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행중인 흰죽지수리 ⓒ 이경호
10월의 찬 바람이 스쳐 가는 화성호. 갈대가 몸을 흔들고, 멀리 청둥오리 무리가 날아오른다. 그 순간, 하늘 위로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짙은 갈색 깃털 사이로 어깨 부분의 발근색 갈색 반점이 번쩍였다. 흰죽지수리다! 망원경 너머, 수리는 장엄했다. 한 바퀴 크게 원을 그리며 상승 기류를 타더니, 순식간에 멀어졌다. 어깨의 밝은색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이 장면은 화성호를 찾은 대전환경운동연합 탐조인들에게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필자도 29년 만에 조우다. 나름 오랫동안 탐조를 해왔지만 흰죽지수리와는 인연이 없었다. 1996년 가을 흑산도 저수지를 지키듯 미루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는 1개체를 본것이 처음이었고, 마지막일 줄 알았다. 다행히 화성호에서 다시 두번째 조우를 하게 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흰죽지수리(Aquila heliaca)는 영어로 ' Eastern Imperial Eagle'이다. 황제수리라는 이름 답게, 그 모습은 위엄과 고요함을 동시에 지녔다. 하지만 지금 이 땅에서 이 새를 보는 일은 기적에 가깝다. 환경부의 겨울철새 동시센서스에 따르면 국내에서 3개체 안팎만이 관찰되는 매우 귀한 새이기 때문이다.

▲흰죽지수리 국내 월동현황 ⓒ 환경부 철새지리정보시스템 화면갈무리
정확히 말하면 흰죽지수리는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다. 그저, 인간의 시야에서 멀어졌을 뿐이다. 몽골, 카자흐스탄, 헝가리, 러시아 남부의 초원지대가 이 새의 주요 번식지이고, 겨울이면 남하해 중국 남부와 인도 북부로 이동한다. 현재 약 2000~3000쌍 정도가 서식하는 것으로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은 진단하고 있다. 적은 개체수로 국제적으로도 취약종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으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은 그 여정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말하자면 변두리의 쉼터다. 먹이가 풍부하고 사람의 간섭이 적을 때, 드물게 머물다 간다.과거에는 한강 하류, 금강하구, 낙동강 유역 등에서도 관찰됐지만, 하천이 직강화되고 습지가 매립되면서, 그들의 발길은 점점 줄었다. 때문에 탐조인들 사이에는 매년 오는 새지만, 매번 처음 만나는 새 처럼 느낀다.
Imperial Eagle은 오랫동안 제국과 권력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러시아 제국의 문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깃발, 심지어 유럽 귀족 가문의 가보에도 이 새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제국이 확장될수록, 정작 이 새는 설 자리를 잃어갔다. 벌목과 농경지 확대, 전선 감전, 밀렵이 이어지며 유럽에서는 개체수가 급감했다. 20세기 후반에는 헝가리 전역에 50쌍도 남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황제의 새는 권력의 상징에서 생태적 회복의 상징으로 변모했다. 헝가리,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는 1990년대 후반부터 'Imperial Eagle LIFE Project'를 추진해 전선 절연, 인공둥지 설치, 서식지 복원 등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지금은 헝가리에만 350쌍 이상이 번식하고 있다고 한다. 일정하게 복원이 되어가고 있는 과정중이다.
흰죽지수리의 경우 여러차례 화성호에서 확인이 됐다. 화성호가 여전히 습치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는 종이다. 2002년 간척 이후 담수호로 만들여 했지만 여전히 바닷물이 들어오고 있다. 넓은 농경지와 저수지, 갯벌이 공존하며 다양한 먹이원을 제공한다. 들쥐, 논새, 물닭, 오리류 등은 흰죽지수리의 주요 먹이다.

▲흰죽지 수리의 비행모습 ⓒ 이경호
최근 몇 년간 화성호 일대에서 탐조 활동과 보호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더불어 개발의 이유가 있어 농사를 짓는 농미들을 제외한 사람의 접근이 조절되고 있다. 기온 상승으로 몽골 초원의 겨울이 더 혹독해지면서, 일부 개체들이 더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한다. 흰죽지수리는 본래 이동성이 매우 강한 새지만, 이동의 패턴은 언제나 생태적 안정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성호를 찾았다는 건, 적어도 이곳이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화성호의 평온한 풍경 뒤에는 불안한 현실이 있다. 간척지 인근에는 여전히 대규모 산업단지 조성과 도로 확장계획이 진행 중이다. 전봇대 감전사고, 불법 사냥, 농약 중독은 여전히 흰죽지수리의 생존을 위협한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전력선 감전이 흰죽지수리 사망 원인의 30%정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헝가리 정부는 2010년대 들어 전국 전신주 절연화 사업을 국가정책으로 추진했다. 한국은 아직 이런 체계적 대책이 미흡하다.
보호를 위한 행정 절차는 여전히 답보상태로 습지보호지역 지정조차 되지 않았다. 행정의 의지가 박약하다. 시민단체의 습지보호지역 지정과 람사지정에 대한 요구에 여전히 응답이 없다. 하지만 지역 개발 압력은 거세다. 흰죽지수리의 서식만으로도 보호지역의 지정가치가 있지만, 실제 현장의 움직임은 여전히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어어지면 흰죽지수리는 화성호에서 볼 수 없게 될 수 밖에 없다. 흰죽지수리뿐 아니라, 이 땅의 수많은 야생 생명들 모두가 마찬가지다.
흰죽지수리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부침을 겪어온 새다. 제국의 상징으로 추앙받았고, 산업화 속에 버려졌으며, 유럽에서는 공존의 상징으로 돌아왔다. 새들의 이동은 생존의 본능이자, 경계의 초월이다. 생태학자 데이비드 애브럼은 "새의 비행은 인간이 잃어버린 감각의 기억을 깨운다"고 했다. 화성호의 하늘을 도는 흰죽지수리를 바라보며, 우리는 문명의 속도와 자연의 속도가 얼마나 다른지를 깨닫는다. 인간은 하늘을 점령하려 하지만, 정작 날지 못한다.
인간 당신들은 여전히 이 하늘을 지킬 의지가 있느냐고 묻고 싶다. 30년 만의 재회! 그러나 사실 그 새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우리가 너무 바빠서, 너무 무심해서, 보지 못했을 뿐이다. 화성호의 하늘은 오늘도 열려 있다. 그 위로 흰죽지수리가 느린 원을 그리며 비상했다. 날지 못하는 땅 하늘을 이제 제발 새들에게 돌려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