 것이다
오사카에서 일본의 리더십은 그 다음 날의 극적 사건 앞에 무너졌다. 그 교훈을 잊지 않는다면, 경주의 APEC은 다르게 끝날 수 있다. 대한민국이 국제제도의 수호자이자 국제규범의 조정자로 우뚝 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한국은 'K-성장외교'의 실천 축을 공급망 복원, AI 규범, 기후·에너지 협력 등 구체적 의제로 전개하고, 각 의제별 로드맵과 성과지표를 제시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파인에도 실립니다. 김영근은 고려대학교 글로벌일본연구원 겸 인문학과동아시아문화산업과정 교수이며, 사회재난안전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포스트 제국주의』(공저), 『한일관계사 1965-2015. II: 경제』(공저), 『한일 관계의 긴장과 화해』(편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