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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9일, 대한민국 정부를 대상으로 한 8년간의 배상 소송에서 122명의 미군 '위안부'가 승소했다. 2025년 9월 5일, 117명의 미군 '위안부'들은 미군을 대상으로 한 소송을 하겠다고 나섰다. 일본군 '위안부'에 이어 미군 '위안부'는 새로운 한국여성사를 쓰고 있다. 그렇다. 미군 '위안부'들은 국가폭력이 드리운 긴 그림자와 가부장제 성문화의 깊은 낙인, 사회 불평등과 차별의 벽을 뚫고 여성해방과 인간존엄성을 향한 선언을 하고 있다.
 2022년 9월 30일 국내 주둔 미군을 상대로 한 기지촌에서 성매매에 종사한 여성들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는 9월 29일 이아무개씨 등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정부가 원고들에게 각 300만원∼700만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날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의 국가배상소송 상고심 선고 판결 기자회견에서 원고인 김아무개씨가 눈물을 닦고 있다.
2022년 9월 30일 국내 주둔 미군을 상대로 한 기지촌에서 성매매에 종사한 여성들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는 9월 29일 이아무개씨 등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정부가 원고들에게 각 300만원∼700만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날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의 국가배상소송 상고심 선고 판결 기자회견에서 원고인 김아무개씨가 눈물을 닦고 있다. ⓒ 연합뉴스

2022년 9월 29일 오전 10시, 대법원 1호 법정에서 대법관이 판결문을 낭독했다.

원고 이○○ 외 95명, 피고 대한민국, 사건 2018다224408 손해배상(국), 상고와 부대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상고비용과 부대상고비용은 각자 부담한다(대법원, 2022년 9월 29일).

짧은 판결이 끝나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곧 방청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재판 참여자들은 법정을 나서자마자 원고대리인 중 한 사람인 하주희 변호사를 둘러쌌다. 하주희 변호사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큰 목소리로 승리를 자축했다. 그때야 비로소 안도와 환희의 물결이 퍼져나갔다.

2014년 6월 25일 미군 '위안부'였던 원고 122인을 대리하여 변호인단이 소장을 접수한 지 8년 3개월 만에 결국 원고가 승소한 것이다. 이 판결을 통해 법원은 권위주의 시기 한국 정부가 기지촌을 조성, 관리, 운영했고, 미군 '위안부'의 성병을 조직적이고 폭력적으로 관리했으며, 성매매를 정당화하고 조장했음을 인정하고, 원고에게 배상하도록 결정했다.

그로부터 약 3년 뒤인 2025년 9월 5일 이전 소송의 원고 22인과 새로운 원고 95인, 총 117인의 미군 '위안부' 여성들이 다시금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다. 과거 소송의 대상은 한국 정부의 불법행위였지만, 이번 소송은 한국 정부뿐만 아니라 미군의 불법행위에 초점을 맞추었다. 다만 1966년 체결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과 1967년 제정된 주한민사법*은 미군과 군무원의 불법행위에 대해 한국 정부가 국가배상법에 따라 손해 배상하도록 규정했으므로, 이번 소송의 피고는 역시 한국 정부다. (*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아메리카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의 시행에 관한 민사특별법"이다.)

역사사회학자로서 나는 성매매라는 렌즈를 통해 한국 현대사, 특히 한국의 국가 건설 과정을 분석해 왔다. 그리고 첫 번째 소송에서 한국 정부의 책임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를 원고측변호사들에게 제공하고 법정에서 전문가 증언을 한 바 있다. 이 글에서는 미군 '위안부'에 대한 한국 정부의 성병 통제의 배후에 주한미군이 있었음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 글은 특히 박정희 정부 시기 기지촌의 조성과 1960년대 중반에 경기도 기지촌 일대에 설립된 성병관리소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성병관리소는 미군 '위안부'에 대한 조직적, 폭력적 성병관리의 핵심 장치다.

박정희 정부의 기지촌 조성

1961년 5월 16일, 마흔세 살의 박정희 소장이 일으킨 군사쿠데타로 장면 정부는 붕괴했다. 새롭게 등장한 독재자는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를 근본적으로 재건하겠다는 전망을 제시했다. 그의 목표 중 하나는 "모든 사회 부패를 일소"하여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성매매를 포함한 성적 문란은 대표악으로 간주되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군정은 쿠데타가 발생한 지 불과 5개월 후에 윤락행위 등 방지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군정은 이러한 금지정책을 엄격하게 시행하는 대신 현실과 타협하는 길을 택했다. 1962년 6월 군정은 성매매가 묵인되는 104개의 "특정지역"을 전국에 지정했다. 그중 61곳이 미군기지가 집중된 경기도에 위치했다. 다시 말해, 특정지역의 대다수는 기지촌이었고, 나머지는 한국 남성을 상대로 한 집결지였다. 군정은 같은 해 식품위생법도 제정했다. 이 법은 주로 식품 및 식당 위생에 관한 조항으로 이루어졌지만, "유흥영업종사자", 즉 "접객부"에 대한 면허, 등록, 건강진단서 발급 조항도 포함했다.

중앙 정부뿐만 아니라 경기도 지방정부도 기지촌 조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예컨대 1961년 9월 14일 자 경기도의 '유엔군 간이특수음식점 영업허가 사무취급 세부기준수립'은 "성병감염방지 및 풍기 유지 면과 주둔유엔군에 대한 위안 또는 사기앙양면을 고려하여 위안부들의 집단수용시설이 시급하다"라고 주장했다. 경기도가 어떤 형태의 "집단수용시설"을 구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 위안소와 유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위안부'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 문서는 막대한 예산으로 인해 해당 계획을 실행하기 어렵다고 인정했다.

 경기도 환경보건국 보건위생과가 작성한 유엔군 간이특수음식점 영업허가 사무취급 세부기준수립. 1961. 9. 14.
경기도 환경보건국 보건위생과가 작성한 유엔군 간이특수음식점 영업허가 사무취급 세부기준수립. 1961. 9. 14. ⓒ 국가기록원

경기도는 대신, 외출이 허가된 유엔군의 일일 추정치를 바탕으로 얼마나 많은 유흥시설이 필요한지 계산했다. 이 추정에 따르면, 매일 7555명의 군인이 술집이나 클럽을 방문할 것이고,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289개의 시설이 필요하지만, 기존 시설은 195개에 불과했다. 이 문서에서 경기도는 표면적으로 유흥시설 간의 과도한 경쟁을 제한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으나, 실제 목적은 미군 병사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능한 한 신속하게 더 많은 시설을 허가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 경기도는 미군 병사들을 위한 신규 시설 허가 권한을 보건사회부가 경기도에게 이관해 줄 것을 요청했고, 보건사회부는 곧바로 이 요청을 수락했다.

성병관리소는 왜 1965년부터 설립되기 시작했나?

경기도는 또한 성병에 감염된 '위안부'를 격리하기 위해 기지촌 일대에 성병관리소를 설립했다. 1965년 3월부터 5월이라는 짧은 시기 동안 양주(동두천), 파주, 포천, 고양, 의정부에 5개의 성병관리소가 설립되었고, 1968년 12월에는 평택에 하나 더 설립되었다.

1960년대 초에 작성된 미군과 한국 정부의 일련의 문서는 미군이 성병관리소 설립을 위해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음을 입증한다.

 의정부 성병관리소 설치조례. 1965. 4. 26.
의정부 성병관리소 설치조례. 1965. 4. 26. ⓒ 국가기록원

1963년, 주한미군 1군단은 "사령부 내의 높은 성병 발생률"에 우려를 표하며, 7사단이 주둔한 동두천과 1기병사단이 주둔한 파주 두 기지촌(용주골과 대추포)의 성매매 및 성병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다. 이 연구는 "위안부 치료에 더 많은 중점을 둘 것"을 촉구했으며, 동두천과 파주 용주골에 "시범 치료소(a prototype medical clinic)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주한미군 1군단이 성병 치료를 위한 시설 설치를 제안한 문서 (Construction of Medical Clinics) 1963.4.25
주한미군 1군단이 성병 치료를 위한 시설 설치를 제안한 문서 (Construction of Medical Clinics) 1963.4.25 ⓒ Kathy Moon Papers

미8군 군의관은 이와 같은 1군단의 권고에 동의했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 군인이 자신을 돌보는 데 실패하는 현실을 은폐하기 위해 한국 정부에 협조와 자원 지출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확신하지 못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우리는 한국 정부와 아주 좋은 협상 위치에 있지 않다"라고 결론 내렸다. 미8군의 IO(국제관계실) 관계자 또한 이 제안이 타당하다는 데 동의했지만 유사한 우려를 표명했다. "한국 정부에 성병 통제(their efforts)를 개선하라고 강제할 수단이 없으므로 우리의 협상 지위가 약하다. 또한 그들에게 성병은 경미한 사안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또 다른 문서는 실제로 한국 정부가 1군단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1년 후인 1964년 2월 보건사회부는 1군단이 제안했던 바로 그 장소인 동두천에 감염된 여성을 격리하고 치료하기 위한 "격리시설"(isolation station) 건설 계획을 입안했다. 결국 이 성병관리소들이 1965년에 갑작스럽게 설립되기 시작한 이유는 1군단이 1963년에 이 문제에 대한 사전 연구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보건사회부 성병관리소 설치계획 (Bureau of Public Health, Ministry of Health and Social Affairs, “The V.D. Control Programmes (Proposed) in Tonduchon Area, Kyonggi-Do Province," February 1964)
보건사회부 성병관리소 설치계획 (Bureau of Public Health, Ministry of Health and Social Affairs, “The V.D. Control Programmes (Proposed) in Tonduchon Area, Kyonggi-Do Province," February 1964) ⓒ Kathy Moon Papers

미군 '위안부', 한미동맹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

요컨대, 미국인들이 성병관리소를 구상했고, 한국 정부가 그 계획을 실행했다. 따라서 두 미8군 관계자가 한국 정부에 대한 그들의 협상 위치에 대해 가졌던 우려는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한국 관리들은 한국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예상보다 훨씬 더 협조적인 태도로 주한미군의 요청을 수용했다.

박정희 행정부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 정부의 승인이 절실했기 때문에, 주한미군의 요청에 완전히 순종적이었다. 일례로 앞에서 언급한 1961년 경기도 문서는 "유엔군에게 보다 나은 휴식처 제공, 사기 진작(을 통해) 혁명 후 한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것을 명시했다. 여기서 혁명은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를 의미했다.

더욱이, 1963년부터 박정희 정부는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려는 노력에 대한 대규모 대중적 반대에 직면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반감을 극복하기 위해 행정부는 미국 정부의 공개적인 지지를 모색했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은 정권의 외교 정책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1965년 5월 박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초청하고 지속적인 경제 지원을 약속했다.

따라서 성병관리소의 설립은 미국에 대한 한국의 충성심을 보여주는 또 다른 대표적인 예로 해석될 수 있다. 이 강화된 동맹은 '위안부'의 육체를 관료적으로 통제하려는 노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경기도 통계에 따르면, 성병관리소에서의 격리 건수는 1965년 2만 4382건에서 1970년 4만 5200건으로 증가했다. 수용자 수가 1965년 4985명, 1970년 9566명이었음을 고려하면, '위안부' 한 명당 평균적으로 일 년에 네다섯 차례 격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야흐로 대규모 격리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건물. 1973년 설립된 이 시설은 현존하는 유일한 성병관리소 건물이다.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건물. 1973년 설립된 이 시설은 현존하는 유일한 성병관리소 건물이다. ⓒ 연합뉴스

성병관리소는 형무소와 마찬가지로 기본권을 제약했다. 그러나 형무소는 재판을 거쳐 수감되지만, 성병관리소는 성병 감염 사실만으로, 심지어 성병에 감염되었다는 혐의만으로도 수용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성병관리소에서 행해진 강제 치료는 심각한 부작용과 고통을 동반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페니실린 부작용으로 인해 죽음을 초래하기도 했다.

페니실린으로 인한 사망 사고가 속출하자, 의사들 사이에서 페니실린 사용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자 1978년 보건사회부는 법무부에 "국가 성병관리 사업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의사가 사전에 페니실린 과민성 반응검사를 실시한 경우 사고가 발생해도 의사를 면책해줄 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이에 법무부는 의사가 반응검사와 더불어 "필요한 응급조치를 다한다면 면책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고 답신함으로써, 사고 의사에 대한 면책을 약속했다.

 페니실린 과민성 쇼크 사고처리에 관한 협조요청. 1978. 2. 8.
페니실린 과민성 쇼크 사고처리에 관한 협조요청. 1978. 2. 8. ⓒ 국가기록원

이로써 기지촌여성에 대한 페니실린 남용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는 정부가 기지촌여성의 건강이나 생명보다 성병통제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음을 입증한다. 한 마디로 미군 '위안부'는 한미동맹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이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Park Jeong-Mi. 2024. The State’s Sexuality: Prostitution and Postcolonial Nation Building in South Korea. Oakland: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chapter 2.
박정미. 2019. "건강한 병사(와 '위안부') 만들기: 주한미군 성병 통제의 역사, 1950-1977년." 사회와 역사 124.
경기도여성가족재단. 2025. 「기지촌여성 인권 기록 아카이브 구축사업」.
경기도여성가족재단. 2020. 「경기도 기지촌여성 생활 실태 및 지원정책연구」.


#미군위안부#기지촌#성병관리소#국가배상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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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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